목차
<서 론>
<본 론>
위정척사의 주체
위정척사의 의미
조선시대 위정척사론의 전개
- 조선전기
- 조선중기
- 조선후기
衛正斥邪論의 시대적 추이
- 조선후기의 천주교 배척론
- 1860년대 외세격퇴론
- 1870년대의 개항반대운동
- 1880년대의 개화정책 비판운동
- 1890년대 갑오개혁반대론
<결 론>
<본 론>
위정척사의 주체
위정척사의 의미
조선시대 위정척사론의 전개
- 조선전기
- 조선중기
- 조선후기
衛正斥邪論의 시대적 추이
- 조선후기의 천주교 배척론
- 1860년대 외세격퇴론
- 1870년대의 개항반대운동
- 1880년대의 개화정책 비판운동
- 1890년대 갑오개혁반대론
<결 론>
본문내용
전개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매국을 일삼은 박제순 등 5대신을 즉각 처형해야 하며 을사늑약의 문서를 파기함을 물론 이같은 사실을 세계 각국에 통보하여 일제의 죄를 성토하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추이 속에서 이제 유림은 상소운동에 의존하기 보다는 을미의병에 이어 자주독립을 위한 의병전쟁을 다시 일으킨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유림은 1905년 12월 26일 충남에서 수백명의 동지와 사우들을 모아놓고 강회를 열어 의병봉기로의 서약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을사늑약을 계기로 전개된 위정척사론은 정학을 숭상하고 사설을 배척하는 것은 물론 을사오적을 처형하고 군력을 양성하여 자주독립을 견지할 방책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였다. 여기에서 1905년의 위정척사론은 척사의 대상으로 을사오적과 일제로 규정하면서 을사늑약의 폐기와 배격을 강조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결 론>
이제까지 위정척사 사상과 운동에 있어서의 주체세력과, 시대별 전개과정 그리고 시대별 추이에 따른 위정척사 사상과 운동을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위정척사 사상에 대하여 간단한 평을 내려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위정척사 사상은 19세기 중엽의 상황을 통찰력 있게 판단하여 서양 세력의 수호통상 요구의 배후에 있는 침략성을 파악하였다. 이러한 판단을 바탕으로 하여 서양 세력의 침략에 대해서는 타협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항하여 전투도 불사해야 함을 강조하는 전투적 국가수호 의지를 발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정치체제와 사회 · 경제 질서를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데 그 목적을 두어 전근대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나 국내의 현실적인 정치 · 사회 문제의 개선 및 개혁을 포괄하였다는 데 그 의의를 둘 수 있겠다. 하지만 위정척사 운동에는 역사발전에 역기능을 한 보수적 성향이 강하게 내제해 있어 이러한 사상 및 운동의 이면에는 봉건적인 신분제를 고수하고 화이론에 얽매여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측면이 있다. 그리고 성리학의 이론도 복고적이고 관념론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서양, 일본과의 침략에 강하게 대응하면서도 성리학을 섬김에 따라 중국에 대해서는 비자주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는 모순점이 있었다. 또한 서양의 기술까지도 기기음교라 하여 비하하고 경시하여 기술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마지막으로 시대의 흐름을 무시하고 구체제의 강화에서 현안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인하여 민중의 참여를 얻지 못하고 단지 양반신분층의 사상으로 남게 되었다. 이로 인해 본문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의병 활동에 있어서도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위정척사 사상을 주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는 단순히 조선말의 배타적 · 보수적 사상이 아니라 항일의병운동과 민족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으며, 민족주의사상으로 발전한 면을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상 자체로서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주체성의 수호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근대 민족주의의 한 부분을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을사늑약을 계기로 전개된 위정척사론은 정학을 숭상하고 사설을 배척하는 것은 물론 을사오적을 처형하고 군력을 양성하여 자주독립을 견지할 방책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였다. 여기에서 1905년의 위정척사론은 척사의 대상으로 을사오적과 일제로 규정하면서 을사늑약의 폐기와 배격을 강조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결 론>
이제까지 위정척사 사상과 운동에 있어서의 주체세력과, 시대별 전개과정 그리고 시대별 추이에 따른 위정척사 사상과 운동을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위정척사 사상에 대하여 간단한 평을 내려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위정척사 사상은 19세기 중엽의 상황을 통찰력 있게 판단하여 서양 세력의 수호통상 요구의 배후에 있는 침략성을 파악하였다. 이러한 판단을 바탕으로 하여 서양 세력의 침략에 대해서는 타협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항하여 전투도 불사해야 함을 강조하는 전투적 국가수호 의지를 발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정치체제와 사회 · 경제 질서를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데 그 목적을 두어 전근대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나 국내의 현실적인 정치 · 사회 문제의 개선 및 개혁을 포괄하였다는 데 그 의의를 둘 수 있겠다. 하지만 위정척사 운동에는 역사발전에 역기능을 한 보수적 성향이 강하게 내제해 있어 이러한 사상 및 운동의 이면에는 봉건적인 신분제를 고수하고 화이론에 얽매여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측면이 있다. 그리고 성리학의 이론도 복고적이고 관념론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서양, 일본과의 침략에 강하게 대응하면서도 성리학을 섬김에 따라 중국에 대해서는 비자주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는 모순점이 있었다. 또한 서양의 기술까지도 기기음교라 하여 비하하고 경시하여 기술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마지막으로 시대의 흐름을 무시하고 구체제의 강화에서 현안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인하여 민중의 참여를 얻지 못하고 단지 양반신분층의 사상으로 남게 되었다. 이로 인해 본문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의병 활동에 있어서도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위정척사 사상을 주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는 단순히 조선말의 배타적 · 보수적 사상이 아니라 항일의병운동과 민족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으며, 민족주의사상으로 발전한 면을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상 자체로서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주체성의 수호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근대 민족주의의 한 부분을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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