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과 교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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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화과나무의 잎이 돋는 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용적으로 가리킨다. 그리고 그 멸망을 보면, 인자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가는 멸망의 참혹상을 앞에 두고 예수님이 오심이 가까웠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가가 주님이 가까이 왔다는 것에 대하여, 13:32에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즉 마지막 날이 언제인가 하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예언이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소관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독립전쟁에서 실패하고 도륙을 당하고 난 후에, 거짓 그리스도가 판을 치고 있는 혼란의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 마가는 그런 잘못된 예언을 믿지 마라는 것이다. 그 날과 그 때는 주님에게서 받은 예언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이 가까운 것은 틀림없으나 그 날은 아무도 모른 다는 것이다.
13:44이하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록한다. 집주인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저물 때부터 새벽까지 아무 때든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졸지 말고 깨어서 집주인이 맡긴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가의 메시지의 초점이 들어 있다. 마 24의 내용이 마가복음의 반복이다. 그리고 25장도 연결되는 본문이다. 열 처녀의 비유; 깨어 기다려야 한다. 달란트의 비유; 이 비유는 종말론적 비유이다. 주인이 떠났다는 것이다. 떠남과 오심의 사이가 종들의 시간이다. 이 비유는 기다리는 종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치고 있다. 양과 염소의 비유;
이 본문들의 중요한 정신은 주인이 맡긴 그 일을 충성스럽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심을 기다리는 종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뛰어다니지 말아야 한다. 오직 주님이 맡긴 일을 충성스럽게 해야하며,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했는가에 따라서 심판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들의 해야 할 일은 작은 일들이다. 종말론은 작은 일들이 영원과 연결되어 있다.
마가나 마태나 주님의 오심이 언제인지는 모른다. 그러니 허황되게 뛰어다니지 말고 주님이 맡긴 일을 충성스럽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종말론을 바르게 알면 붕붕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땅의 사람이 되어 간다. 얼마나 신실하게 주어진 일을 수행했는가에 따라서 최후의 심판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마가의 묵시록의 의도는, 첫째로 예루살렘이 망했고, 대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둘째로 무화과의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깝듯이 예루살렘 멸망후에 주의 오심이 가깝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거짓 예언에 속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오심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넷째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맡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생과 영벌의 시금석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깨어서 자기의 일을 신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종말 (참고)
☞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에서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32항에는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육체는 땅으로 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전통적인 개혁주의 입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플라톤의 이원론이 배경에 있다. 이것은 히브리적인 사고와 성경적인 정신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항이다.
☞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냥 사람이 죽는 것이다. (겔18:20)에서 "범죄한 영혼은 죽으리라"는 말씀은 히브리인에게는 "범죄한 육체는 죽으리라"와 같은 의미이다. 나라는 존재가 죽고(그러나 멸절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지상적인 실존)이 끝나고 하나님 앞으로 가서 심판받고 나서 그의 삶이 연속되어지는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사건에서 지옥의 고통은 실제적인 육체적인 고통이었다.
☞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이란 무엇인가? 하늘에서 입게 될 부활체을 말한다. 대비가 분명하다. "육체"(땅에) ↔ 부활체(하늘)라는 구도가 분명하다.
☞ 하늘에 있는 처소를 덧입는다. : 새로운 부활체를 입을 때 쓰는 용어이다. 바울의 전형 적인 표현이다.
☞ 고전 15장과 고후 5장이 죽은자들에 대해서 가장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늘의 육체"가 고후 5장에서는 죽은 이후에 천국에서 "부활체"로 바뀐다. 고전15장에서는 주께서 재림하실 때 홀연히 하늘의 육체로 변한다. 이것은 시각적인 전이가 일어난 것이다.
☆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
헬라인들은 육체 없는 것을 주장하나, 바울은 육체를 중요시함.
육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부활체를 얻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하늘의 영광스런 육체를 입고 사는 삶을 나타난다고 말한다.
♧ 장막집이 무너지면은 죽음을 나타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주님이 오실 때 부활체을 덧입는다고 말하고
고린도 후서에서는 자신이 죽을 때 부활체를 덧입는다고 말한다.
☞ 변화산 사건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상태도 영광스럽게 변모한 모습이었다.(요11:23∼)의 나사로의 부활 사건에서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살리라 ∼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했으나, 마리아는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했다. 마리아는 묵시 문학적인 영향으로 마지막의 부활을 알았으나, 예수님은 지금 당장의 부활을 말한 것이다.
☞ 만약에 개인의 부활이 일어난다면 역사의 종말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개인의 부활이 실존적인 완성을 이룰 수는 있느나, 개인은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역사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라는 개인은 새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지는 역사의 완성을 대망하고 있다. 그 날만이 모든 것이 완성되는 날이다.
☞ (골3:4, 살전4;14∼)에 의하면 역사의 부활은 개인의 부활의 출현이다. "데리고 오신다"는 표현과 "일어난다"는 표현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추정해보건데 역사의 마지막이 되면 살아있는 자들은 영광스러운 부활체를 덧입고, 이미 죽은 자들은 지상적인 시각으로 부활하는 것이요, 천상적인 시각으로는 주께서 데려오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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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43페이지
  • 등록일2002.09.28
  • 저작시기2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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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0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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