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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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일본미술 [ 日本美術 ]
요약
1. 회화
2. 조각
3. 공예
4. 건축
5. 정원

중국미술 [ 中國美術 ]
요약
1. 회화
2. 조각
3. 공예
4. 건축
5. 서예

한국미술 [ 韓國美術 ]
요약
1. 선사시대
2. 삼국시대
3. 통일신라시대
4. 고려시대
5. 조선시대
6. 현대

분류

본문내용

되었는데, 그 때의 장신구 ·일상생활품 등이 부장품으로서 남아 있다. 불교는 372년에 처음으로 고구려에 전해졌으며 이로부터 한국미술의 중심적 추진력이 되었다. 목조와가(木造瓦家) 건축은 이미 낙랑군(樂浪郡:BC 108∼AD 313)의 중국인을 통하여 소개되어 있었으나 불교건축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불탑(佛塔)은 처음에는 중국식 고루목탑(高樓木塔)으로 동 ·서 ·북의 3면이 각각 독립된 금당(金堂)으로 둘러싸인 8각탑(角塔)이 있던 흔적이 고구려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나, 6세기경부터 화강암에 의한 석탑이 건조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경에 이르러 한국 석탑이라고 할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을 완성하게 되었다.
불상조각(佛像彫刻)은 고구려가 북위(北魏)를 주로 한 중국 북조(北朝)의 조각을 본보기로 하고 있는 데 반해서, 백제에서는 남조(南朝)의 영향을 받아 둥그스름한 얼굴에 온화한 ‘백조의 미소’라고도 할 수 있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머금은 불상이 만들어졌고, 고신라(古新羅)는 기본적으로는 북조불(北朝佛)에서 영향받아 엄숙하고 침울한 추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정면시(正面視) 위주의 평면조각에서 입체조각으로 발전한 것은 900년경으로 보이며, 대부분의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이 구리 또는 돌로 만들어졌다. 이 반가사유상을 포함하여 7세기 전반(前半)의 삼국 불상은 종래의 북위 전통에서 벗어나 북제(北齊) ·수(隋) ·초당(初唐)의 양식을 차례로 반영하여 의복 밑의 신체에 보다 주력하였다.
7세기 중엽이 되면 고신라의 불상도 한국적인 온화함을 되찾고, 구리 ·돌의 조각기술이 원숙해져 이후 통일신라의 황금기를 예시하고 있다. 회화는 압록강 중류 북안(北岸)의 퉁거우[通溝]와 대동강(大同江) 하류 북안의 용강(龍岡) 부근에 산재하는 고구려의 벽화고분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들은 후한(後漢)과 삼국시대의 중국벽화 고분에서 배워온 것으로, 발생기는 4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4~5세기에 걸친 초기 고분벽화는 중국식인 주인 부부의 초상화를 주로 하고, 6세기에 접어들면 부부를 중심으로 한 중요 생활기록, 즉 풍속화로 바뀌며, 7세기 전반(前半)에는 사신도(四神圖)와 수목(樹木) ·연화(蓮花)를 제재로 한 풍경화가 주류를 이룬다.
벽화고분은 백제의 공주(公州)와 부여(扶餘)에서 각각 볼 수 있으나 가야(伽倻) ·고신라 땅에도 전해져 근래에 고령 ·영주(榮州)에서도 1기(基)씩 발견되었다. 금속공예는 처음에 낙랑군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중국의 육조미술(六朝美術)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크게 발전하였다. 고신라의 금관총(金冠塚)에서 나온 순금제 외관(外冠)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것이 3개의 수목형(樹木形) 입식(立飾)과 2개의 녹각형(鹿角形) 입식을 단 시베리아 초원(草原) 일대에서 유래된 특수 형식인 데 반해서, 고구려 ·백제는 일보 전진하여 포제(布製)의 모자에 수목형 또는 초화형(草花形) 투조(透彫)로 된 전식(前飾)을 달았고, 71년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武寧王陵)의 유물은 고신라의 것보다 세련되었다.
