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해방신학의 형성요인
1) 사회.역사적, 문화.경제적 배경.
2) 신학내적인 동인
2. 해방신학의 신학적 주제 (교회에 대한 정의와 역할(사명)에 대해서)
1) 교회공동체
2) 교회공동체의 당면과제
3. 신학적인 한계점
1) 사회.역사적, 문화.경제적 배경.
2) 신학내적인 동인
2. 해방신학의 신학적 주제 (교회에 대한 정의와 역할(사명)에 대해서)
1) 교회공동체
2) 교회공동체의 당면과제
3. 신학적인 한계점
본문내용
근원을 두고 있으며, 크리스챤의 생활을 일컬어 빠스카, 곧 넘어감(유월)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 * 해방의 개념 : 1)정치적 해방, 2)역사를 통해서 달성되는 인간의 해방, 3) 죄로부터의 해방과 하느님과 친교의 개시)
역사적, 정치적 해방사건이 곧 그리스도왕국의 성장이며, 구원사건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 왕국의 도래 '자체'는 아니며 구원의 '전부'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왕국의 역사적 실현이며 따라서, 그 완전상을 선포하는 역할을 한다.
해방신학에 있어서 구원이란 개념은 단지 종교적 영역에만 머무르며, 사회질서와는 간접적, 함축적으로밖에 연관되지 않으며, 사회의 근본구조와 핵심에는 연관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부인한다. 해방신학은 그리스도의 구원은 모든 형태의 비참과 모든 형태의 착취와 모든 형태의 소외에서 인간을 풀어주는 철두철미한 해방임을 인정하고 있다. 만유를 총괄하는 해방운동의 완전한 의미가 발견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다.
" 우주와 인간역사의 동력, 정의와 인간애가 군림하는 세계를 창조하려는 움직임, 물리적이고 도덕적인 비참과 무지와 굶주림 등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모든 것에서 인간을 해방하고자 하는 노력, 인간존엄성에 대한 각성 등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서 유래하고 변혁되며 완성에 도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은 바로 인간역사의 한가운데에 현재화하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는 인간행동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 위의 책, p.230.
3. 신학적인 한계점
사실 이 발제를 준비하면서, 특히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을 읽으면서, 너무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고, 그리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기에 , 그 안에서 주제넘게 신학적인 한계점을 지적한다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우리의 전통과는 다른 맥락에서 이루어진 신학이기에 몇가지 의문점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첫째, 역사적으로 볼 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기준점에 의해서 정의가 되어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가령, 그리스-로마 시대는 제의적이며 법적인 구원의 주제가 강조되었고, 실존주의적 경향이 강한 근래에 이르러는 개인의 내면적인 의식과 실존의 주체적 결단이 구원의 요소로 강조되어 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해방신학에서는 이와는 다른 구원의 개념을 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듯이, 구원도 입김 센 사람의 의견을 따라가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둘째, 오늘 제가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부분이 구원에 관한 문제인데요, 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문제와 직결이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죄가 해결되는 그곳에 구원이 임한다는 생각을 저는 평소에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에서는 죄라고 하는 부분을 어떤 정치, 경제, 사회, 권력, 구조, 등의 죄를 이야기하지 결코, 개인의 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개인의 거듭남의 문제는 해방신학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는 문제가 의문으로 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개인의 해방의 관해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즉, 개인의 거듭남, 회심에 관한 문제에 대한 바른 제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세째는, 구원의 보편성 문제인데요. 우리가 흔히 던지는 질문입니다. 해방신학에서 항상 가난한 자들, 억압받는 자들의 구원을 이야기하는데, 그리스도적 구원이 마치 가난한 사람들의 독점물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결 론
이제 결론적으로 몇가지의 이해들을 서술하면서 본 발제를 통한 교훈이나 신학적인 교훈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남미의 교회는 현실에 대한 진지함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교회내적인 문제만으로 신학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교회외부로 그들의 시선을 돌렸고, 우리가 소홀히 하는, 쉽게 흘려버리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겁니다. 우리들 자신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설교나 행사 대부분이 교회 내부의 일에 치중한 것이 대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진지하게 사회로,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자들에게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 어떠한 교회의 체제가 현실문제의 도전들을 감당할 수 가 없을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끊임없이 그 시대정신에 따른 개혁전통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셋째, 남미의 교회가 대담하게 정치적 영역에서 가지지 못한 자를 도와주는 결단을 위해 행동하며, 경제적인 영역에서도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우리 역시 우리의 할 일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한국교회 자체내의 신학, 신앙하는 풍토가 세상과의 구별을 하기 원하는 이원론적인 구조를 좋아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넷째, 남미의 교회는 연대라고 하는 것을 중요시하는데, 이는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연대입니다. 이것은 계급, 교단, 국가적인 차원을 넘어서 의식의 확산인 겁니다. 우리 나라안에서도 이런 연대문제가 원활하게 해결이 되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학교 내에도 북한 어린이 돕기 기도회, 식권 사기 운동이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전체 학우의 참여를 얻어 내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연대(솔리데리티)가 약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나오는 말입니다. 서구의 전통적인 신학이 제기하고 있는 신학적 방법론으로는 오늘날 소위 제3세계의 교회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자기가 속한 나름대로의 자리에서 사회, 역사적 상황을 중심으로 한 창조적인 신학적 사고와 방법론을 새롭게 형성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해방신학을 이해할 때, 상당한 교훈과 도전을 주는 학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본 발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 해방의 개념 : 1)정치적 해방, 2)역사를 통해서 달성되는 인간의 해방, 3) 죄로부터의 해방과 하느님과 친교의 개시)
역사적, 정치적 해방사건이 곧 그리스도왕국의 성장이며, 구원사건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 왕국의 도래 '자체'는 아니며 구원의 '전부'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왕국의 역사적 실현이며 따라서, 그 완전상을 선포하는 역할을 한다.
