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글
2. 빼앗긴 꿈
3. 인도네시아는 왜 동티모르를 침략했는가
4. 공모하는 국제사회
5. 움직이는 세계의 양심들
6. 동티모르에 주민투표를
2. 빼앗긴 꿈
3. 인도네시아는 왜 동티모르를 침략했는가
4. 공모하는 국제사회
5. 움직이는 세계의 양심들
6. 동티모르에 주민투표를
본문내용
개발원조의 공여를 그 나라의 인권상황과 결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1990년대에 들어 확산되어 있었다. 일본의 ODA 공여를 위한 '4원칙', EC각료회의의 '선언', 영연방 수뇌회의에서의 캐나다 수상선언, EC의 '인권, 민주주의 개발에 관한 선언' 등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인권과 원조를 연계시키는 방침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산타쿠르즈 사건은 이들 원칙을 시험하는 첫 케이스가 되었다..
캐나다, 네덜란드 덴마크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신규 원조를 동결했다. 그러나 미국, 일본, 호주는 사건에 대한 유감 표명을 하면서도 실질적 제재를 회피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우선 사건의 진상규명과 인권상황 감시를 위한 유엔조사단을 파견하라는 요구가 빗발친 데 대하여, 인도네시아는 국가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유엔기관 등의 조사가 들어오기 전에 보고서를 냈으며, 이에 기초하여 '수하르토 대통령의 조치'가 발표되었다. 이 조치는 군의 반성, 현지 사령부 지도자의 경질, '소란자' 엄벌, 동티모르 상황 수습, 동티모르 개발, 문관관료 강화, 현지 주민의 복지 등등이 그 내용이었으며. 이를 가지고 국제기구에 의한 조사를 저지하려 했다. 많은 나라들이 이 '조치'를 평가하고 무기나 원조의 판매를 계속했다. 유엔사무총장 특사가 동티모르 방문을 하루만 허락받았지만 인도네시아는 이 특사가 작성한 보고서의 공표에 계속 반대하고 있다.
다음으로 구체적인 제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친 데 대하여 '대통령 조치'에 의해 두 명의 군사령관을 경질했다.
마지막으로 사건을 계기로 다시 자결권 문제가 떠오르고 동티모르인이나 연대그룹에서 새롭게 평화교섭이나 주민투표의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대하여 인도네시아는 철저히 이를 무시했으며, 미, 일, 호주 3국도 이번 학살사건을 '불행한 사고'로 하고 동티모르 자결권문제는 유엔사무총장의 중개에 내맡겨 국제화시키지 않을 방침을 정했다.
동티모르 문제는 오랫동안 인도네시아에서 금기의 문제였다. 그러나 최근 인도네시아의 인권 NGO들은 조금씩 동티모르인 정치범이나 동티모르에서의 언론 탄압문제를 말하기 시작했다. 산타쿠르즈 사건이 엄청난 국제적 반향을 일으키자 인도네시아의 매체들은 사건을 대대적으로 다루었고 NGO들도 과감하게 움직였다.
사건 당일인 11월 I2일 변호사단체인 법률부조협회(LBH)는 사망자 수를 115명이라 발표하고 국군총사령관에게 진상규명과 관계자 처벌을 요구했다. LBH는 그 후 데모와 관련해서 기소된 동티모르인들에 대한 재판지원을 시작한다. 인도네시아 인권옹호프론트(INFIGHT), 인권옹호협회, 정의를 거는 연맹 등 3개 인권단체가 국회를 방문, 야당의원들과 회견했고 인도네시아 사제회의는 두 번의 성명을 냈다. 이들 단체는 사건조사차 딜리로 가려 했으나 저지당했을 뿐 아니라 활동 정지 등 탄압을 받았다.
11월 19일 사건에 항의하는 동티모르인 학생 l백 명이 자카르타에서 유엔사무소나 일본, 미국대사관에서 데모를 하다가 체포되었고 이 체포에 항의하여 일어난 학생데모 과정에서 8명이 체포되었다. 11월 21일 전자바학생회 연락회 총회는 동티모르 문제에 대하여 8개항으로 된 획기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조사위원회의 해산과 국제적 조사단을 받아들일 것
·19일에 체포된 70명의 동티모르인 학생을 석방할 것
·이 학생들의 동티모르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체포·고문을 중지할 것
·국제사회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무기수출 금지나 경제제재로써 압력을 가해줄 것
·동티모르에서 인도네시아군의 철수와 동티모르인의 자결권 행사
세계의 동티모르 연대그룹들이 1992년 2월에 제네바에서 국제회의를 열었을 때 처음으로 인도네시아 인권단체가 참가했으며, 3월에 열린 "제7회 INGI: 인도네시아 국제NGO포럼"은 처음으로 동티모르 문제를 최종 선언에 삽입했다. 산타쿠르즈사건으로부터 일주일 후, 국제동티모르연맹은 유엔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동티모르 민족해방군 사령관 쟈나나 구스마오의 비디오 메시지를 공개했다.
