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머리말
II. Science (Wissenschaft) - 과학 (科學)이냐 학문 (學問)이냐?
III. 서구의 근대 과학이란 무엇인가?
IV. 한국의 학문이란 무엇인가?
V. 과학과 학문의 결합 - 서구 근대 과학의 한국적 수용과 변형
VI. 맺음말 - 근대적 과학을 위하여
II. Science (Wissenschaft) - 과학 (科學)이냐 학문 (學問)이냐?
III. 서구의 근대 과학이란 무엇인가?
IV. 한국의 학문이란 무엇인가?
V. 과학과 학문의 결합 - 서구 근대 과학의 한국적 수용과 변형
VI. 맺음말 - 근대적 과학을 위하여
본문내용
교육 방식이 한국에 수용되면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생기게 되고, 이에 따라서 전통적으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존재하던 해석학적 순환은 어렵게 된다. 결국 학생이 교사에게 묻고 배우는 교육방식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게 되며, 특히 서구의 교육처럼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견해를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은 아직도 서구의 근대교육을 가능케 하는 정도로 충분한 사회적 거리와 인격적 분화가 수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서구에서도 사실 장기간에 걸친 사회분화를 그 역사적 전제조건으로 한다.
) 사회분화에 대해서는 ber sociale Differenzierung. Sociologische und psychologische Untersuchungen (1890), in: Georg Simmel Gesamtausgabe (게오르그 짐멜 전집) 2, Frankfurt am Main, 109-295 쪽을 참조할 것.
전근대 시대보다도 더욱 더 일방적인 전달식-주입식 교육이 그 결과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동양과 한국의 교육은 전통적으로 교양인, 문화인 또는 보편인의 양성과 함양을 추구한 사실을 논의한 바가 있다. 이에 비해서 서구의 근대 과학은 전문인을 추구한다. 과학자의 인격이란 전문적인 연구와 강의의 능력에 바탕을 두는 것이며, 과학자란 바로 분화된 개별과학 내에서 전문적인 연구와 강의를 직업으로 추구하는 전문가이다. 그런데 한국은 서구에서와 같은 분과 과학적인 연구와 강의를 수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상응하는 전문가 정신이나 행위유형 또는 생활양식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여기에다가 전통적인 교양인, 문화인 또는 보편인의 가치와 규범을 결합시키게 되었다. 아니 역설적으로, 근대적인 분과과학의 체제 내에서 전통적인 유교 지식인의 이념을 구현하려고 한 것이 한국의 서구 근대과학의 수용과 그 변형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문적인 연구와 강의를 과학자의 인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박학다식하며 고매한 덕성과 예의를 갖추었는가에 따라서 학자의 인격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서 마치 유교 지식인들이 성인의 고전을 많이 읽고 많이 아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듯이, 자신의 전공과목에 대한 서적을 많이 읽고 이에 대한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지식인들과 학자들이 많다. 아직도 '나는 누구의 저술을 몇 번이나 읽었다'하고 자랑하는 지식인들이 있다. 아직도 박사학위를 스스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 이제 스스로 연구하고 강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적-제도적 전제조건이 아니라 마치 그 분야의 기존 지식에 대한 해박한 지식의 증명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박사학위 소지자를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로 생각하고, 그가 조금만 잘못해도 - 물론 일반적인 표상에 비추어 볼 때에 - '배운 사람이 그럴 수 가 있는가?'하고 비난하곤 한다.
끝으로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있어서도, 한국의 서구 근대 과학의 수용은 전통과 현대의 독특한 결합을 보여준다. 서구의 근대 과학이 근본적으로 과학과 정치의 분리를,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론과 실천의 분리된 결합관계 또는 거리를 두는 참여 (Engagement durch Distanz)를 내세운다. 다시 말하자면, 이론적 작업은 일단 정치적 목적에 관계없이 과학적 가치와 규범 그리고 절차에 따라서 이루진 후에 정치적 영역의 실천적 필요성에 따라서 실제적 삶에 응용되는 것이 서구의 일반적인 표상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도 이론과 실천이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전통적인 학문관이 지배적인 것 같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관념은 실증적이고 경험과학적인 연구의 결과로 그 이전보다 대량의 지식과 정보가 가능해짐으로써 더욱 더 강화된 듯 하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의 지식인들은 축적된 지식과 정보가 직접적으로 실제적인 목적에 전환되지 않기 때문에 전근대 시대의 지식인들보다 더 많이 이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근대와는 달리 과학과 정치가 분화된 -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회의 전 영역이 근본적으로 분화된 - 현대에서는 여러 삶의 영역 사이의 직접적인 결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요즈음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신지식인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후반기에 미증유의 경제위기를 맞이한 한국은 - 한국 사람들은 이를 1950-3년의 한국전쟁 이후의 최대 국가위기라고 보곤 한다 - 지식인들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경제적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지식의 창출을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한국은 현대사회에서는 경제와 과학의 직접적인 결합이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만일 과학이 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이는 많은 경우에 여러 단계의 우회로를 거치는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과학을 경제에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고, 전자로 하여금 후자에 직접적으로 봉사하도록 강요한다면, 다양한 삶의 영역과 공간이 독립성과 자율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며, 이는 결국 현대가 필요로 하는 사회적-문화적 기초를 뿌리째 흔들어 버리게 될 것이다.
