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지역 유적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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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창지역 유적답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신재효 고택과 판소리
Ⅱ. 고창 읍성
Ⅲ. 오거리 당산(堂山)
Ⅳ. 고창 고인돌군
Ⅴ. 삼장(三藏)의 사찰 선운사
Ⅵ. 지장보살과 지장사상
Ⅵ. 전봉준과 동학혁명

본문내용

제국·반봉건투쟁이었으며, 이른바 봉건지배층의 지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과 농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의 대결이었다. 농민군이 지향한 방향은 봉건적인 생산관계와 수탈을 제거하고 소상품생산자로서의 자립 발전을 보장해주는 농민적 토지소유의 발전을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지향은 일련의 투쟁과정을 통하여 혁명의 방향으로 다듬어지고 발전해갔다. 탐관오리의 제거, 민씨정권의 타도와 봉건적 폐단의 시정, 봉건제도의 폐지, 친일정권의 타도와 식민지화의 저지로 운동과 사상을 단계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특히 제2차 농민전쟁을 통하여 일본 침략세력을 몰아내려는 반제·반봉건 민족운동을 전개했으나, 당시 갑오정권과 일본세력 및 보수유생들에 의해 철저히 압살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농민전쟁은 투쟁과정을 통하여 농민대중에게 봉건지배층과 일본 침략세력의 본질을 알게 했으며, 그들을 민족적·계급적으로 더욱 각성시키는 한편 광범한 대중을 반제·반봉건 투쟁세력으로 강화시켰다.
3. 정읍지역의 갑오농민혁명 유적지
정읍군 일대는 갑오혁명의 불길이 오른 곳으로, 농민군의 발자취를 더듬는 답사여행에서 첫 번째로 꼽히는 중요한 지역이다. 우선 고부면 죽산마을은 전봉준 등 농민 지도자들이 고부봉기를 모의하고 사발통문을 작성한 곳으로, 마을 입구에 그것을 기념하는 탑이 있다. 이평면의 만석보터, 말목장터, 그리고 지금은 고부초등학교가 된 옛 고부관아터는 1894년 1월 고부봉기와 관련된 현장이며, 농민군 최고의 지도자이자 조직자인 전봉준의 옛집이 복원되어 있는 장내리 조소마을도 빼놓을 수 없다. 더불어 농민군이 관군과 맞붙어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고 이후 농민전쟁의 전개에 큰 힘이 되어주었던 황토재 전투의 흔적이 서린 황토현 전적지, 1차 농민혁명 당시 호남창의소가 설치되었던 백산, 그리고 태인과 더불어 농민전쟁 최후의 전투 지역이었던 완평 땡뫼산 부근이 주요 유적지이다.
<고창에 있는 전봉준 생가>
5. 녹두장군 전봉준 생가
전봉준 생가는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 자리잡고 있는데 전봉준 장군이 고부봉기 때까지 5-6년 간 마을 훈장 노릇을 하며 기거하였던 집으로 혁명이후 불태워 진 것을 다시 보수하여 본채와 아랫채 그리고 마당가의 변소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시골집의 아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읍에 있는 전종분 고택>
전봉준의 자는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이다. 몸이 왜소하여 녹두장군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1855년(철종 6)에 고부군 향교의 정의를 지낸 장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이평면 장내리라는 설과 전북 고창군 덕정면 죽림리 당촌이라는 설이 있는데, 당촌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전봉준은 태인 산외리 동곡 마을에 옮겨 자리 잡았을 때에는 다섯 명의 가솔로 거느린 가장이었다. 스스로 선비로 자처하면서 서마지기의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이었으며,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훈장으로 생계를 보태기도 하였다. 부친인 장혁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그가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후 1894년 11월 25일 금구의 원평과 태인의 석현점에서 군대를 모집한 후 태인의 삼산에 웅거하여 최후의 혈전을 전개하였으나 일군과 관군에게 다시 패배하여 그의 무력항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수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28일 정읍 입압산성을 벗어나 순창 흥복산 속의 피로리(쌍치면 금성리)로 왕년의 부하였던 김경천을 찾았다가 그의 밀고로 12월 2일 밤에 체포되었다.
1895년 2월 9일에 제1차 심문을 시작으로 3월 10일 제5차 심문을 마치고 3월 29일 손하중·최경선·성두한·김덕명 등과 함께 교수형을 당하였다. 당시 교수형 집행장이던 강모의 말에 의하면 \"그는 과연 보기 전 풍문으로 듣던 말보다 훨씬 솟아나 보이는 감이 있었다. 그는 외모부터 천인 만인 중의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청수한 얼굴과 정제된 미목, 엄정한 기상과 강장한 심지는 과연 세상을 한 번 놀라게 할 만한 큰 위인 큰 영걸로 보였다.\"고 하였다.
전봉준이 동학교도였는가 아닌가하는 사실은 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학혁명이 농민층의 개혁의지의 표현인가 아니면 종교투쟁론인가 하는 것을 밝히는 데는 의미가 있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士를 업으로 삼았으며, 동학을 몹시 좋아는 했으나 전라도 동학 괴수라 할 것은 없다고 했다. 또한 전봉준이 접주였다는 데 대해서도 공초에서는 \"너는 고부에 주접할 때 동학을 가르쳤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몇몇 아동을 가르쳤을 뿐 동학을 가르친 바는 없다\"고 했다. 주접했다는 대목을 두고 당시 서당 선생을 접장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를 동학 접주로 있을 때라고 해석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접주는 교주인 최시형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전봉준은 일생을 통해 최시형을 만난 적이 없으며 따라서 최시형은 전봉준을 접주로 임명한 사실이 없다. 공초에서도 \"여러 사람에게 밀려서 접주가 되었다\"고 한 것처럼 동네사람들이 임의대로 접주로 추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최시형은 오히려 고부에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2차 혁명이 일어났을 때 \"국적이요 사문의 난적\"이라고 질타하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면 효도를 할 일이지 급심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전봉준이 동학교도였다거나 아니면 접주였다는 주장은 그가 동학을 주요한 변수로 하여 전개되었던 혁명을 주도한 지도자라는 사실을 의식한 선입견에서 온 성급한 단정이거나 아니면 영웅과 자신의 동일시를 통해 위광효과를 얻으려는 교단 측과 학문적 수련이 철저하지 못한 몇몇 학자들의 일방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건국대 신복룡 교수는 주장한다.
전봉준의 인물됨을 살펴보면, 그는 대인 관계가 원만했다거나 폭이 넓은 사람이었다고는 볼 수 없고 비교적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인물이었다. 그는 소외된 지식인이었으며, 교우관계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당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정읍의 김개남과 손화중, 금구의 김덕명, 그리고 태인의 최경선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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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5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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