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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겪지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은 없다. 우리가 목회를 준비하고 순례하는 동안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난다. 가난한 이웃, 병든 이웃, 고아, 과부, 창녀, 농약과 중금속에 중독되어 버린 어머니와 같은 땅, 예수의 허리에 난 창자욱처럼 뻥 뚫려버린 사랑하는 연인과 같은 하늘도 만난다. 그리고 허리잘린 조국의 산하와 상처입은 자신도 만나게 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순종할 줄도 모르는 연약하고 상처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이웃들을 위로하며 치유하라고 말씀하신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여니 고난과 한(恨)맺힌 소리로 아우성친다. "이 땅에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상처조차 치유하지 못하는데....."하며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구르며 엉엉 울고만 싶은게 우리모두의 심정이리라.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은 더하신다는 믿음으로, 약한 자를 들어쓰신다는 약속으로 우리의 속사람과 겉사람이 더욱 건강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본 발제를 마치고자 한다. 한 학기동안 애쓰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자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나음을 받게 하십시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야고보서 5:14-16)
# 예 화 자 료
<예 화 1> "가면을 벗고 싶다."
나는 매 주일마다 가면을 쓰고 신도들에게 나아가는 생활이 너무나 지겹습니다. 목사 특유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평생 판에 박힌 억지 웃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어쩌다 가면을 벗고 살아 있는 참 모습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신선한 세계가 거기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계속해서 이 가면을 고집한다면 아마도 이 소외감과 고독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태도는 목사들의 모임 속에도 나타납니다. 내가 아주 전형적인 친교 모임에 갔을 때 서로 친형제처럼 미소를 주고받고 악수를 나누며 등을 쳐주고 있었지만 내가 문득 보니 김 목사는 당회와의 갈등으로 곧 사임을 종용받게 될 것이고, 이 목사는 바람을 피우고 있었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모두 다 눈치를 채고 수근거릴 정도였습니다. 이 밖에도 여러 문제들을 다 안고 있었지만 그것을 정직하게 나누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 화 2> "내가 과연 하나님꼐 부름 받았을까?"
나의 소명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부름받은 사람에게는 어떤 약속을 주고 계시는가, 나에게 오는 고난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어디에 쓰시려고 부르셨나 등 나에게는 소명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하려고 생각하면 하나님꼐 충성치 못한 사람이라는 죄책감이 듭니다.
<예 화 3> "폭발 할지도 모른다."
목사들에게 있어서 분노의 표현은 제약받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분노의 느낌은 비 크리스찬적인 견해를 갖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분노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지 표현되어진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이거나 의식적으로 설교 시간이나 교회의 리더쉽을 발휘하는 때에 나도 모르게 괴팍한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종종 있으며 가정에서 더욱 권위적인 모습으로 자식들을 대하게 된다. 또한 병원에 가보니 나에게 위궤양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는 표현 할 수 없는 이 분노 때문에 우울증에도 시달리고 있으며 언제 신도들에게 내 감정이 폭발해서 물의를 일으킬지 걱정이다.
<예 화 4> "직업에 대한 불안."
나는 교회의 일들을 하루 7,8시간 혹은 그 이상으로 해내고 있다. 이제는 교회도 자리를 잡아가고 재정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부자들의 세력이 내가 부임한 이후로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자신들만의 모임을 결속하고 어떤 행동을 취하려고 하고 있다. 나의 목회 방침에 그들은 정면으로 도전해 올 셈인가 보다.
나는 이제껏 목사를 내보내는 일에 목청을 높이는 일부 교인들을 교회가 내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일이 없다.
이 같은 일방적인 술래잡기는 인심공격까지 이어질 것이다. 과연 나는 그들과 화합하기 위해 나의 목회 철학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대변인이 되어야 하는가!
<예 화 5> "재정적인 압박"
교회의 사례비로 아이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다. 계속해서 지원해 주던 큰 교회의 선교비도 IMF이후에 현저히 줄어들은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교회 제정을 볼 떠 턱없이 부족한 사례비를 올려 주기 충분하다. 그러나 현재의 재정부에서는 뻔히 어려운 것을 알면서도 어떠한 반응도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이 문제를 이야기해서는 않되지 않는가?
여기 한 우물가에 여인이 있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뜨거운 햇살속에서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우물에 드리우고 거친 새월의 한을 담아 올리는 여인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나설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자신의 살고 싶어 하는 현재의 갈등속에 소리질러도 들어줄 이 없고 감히 소리도 못내어 끝없이 곱씹어야 했던 차라리 거리낌없는 뻔뻔함이라도 그에게 있다면 족할 것을 그에게는 자신의 방탕한 육체를 가릴만한 오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항상 남자들의 것이요.
그의 노동 또한 노동이 아니고 삶도 그의 것이 아닙니다.
그 여인은 결코 그 자신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던중 그는 한 낯선 사내를 만납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궂은 살이 박힌 투박한 손.
