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영국 내전과 영국 혁명
II. 의회의 기능과 영국 내전
III. 의회의 대표성과 사료의 대표성
II. 의회의 기능과 영국 내전
III. 의회의 대표성과 사료의 대표성
본문내용
구 결과의 보편성과 대표성이다.
현재까지 이루어진 case study의 결론을 보면, 영국 내에서 어떠한 지방도 영국 전체를 놓고 볼 때 "전형적"인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지방과 영국 내전에 관한 자세한 연구는 과거에 존재하였던 이론들의 오류를 매우 효과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즉, 과거에 통용되었던 일반적인 개념이 개체적인 사실에 의하여 그 일반성이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은 고도의 정치적인 세계에서 매일 매일 이루어지고 있었던 구체적인 사실을 연구하여 영국 내전에 관한 일반화 된 인식체계를 부정하였다. 구체적인 사실이 일반화 된 이론을 하나 하나 부정하고 들어올 때, 역사를 하나의 일반화 된 틀로서 인식해 보려는 역사가들의 돌파구는 어쩌면 추상화, 보편화를 가능하게 하는 형이상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후-수정주의자들이 바로 이런 입장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리적인 구분 대신에 사회 유대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community를, puritans를 문화적인 구분으로, 왕에 대한 헌정적인 불만을 왕을 '싫어했던 경향'으로 보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에 J. H. Hexter는 Chrisopher Hill이 영국 내전의 원인을 연쇄적인 구도에서 설명하고, 자신의 가정에 맞는 "원사료[만] 탐색"("source mining")하며, 자신의 가설에 적합한 사례를 억지로 한데 묶어 한 덩어리의 개념 혹은 개체를 만든다고("compulsive 'lumping'")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Hexter의 이와 같은 비판은 단지 Hill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비판은 영국 내전을 연구하는 모든 역사가, 나아가서는 모든 역사가에게 해당될 것이다. 장기적 시각으로 혹은 거시적으로 내전을 파악하는 것은 단기적인 시각 혹은 미시적인 연구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잃게 되며, 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부족한 사료를 연결할 이론적인 도구를 강조할 것인 가도 역사가에게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숙제일 것이다.
영국의 의회는 영국인의 실생활이라는 가장 하부 적인 구조와 영국 전체를 움직이는 가장 높이 있었던 최고 정치 행위를 연결했었던 거의 유일한 조직이었다. 또한 의회는 어떤 법이든지 만들 수 있어서 영국에 관계된 어떠한 주제에 관해서도 영국 내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기구였다. 따라서 의회가 영국 내전에서 차지하였던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게는 당시 사람들의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부터, 크게는 당시 영국을 움직였던 고도의 정치 행위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영국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좀 더 진실에 가깝게 연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영국 전반을 포함하는 모든 분야에서의 연구가 적절하게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소망 이상은 될 수 없다. 오히려 거꾸로 영국의 하부와 상부 구조를 연결했던 의회를 먼저, 좀 더 올바르게 연구하여, 당시 영국의 상,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생각할 때, 어쩌면 더 적절할지 모른다.
영국 내전을 전후한 영국 의회사는, 얼핏 보면 이미 연구될 대로 연구된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더 깊이 살펴보면, 이와는 반대이다. 의원의 신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출판되었지만 아직까지 이 자료들이 적절하게 분석되지 않았다. 의회에서 매일 매일 이루어졌던 업무는, 거대한 ideology연구에 연구자들의 관심을 빼앗겨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의회 내에서 이루어졌던 연설은 그 개념만 소개되었을 뿐, 수사학적이고 고도의 정치적인 의미는 아직 적절하게 파악되고 있지 않다. 또한 하원과 상원의 관계도 이제 겨우 연구가 시작되고 있으며, 하원, 상원, 그리고 왕과의 삼자 관계는 더욱 연구가 부실하다. 당시에 의원들이 어느 정도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는 가도 시대착오주의와 의도적이고 선별적인 자료 탐색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을 뿐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각 지역의 의원들이 의회 내,외에서 맺었던 유대 관계와 그들의 정치적 중요성도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영국 문서 보관소에 산재하는, 실로 개인의 능력으로서는 전반적인 연구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방대한, 의회가 개입된 국가 재정 및 금전에 관한 문서는 거의 연구가 되지 않고 있다.