유엔사무총장은 동티모르 문제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 동티모르인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떠한 제안이든 그것이 동티모르인 대표를 포함하지 않은 교섭에서 나온 것이라면 국제적으로 승인되는 공정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문제해결을 목적으로 하는 어떠한 교섭에도 무조건 참가할 용의가 있다.
유엔에 의한 화평을 구하는 쟈나나의 메시지는 산타쿠르즈 사건을 계기로 문제의 근본적 해결로 연결시키기 위한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1992년 여름의 차별방지·소수자보호소위원회에는 NGO의 로비활동이 집중되었다. 소위는 인권침해의 계속이나 사건당일 군의 행동에 관한 조사의 불철저를 지적하면서 인도네시아정부에 대해 사망자, 유해, 실종자의 정보 제공을 요구하고 인권단체의 입국허가를 요청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 결의는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인상을 국제적으로 주는 것이었다.
6. 동티모르에 주민투표를
1992년 10월 미국의 양원협의회는 동티모르에서의 인권탄압에 항의하여 인도네시아에 대한 IMET(국제군사교육훈련 프로그램) 230만 달러의 공여를 끊을것을 결의했다. 침략 이후 인도네시아에 대한 구체적 제재가 내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시민과 의원들의 공동투쟁은 이제 곳곳에서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의 민주화운동도 어려움을 뚫고 꾸준히 성장해나갈 것이다. '원조'를 '인권'과 연계시키려는 대세는 계속될 것이다. 동티모르 주민들의 주민투표 실현이라는 목표를 향해 어렵지만 확실한 행진은 세계 곳곳에서 오늘도 계속된다.
우리는 한 번도 희망을 포기한 적은 없다. l982년부터 l988년 사이는 아주 암담한 기간이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중국 같은 나라의 지원을 잃었다. 외교전략도 쌍무 관계에서 게릴라식 외교로 전환하여 큰 싸움은 피하고 조금씩 이길 수 있는 작은 싸움을 해왔다. 이런 작은 전투에서 우리는 항상 이겨왔다. 이제는 큰 전쟁을 치를 만한 시기이다. 이를 위해 l0년 동안 준비해왔다. 승리에 대한 확신 없이 l0년이라는 세월을 준비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리 알카티리)
캐나다, 네덜란드 덴마크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신규 원조를 동결했다. 그러나 미국, 일본, 호주는 사건에 대한 유감 표명을 하면서도 실질적 제재를 회피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우선 사건의 진상규명과 인권상황 감시를 위한 유엔조사단을 파견하라는 요구가 빗발친 데 대하여, 인도네시아는 국가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유엔기관 등의 조사가 들어오기 전에 보고서를 냈으며, 이에 기초하여 '수하르토 대통령의 조치'가 발표되었다. 이 조치는 군의 반성, 현지 사령부 지도자의 경질, '소란자' 엄벌, 동티모르 상황 수습, 동티모르 개발, 문관관료 강화, 현지 주민의 복지 등등이 그 내용이었으며. 이를 가지고 국제기구에 의한 조사를 저지하려 했다. 많은 나라들이 이 '조치'를 평가하고 무기나 원조의 판매를 계속했다. 유엔사무총장 특사가 동티모르 방문을 하루만 허락받았지만 인도네시아는 이 특사가 작성한 보고서의 공표에 계속 반대하고 있다.
다음으로 구체적인 제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친 데 대하여 '대통령 조치'에 의해 두 명의 군사령관을 경질했다.
마지막으로 사건을 계기로 다시 자결권 문제가 떠오르고 동티모르인이나 연대그룹에서 새롭게 평화교섭이나 주민투표의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대하여 인도네시아는 철저히 이를 무시했으며, 미, 일, 호주 3국도 이번 학살사건을 '불행한 사고'로 하고 동티모르 자결권문제는 유엔사무총장의 중개에 내맡겨 국제화시키지 않을 방침을 정했다.