여인은 한 모금의 물을 청하는 그에게 또 한번의 수작거리인줄 알아 모질게도 자기를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몇마디의 대화로 질끈 동여맨 자신의 옷거름을 훌훌 벗어버리고 마을로 달려갑니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여니 고난과 한(恨)맺힌 소리로 아우성친다. "이 땅에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상처조차 치유하지 못하는데....."하며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구르며 엉엉 울고만 싶은게 우리모두의 심정이리라.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은 더하신다는 믿음으로, 약한 자를 들어쓰신다는 약속으로 우리의 속사람과 겉사람이 더욱 건강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본 발제를 마치고자 한다. 한 학기동안 애쓰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자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나음을 받게 하십시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야고보서 5:14-16)
# 예 화 자 료
<예 화 1> "가면을 벗고 싶다."
나는 매 주일마다 가면을 쓰고 신도들에게 나아가는 생활이 너무나 지겹습니다. 목사 특유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평생 판에 박힌 억지 웃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어쩌다 가면을 벗고 살아 있는 참 모습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신선한 세계가 거기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계속해서 이 가면을 고집한다면 아마도 이 소외감과 고독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태도는 목사들의 모임 속에도 나타납니다. 내가 아주 전형적인 친교 모임에 갔을 때 서로 친형제처럼 미소를 주고받고 악수를 나누며 등을 쳐주고 있었지만 내가 문득 보니 김 목사는 당회와의 갈등으로 곧 사임을 종용받게 될 것이고, 이 목사는 바람을 피우고 있었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모두 다 눈치를 채고 수근거릴 정도였습니다. 이 밖에도 여러 문제들을 다 안고 있었지만 그것을 정직하게 나누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 화 2> "내가 과연 하나님꼐 부름 받았을까?"
나의 소명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부름받은 사람에게는 어떤 약속을 주고 계시는가, 나에게 오는 고난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어디에 쓰시려고 부르셨나 등 나에게는 소명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하려고 생각하면 하나님꼐 충성치 못한 사람이라는 죄책감이 듭니다.
<예 화 3> "폭발 할지도 모른다."
목사들에게 있어서 분노의 표현은 제약받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분노의 느낌은 비 크리스찬적인 견해를 갖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분노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지 표현되어진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이거나 의식적으로 설교 시간이나 교회의 리더쉽을 발휘하는 때에 나도 모르게 괴팍한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종종 있으며 가정에서 더욱 권위적인 모습으로 자식들을 대하게 된다. 또한 병원에 가보니 나에게 위궤양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는 표현 할 수 없는 이 분노 때문에 우울증에도 시달리고 있으며 언제 신도들에게 내 감정이 폭발해서 물의를 일으킬지 걱정이다.
<예 화 4> "직업에 대한 불안."
나는 교회의 일들을 하루 7,8시간 혹은 그 이상으로 해내고 있다. 이제는 교회도 자리를 잡아가고 재정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부자들의 세력이 내가 부임한 이후로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자신들만의 모임을 결속하고 어떤 행동을 취하려고 하고 있다. 나의 목회 방침에 그들은 정면으로 도전해 올 셈인가 보다.
나는 이제껏 목사를 내보내는 일에 목청을 높이는 일부 교인들을 교회가 내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일이 없다.
이 같은 일방적인 술래잡기는 인심공격까지 이어질 것이다. 과연 나는 그들과 화합하기 위해 나의 목회 철학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대변인이 되어야 하는가!
<예 화 5> "재정적인 압박"
교회의 사례비로 아이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다. 계속해서 지원해 주던 큰 교회의 선교비도 IMF이후에 현저히 줄어들은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교회 제정을 볼 떠 턱없이 부족한 사례비를 올려 주기 충분하다. 그러나 현재의 재정부에서는 뻔히 어려운 것을 알면서도 어떠한 반응도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이 문제를 이야기해서는 않되지 않는가?
여기 한 우물가에 여인이 있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뜨거운 햇살속에서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우물에 드리우고 거친 새월의 한을 담아 올리는 여인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나설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자신의 살고 싶어 하는 현재의 갈등속에 소리질러도 들어줄 이 없고 감히 소리도 못내어 끝없이 곱씹어야 했던 차라리 거리낌없는 뻔뻔함이라도 그에게 있다면 족할 것을 그에게는 자신의 방탕한 육체를 가릴만한 오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항상 남자들의 것이요.
그의 노동 또한 노동이 아니고 삶도 그의 것이 아닙니다.
그 여인은 결코 그 자신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던중 그는 한 낯선 사내를 만납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궂은 살이 박힌 투박한 손.
여인은 한 모금의 물을 청하는 그에게 또 한번의 수작거리인줄 알아 모질게도 자기를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몇마디의 대화로 질끈 동여맨 자신의 옷거름을 훌훌 벗어버리고 마을로 달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