최근의 의회와 영국 내전에 관한 연구는 혼돈을 거듭하고 있다. 휘그적인 해석을 주축으로 하였던 틀은 깨어졌고, marxist적인 해석은 휘그적인 해석보다 더 처절하게 붕괴되었다.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그 주장 자체는 설득력이 많아서, 휘그적인 해석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수는 있었지만, 과거에 휘그적인 해석이 갖고 있었던 틀과 같은 것을 아직까지는 대안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어쩌면 이런 틀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 자체가 올바른 생각이 아닐지 모른다. 후-수정주의자들은 수정주의자들의 구체적인 사실을 인정은 하면서도, 최근의 역사연구 방법론을 적용하여, 수정주의자들과는 정 반대의 휘그적인 입장으로 회귀하고 있다. 그러나 후-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관념화 및 형이상학적인 면에 논리의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역사의 한계를 넘는 어쩌면 논리의 체계를 초월하는 언어와 이데아의 세계에서만 그 빛을 발산할지 모른다.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끝나는 것은 역사가들의 논쟁에 '행복한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종말이 아무리 행복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인류의 '행복한 종말' 만큼이나 비극적인 것이다. 앞으로도 영국 내전에 관한 학자들의 논쟁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들은 휘그, 수정주의, 그리고 후-수정주의의 핵심적인 견해와 방법론을 담은 쳇바퀴를 타고, 다행스럽게도, 끝없는 논쟁을 계속할 것이다.
(위의 문헌은 김민제, <의회와 '영국 내전' (English Civil War) - 휘그, 수정주의, 후-수정주의 해석>, <<서양사론>> 42 (1994): 127-187에서 각주를 생략하고 체제를 변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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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이루어진 case study의 결론을 보면, 영국 내에서 어떠한 지방도 영국 전체를 놓고 볼 때 "전형적"인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지방과 영국 내전에 관한 자세한 연구는 과거에 존재하였던 이론들의 오류를 매우 효과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즉, 과거에 통용되었던 일반적인 개념이 개체적인 사실에 의하여 그 일반성이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은 고도의 정치적인 세계에서 매일 매일 이루어지고 있었던 구체적인 사실을 연구하여 영국 내전에 관한 일반화 된 인식체계를 부정하였다. 구체적인 사실이 일반화 된 이론을 하나 하나 부정하고 들어올 때, 역사를 하나의 일반화 된 틀로서 인식해 보려는 역사가들의 돌파구는 어쩌면 추상화, 보편화를 가능하게 하는 형이상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후-수정주의자들이 바로 이런 입장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리적인 구분 대신에 사회 유대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community를, puritans를 문화적인 구분으로, 왕에 대한 헌정적인 불만을 왕을 '싫어했던 경향'으로 보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에 J. H. Hexter는 Chrisopher Hill이 영국 내전의 원인을 연쇄적인 구도에서 설명하고, 자신의 가정에 맞는 "원사료[만] 탐색"("source mining")하며, 자신의 가설에 적합한 사례를 억지로 한데 묶어 한 덩어리의 개념 혹은 개체를 만든다고("compulsive 'lumping'")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Hexter의 이와 같은 비판은 단지 Hill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비판은 영국 내전을 연구하는 모든 역사가, 나아가서는 모든 역사가에게 해당될 것이다. 장기적 시각으로 혹은 거시적으로 내전을 파악하는 것은 단기적인 시각 혹은 미시적인 연구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잃게 되며, 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부족한 사료를 연결할 이론적인 도구를 강조할 것인 가도 역사가에게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숙제일 것이다.