동티모르 문제는 오랫동안 인도네시아에서 금기의 문제였다. 그러나 최근 인도네시아의 인권 NGO들은 조금씩 동티모르인 정치범이나 동티모르에서의 언론 탄압문제를 말하기 시작했다. 산타쿠르즈 사건이 엄청난 국제적 반향을 일으키자 인도네시아의 매체들은 사건을 대대적으로 다루었고 NGO들도 과감하게 움직였다.
사건 당일인 11월 I2일 변호사단체인 법률부조협회(LBH)는 사망자 수를 115명이라 발표하고 국군총사령관에게 진상규명과 관계자 처벌을 요구했다. LBH는 그 후 데모와 관련해서 기소된 동티모르인들에 대한 재판지원을 시작한다. 인도네시아 인권옹호프론트(INFIGHT), 인권옹호협회, 정의를 거는 연맹 등 3개 인권단체가 국회를 방문, 야당의원들과 회견했고 인도네시아 사제회의는 두 번의 성명을 냈다. 이들 단체는 사건조사차 딜리로 가려 했으나 저지당했을 뿐 아니라 활동 정지 등 탄압을 받았다.
11월 19일 사건에 항의하는 동티모르인 학생 l백 명이 자카르타에서 유엔사무소나 일본, 미국대사관에서 데모를 하다가 체포되었고 이 체포에 항의하여 일어난 학생데모 과정에서 8명이 체포되었다. 11월 21일 전자바학생회 연락회 총회는 동티모르 문제에 대하여 8개항으로 된 획기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조사위원회의 해산과 국제적 조사단을 받아들일 것
·19일에 체포된 70명의 동티모르인 학생을 석방할 것
·이 학생들의 동티모르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체포·고문을 중지할 것
·국제사회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무기수출 금지나 경제제재로써 압력을 가해줄 것
·동티모르에서 인도네시아군의 철수와 동티모르인의 자결권 행사
세계의 동티모르 연대그룹들이 1992년 2월에 제네바에서 국제회의를 열었을 때 처음으로 인도네시아 인권단체가 참가했으며, 3월에 열린 "제7회 INGI: 인도네시아 국제NGO포럼"은 처음으로 동티모르 문제를 최종 선언에 삽입했다. 산타쿠르즈사건으로부터 일주일 후, 국제동티모르연맹은 유엔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동티모르 민족해방군 사령관 쟈나나 구스마오의 비디오 메시지를 공개했다.
유엔사무총장은 동티모르 문제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 동티모르인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떠한 제안이든 그것이 동티모르인 대표를 포함하지 않은 교섭에서 나온 것이라면 국제적으로 승인되는 공정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문제해결을 목적으로 하는 어떠한 교섭에도 무조건 참가할 용의가 있다.
유엔에 의한 화평을 구하는 쟈나나의 메시지는 산타쿠르즈 사건을 계기로 문제의 근본적 해결로 연결시키기 위한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1992년 여름의 차별방지·소수자보호소위원회에는 NGO의 로비활동이 집중되었다. 소위는 인권침해의 계속이나 사건당일 군의 행동에 관한 조사의 불철저를 지적하면서 인도네시아정부에 대해 사망자, 유해, 실종자의 정보 제공을 요구하고 인권단체의 입국허가를 요청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 결의는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인상을 국제적으로 주는 것이었다.
6. 동티모르에 주민투표를
1992년 10월 미국의 양원협의회는 동티모르에서의 인권탄압에 항의하여 인도네시아에 대한 IMET(국제군사교육훈련 프로그램) 230만 달러의 공여를 끊을것을 결의했다. 침략 이후 인도네시아에 대한 구체적 제재가 내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시민과 의원들의 공동투쟁은 이제 곳곳에서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의 민주화운동도 어려움을 뚫고 꾸준히 성장해나갈 것이다. '원조'를 '인권'과 연계시키려는 대세는 계속될 것이다. 동티모르 주민들의 주민투표 실현이라는 목표를 향해 어렵지만 확실한 행진은 세계 곳곳에서 오늘도 계속된다.
우리는 한 번도 희망을 포기한 적은 없다. l982년부터 l988년 사이는 아주 암담한 기간이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중국 같은 나라의 지원을 잃었다. 외교전략도 쌍무 관계에서 게릴라식 외교로 전환하여 큰 싸움은 피하고 조금씩 이길 수 있는 작은 싸움을 해왔다. 이런 작은 전투에서 우리는 항상 이겨왔다. 이제는 큰 전쟁을 치를 만한 시기이다. 이를 위해 l0년 동안 준비해왔다. 승리에 대한 확신 없이 l0년이라는 세월을 준비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리 알카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