고신라 토기는 3세기경에 성립한 초벌구이의 경도(硬陶)로서 고배(高杯) ·감()을 주체로 하고 있다. 표면 장식은 파상집선(波狀集線) ·기하학적 선(線)무늬 등으로 한정되어 소박 ·고졸(古拙)한 기형(器形)과 더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3. 통일신라시대 ▲ Top
통일신라시대로 들어서면 고총의 조명이 없어지기 때문에 고분 출토의 유품은 거의 없고 유품은 불교미술뿐이다. 불교는 더욱 더 융성해져 거대한 사찰이 건조되는데, 가람 배치는 삼국시대의 3금당 1탑(三金堂一塔) 또는 1금당 1탑식에서 1금당 쌍탑식으로 바뀌고, 석탑은 8세기 중간의 불국사(佛國寺) 석가탑으로 대표되는 아래위 2단의 기단 위에 세운 3층탑 형식으로 귀결된다.
9세기로 접어들면 석탑의 기단에 불상 등을 부조(浮彫)하여 장식적으로 되며, 또한 점차로 각부의 비례가 허물어져 쇠퇴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조각은 처음에 초당양식(初唐樣式)을 받아들여 삼국시대 말의 온화함이 상실된 것처럼 보이나, 8세기에 들어서 성당양식(盛唐樣式)을 반영하여 새로운 신체의 양괴(量塊)와 동적(動的)인 아름다움을 지니기 시작하였고, 8세기 중엽의 경주석굴암(慶州石窟庵)의 조각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석굴암은 화강암재(花崗岩材)를 쌓아올려서 만든 원형석굴(圓形石窟)로, 중앙에는 석가 좌상이 있고 주위의 벽면에는 나한(羅漢) ·보살(菩薩) 등의 부조상(浮彫像)이 배치되어 종교적인 엄숙함과 인간적인 온화함이 잘 조화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석불도 8세기 말이 되자 중국과 마찬가지로 급속히 쇠퇴하였다.
9세기로 접어들어 불교 자체의 타락과 예술성의 쇠퇴로 말미암아 석불은 목이 없는 기형적인 것이 되어버렸고, 금동불은 천편일률적인 소상(小像)이나 험상궂은 모습을 가진 것이 되어버렸다. 또한 구리의 부족으로 철불(鐵佛)은 종래의 아미타(阿彌陀)와 석가 대신 약사(藥師)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주류를 이루었다. 신라 공예 중 가장 뛰어난 것은 범종(梵鐘)이다.
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771년에 주조된 봉덕사(奉德寺) 동종(銅鐘)은 포탄형(砲彈形)의 아름다운 곡선을 가지고, 4구(軀)의 윤곽과 2체(體)의 부조(浮彫)된 비천상(飛天像)으로 장식되었으며, 정부(頂部)에는 중공(中空)의 통형(筒形)과 용형(龍形)의 유()가 달려 중국의 종과는 다른 독특한 형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석탑에 격납(格納)하는 사리감(舍利龕)도 우수한 것이 있어, 682년에 건립한 감은사지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에서 나온 금동제 사리감은 그 대표로서, 외함(外函)에는 정교한 부조사천왕(浮彫四天王)을 붙였으며, 주체는 복잡한 천개(天蓋)를 지닌 방단상(方壇狀)의 불단이다.
토기는 여러 꽃무늬를 스탬프로 찍은 골호(骨壺)가 대부분이며, 고신라 시대의 고배와 감()은 자취를 감추고 당기(唐器)를 모방한 병과 유개발(有蓋鉢), 그리고 경주(慶州)에서는 우수한 조각기법을 보인 귀와(鬼瓦), 복잡한 연화(蓮花) ·동물 ·당초무늬 등으로 장식한 엄청난 양의 와전류(瓦塼類)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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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1.12.08
  • 저작시기2001.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0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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