영국의 의회는 영국인의 실생활이라는 가장 하부 적인 구조와 영국 전체를 움직이는 가장 높이 있었던 최고 정치 행위를 연결했었던 거의 유일한 조직이었다. 또한 의회는 어떤 법이든지 만들 수 있어서 영국에 관계된 어떠한 주제에 관해서도 영국 내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기구였다. 따라서 의회가 영국 내전에서 차지하였던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게는 당시 사람들의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부터, 크게는 당시 영국을 움직였던 고도의 정치 행위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영국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좀 더 진실에 가깝게 연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영국 전반을 포함하는 모든 분야에서의 연구가 적절하게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소망 이상은 될 수 없다. 오히려 거꾸로 영국의 하부와 상부 구조를 연결했던 의회를 먼저, 좀 더 올바르게 연구하여, 당시 영국의 상,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생각할 때, 어쩌면 더 적절할지 모른다.
영국 내전을 전후한 영국 의회사는, 얼핏 보면 이미 연구될 대로 연구된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더 깊이 살펴보면, 이와는 반대이다. 의원의 신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출판되었지만 아직까지 이 자료들이 적절하게 분석되지 않았다. 의회에서 매일 매일 이루어졌던 업무는, 거대한 ideology연구에 연구자들의 관심을 빼앗겨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의회 내에서 이루어졌던 연설은 그 개념만 소개되었을 뿐, 수사학적이고 고도의 정치적인 의미는 아직 적절하게 파악되고 있지 않다. 또한 하원과 상원의 관계도 이제 겨우 연구가 시작되고 있으며, 하원, 상원, 그리고 왕과의 삼자 관계는 더욱 연구가 부실하다. 당시에 의원들이 어느 정도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는 가도 시대착오주의와 의도적이고 선별적인 자료 탐색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을 뿐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각 지역의 의원들이 의회 내,외에서 맺었던 유대 관계와 그들의 정치적 중요성도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영국 문서 보관소에 산재하는, 실로 개인의 능력으로서는 전반적인 연구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방대한, 의회가 개입된 국가 재정 및 금전에 관한 문서는 거의 연구가 되지 않고 있다.
최근의 의회와 영국 내전에 관한 연구는 혼돈을 거듭하고 있다. 휘그적인 해석을 주축으로 하였던 틀은 깨어졌고, marxist적인 해석은 휘그적인 해석보다 더 처절하게 붕괴되었다.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그 주장 자체는 설득력이 많아서, 휘그적인 해석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수는 있었지만, 과거에 휘그적인 해석이 갖고 있었던 틀과 같은 것을 아직까지는 대안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어쩌면 이런 틀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 자체가 올바른 생각이 아닐지 모른다. 후-수정주의자들은 수정주의자들의 구체적인 사실을 인정은 하면서도, 최근의 역사연구 방법론을 적용하여, 수정주의자들과는 정 반대의 휘그적인 입장으로 회귀하고 있다. 그러나 후-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관념화 및 형이상학적인 면에 논리의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역사의 한계를 넘는 어쩌면 논리의 체계를 초월하는 언어와 이데아의 세계에서만 그 빛을 발산할지 모른다.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끝나는 것은 역사가들의 논쟁에 '행복한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종말이 아무리 행복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인류의 '행복한 종말' 만큼이나 비극적인 것이다. 앞으로도 영국 내전에 관한 학자들의 논쟁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들은 휘그, 수정주의, 그리고 후-수정주의의 핵심적인 견해와 방법론을 담은 쳇바퀴를 타고, 다행스럽게도, 끝없는 논쟁을 계속할 것이다.
(위의 문헌은 김민제, <의회와 '영국 내전' (English Civil War) - 휘그, 수정주의, 후-수정주의 해석>, <<서양사론>> 42 (1994): 127-187에서 각주를 생략하고 체제를 변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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