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미술교육체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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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의 의미를 형상들에 부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회화의 권위는 특정한 방법으로 재현된 특정한 주제 속에서 발견된다고 보았다. 또한 회화는 목적의식을 가져야 하며 영원한 진리를 나타내야 한다. 왕의 자비, 용기, 영광스러움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해야 한다. 이러한 이상, 목적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도 역시 역사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페리비앙은 역사화는 한 가지 주제를 나타내야 하며, 다양한 인간군상이 나타나는 가운데 이들 군상들의 모든 행동은 중심 주제와 일치되는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역사화들을 살펴보면 여러 사람이 등장하고 있으나, 이들은 모두 한 가지 주제를 향해 치밀하게 구성, 배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현의 범주에 있어서는 각각의 성질과 기분의 차이에 따른 여러 가지 얼굴의 형과 표정의 밀접한 묘사와 분석이 중요했다. 비율(proportion)은 고대의 규준에 지배되었다. 16세기에 이르기까지 고대는 회화에 있어서 대부분의 자세와 몸짓의 절대적 모범이었다. 이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윤곽(선 또는 소묘)이 색채보다 우위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 점은 앞에서 언급한 '고대파와 근대파'의 논쟁에서 고대파-푸생파로 불리기도 한다-의 주된 주장이기도 했다. 실례로 르 브랭은 소묘를 "우리들이 규정한 양극과 나침반"이라고 부르며 중요시 여겼다.
특징적인 아카데미의 제도인 일정기간 매번 행해졌던 수상식에서도 아카데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학생을 위한 가장 큰 상은 프리 드 로마(prix de Rome)였는데 이것은 로마의 아카데미 드 프랑스(Academy of France)에서 4년간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이었다. 이 장학금은 왕실에서 수여했는데 이 장학금을 받은 학생은 국왕을 위해 종사해야 하며, 또한 로마의 가장 귀중한 미술품을 모두 모사해 파리에 보냄으로써, 콜베르의 중상주의 정책에 일조 해야 했다. 이 프리 드 로마 제도에서도 역시 이탈리아의 미술적 성공을 모방하고 싶어하고 고대의 전통이 많이 남아있던 이탈리아 미술을 프랑스에 도입하고 싶어했던 아카데미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6. 아카데미와 절대왕정의 연관성
지금까지 아카데미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그리고 그렇게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아카데미가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아카데미가 설립됨으로써 왕권의 제약 밖에 놓여 있었던 길드에 대항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졌고, 길드 또한 왕권의 세력 범위 안에 포함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중세의 길드는 자신들만의 특권을 보장해주는 규약을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부와 특권을 누려왔지만, 절대왕정의 등장은 이러한 특권을 왕권에 종속되는 것으로 만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길드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도구로 아카데미가 이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아카데미와 절대왕정의 연관성은 아카데미의 교육내용에서도 드러난다. 아카데미는 인체데생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독점하고 왕실이 요구하는 기준에 따라 교육을 실시했다. 이들 기준은 회화의 주제, 회화 구도의 선택, 인물 묘사방법, 빛의 방향 등까지 규제했고, 회화의 등급을 매김으로써 회화를 왕의 권위에 봉사하는 도구가 되게 했다. 물론 아카데미 설립 당시에 르 브랭이 생각했던 것은 예술활동의 완전한 자유였지만, 결과적으로 아카데미 화가들은 그들이 애초에 생각했던 것만큼의 자유를 얻지는 못했다. 루이14세가 아카데미를 적극 지원했던 것도 루이14세가 예술을 애호했다기보다는 외부 과시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미술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지만, 사실 1662년에 이미 왕립과학아카데미가 설립되었고 1671년에는 건축아카데미도 설립되었다. 그렇지만 왕은 과학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대신 왕은 건물을 짓고 꾸미는데 관심이 많아 전문가들의 조언이 필요했고 그 조언을 구하기 위해 자문위를 구성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카데미가 확립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아카데미는 절대왕정과 긴밀한 연관속에서 탄생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7.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절대왕정의 성립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있어서 아카데미라는 미술교육체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성립되고 진행되어 왔으며 몰락했는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아카데미가 엄격히 요구하는 미술에 대한 관념은 미술사 내적인 문제의식에서만 도출된 것은 분명히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카데미는 급격히 강화된 왕권의 필요에 의해서 조직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절대왕정이 몰락한 이후로도 반세기 이상 아카데미는 과거의 규범들을 답습하고 있었으나 이미 아카데미의 명분은 절대왕정의 붕괴와 함께 사실상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렇듯 아카데미는 절대왕정의 필요에 의해서 조직되고 진행되어 왔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든지 아카데미는 절대왕정의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봉사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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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16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6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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