해방신학에 있어서 구원이란 개념은 단지 종교적 영역에만 머무르며, 사회질서와는 간접적, 함축적으로밖에 연관되지 않으며, 사회의 근본구조와 핵심에는 연관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부인한다. 해방신학은 그리스도의 구원은 모든 형태의 비참과 모든 형태의 착취와 모든 형태의 소외에서 인간을 풀어주는 철두철미한 해방임을 인정하고 있다. 만유를 총괄하는 해방운동의 완전한 의미가 발견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다.
" 우주와 인간역사의 동력, 정의와 인간애가 군림하는 세계를 창조하려는 움직임, 물리적이고 도덕적인 비참과 무지와 굶주림 등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모든 것에서 인간을 해방하고자 하는 노력, 인간존엄성에 대한 각성 등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서 유래하고 변혁되며 완성에 도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은 바로 인간역사의 한가운데에 현재화하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는 인간행동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 위의 책, p.230.
3. 신학적인 한계점
사실 이 발제를 준비하면서, 특히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을 읽으면서, 너무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고, 그리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기에 , 그 안에서 주제넘게 신학적인 한계점을 지적한다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우리의 전통과는 다른 맥락에서 이루어진 신학이기에 몇가지 의문점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첫째, 역사적으로 볼 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기준점에 의해서 정의가 되어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가령, 그리스-로마 시대는 제의적이며 법적인 구원의 주제가 강조되었고, 실존주의적 경향이 강한 근래에 이르러는 개인의 내면적인 의식과 실존의 주체적 결단이 구원의 요소로 강조되어 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해방신학에서는 이와는 다른 구원의 개념을 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듯이, 구원도 입김 센 사람의 의견을 따라가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둘째, 오늘 제가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부분이 구원에 관한 문제인데요, 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문제와 직결이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죄가 해결되는 그곳에 구원이 임한다는 생각을 저는 평소에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에서는 죄라고 하는 부분을 어떤 정치, 경제, 사회, 권력, 구조, 등의 죄를 이야기하지 결코, 개인의 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개인의 거듭남의 문제는 해방신학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는 문제가 의문으로 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개인의 해방의 관해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즉, 개인의 거듭남, 회심에 관한 문제에 대한 바른 제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세째는, 구원의 보편성 문제인데요. 우리가 흔히 던지는 질문입니다. 해방신학에서 항상 가난한 자들, 억압받는 자들의 구원을 이야기하는데, 그리스도적 구원이 마치 가난한 사람들의 독점물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결 론
이제 결론적으로 몇가지의 이해들을 서술하면서 본 발제를 통한 교훈이나 신학적인 교훈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남미의 교회는 현실에 대한 진지함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교회내적인 문제만으로 신학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교회외부로 그들의 시선을 돌렸고, 우리가 소홀히 하는, 쉽게 흘려버리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겁니다. 우리들 자신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설교나 행사 대부분이 교회 내부의 일에 치중한 것이 대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진지하게 사회로,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자들에게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 어떠한 교회의 체제가 현실문제의 도전들을 감당할 수 가 없을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끊임없이 그 시대정신에 따른 개혁전통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셋째, 남미의 교회가 대담하게 정치적 영역에서 가지지 못한 자를 도와주는 결단을 위해 행동하며, 경제적인 영역에서도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우리 역시 우리의 할 일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한국교회 자체내의 신학, 신앙하는 풍토가 세상과의 구별을 하기 원하는 이원론적인 구조를 좋아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넷째, 남미의 교회는 연대라고 하는 것을 중요시하는데, 이는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연대입니다. 이것은 계급, 교단, 국가적인 차원을 넘어서 의식의 확산인 겁니다. 우리 나라안에서도 이런 연대문제가 원활하게 해결이 되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학교 내에도 북한 어린이 돕기 기도회, 식권 사기 운동이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전체 학우의 참여를 얻어 내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연대(솔리데리티)가 약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나오는 말입니다. 서구의 전통적인 신학이 제기하고 있는 신학적 방법론으로는 오늘날 소위 제3세계의 교회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자기가 속한 나름대로의 자리에서 사회, 역사적 상황을 중심으로 한 창조적인 신학적 사고와 방법론을 새롭게 형성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해방신학을 이해할 때, 상당한 교훈과 도전을 주는 학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본 발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