VI. 맺음말 - 근대적 과학을 위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서구의 근대 과학이 어떻게 한국의 전통적인 학문의 틀 위에서 수용되고 변형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것의 수용과 변형 과정은 한국의 문화적 근대화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문화적 과정은 한국이 비약적인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적 합리성과 서구의 근대적 합리성의 결합으로 형성된 근대적 비합리성은 이제 한국의 발전과 성장을 가로막고 있으며, 또한 과학 또는 학문 자체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작금의 한국의 과학과 교육이 직면한 상황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체제만이 아니라 정신 역시 근대화되는 것이다. 근대와 현대의 선험적 전제조건 (transzendentale Voraussetzung; Max Weber)은 바로 근대와 현대에 있다. 그리고 전통을 추구하는 경우에도 어디까지나 근대와 현대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 사회분화에 대해서는 ber sociale Differenzierung. Sociologische und psychologische Untersuchungen (1890), in: Georg Simmel Gesamtausgabe (게오르그 짐멜 전집) 2, Frankfurt am Main, 109-295 쪽을 참조할 것.
전근대 시대보다도 더욱 더 일방적인 전달식-주입식 교육이 그 결과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동양과 한국의 교육은 전통적으로 교양인, 문화인 또는 보편인의 양성과 함양을 추구한 사실을 논의한 바가 있다. 이에 비해서 서구의 근대 과학은 전문인을 추구한다. 과학자의 인격이란 전문적인 연구와 강의의 능력에 바탕을 두는 것이며, 과학자란 바로 분화된 개별과학 내에서 전문적인 연구와 강의를 직업으로 추구하는 전문가이다. 그런데 한국은 서구에서와 같은 분과 과학적인 연구와 강의를 수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상응하는 전문가 정신이나 행위유형 또는 생활양식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여기에다가 전통적인 교양인, 문화인 또는 보편인의 가치와 규범을 결합시키게 되었다. 아니 역설적으로, 근대적인 분과과학의 체제 내에서 전통적인 유교 지식인의 이념을 구현하려고 한 것이 한국의 서구 근대과학의 수용과 그 변형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문적인 연구와 강의를 과학자의 인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박학다식하며 고매한 덕성과 예의를 갖추었는가에 따라서 학자의 인격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서 마치 유교 지식인들이 성인의 고전을 많이 읽고 많이 아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듯이, 자신의 전공과목에 대한 서적을 많이 읽고 이에 대한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지식인들과 학자들이 많다. 아직도 '나는 누구의 저술을 몇 번이나 읽었다'하고 자랑하는 지식인들이 있다. 아직도 박사학위를 스스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 이제 스스로 연구하고 강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적-제도적 전제조건이 아니라 마치 그 분야의 기존 지식에 대한 해박한 지식의 증명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박사학위 소지자를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로 생각하고, 그가 조금만 잘못해도 - 물론 일반적인 표상에 비추어 볼 때에 - '배운 사람이 그럴 수 가 있는가?'하고 비난하곤 한다.
끝으로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있어서도, 한국의 서구 근대 과학의 수용은 전통과 현대의 독특한 결합을 보여준다. 서구의 근대 과학이 근본적으로 과학과 정치의 분리를,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론과 실천의 분리된 결합관계 또는 거리를 두는 참여 (Engagement durch Distanz)를 내세운다. 다시 말하자면, 이론적 작업은 일단 정치적 목적에 관계없이 과학적 가치와 규범 그리고 절차에 따라서 이루진 후에 정치적 영역의 실천적 필요성에 따라서 실제적 삶에 응용되는 것이 서구의 일반적인 표상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도 이론과 실천이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전통적인 학문관이 지배적인 것 같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관념은 실증적이고 경험과학적인 연구의 결과로 그 이전보다 대량의 지식과 정보가 가능해짐으로써 더욱 더 강화된 듯 하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의 지식인들은 축적된 지식과 정보가 직접적으로 실제적인 목적에 전환되지 않기 때문에 전근대 시대의 지식인들보다 더 많이 이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근대와는 달리 과학과 정치가 분화된 -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회의 전 영역이 근본적으로 분화된 - 현대에서는 여러 삶의 영역 사이의 직접적인 결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요즈음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신지식인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후반기에 미증유의 경제위기를 맞이한 한국은 - 한국 사람들은 이를 1950-3년의 한국전쟁 이후의 최대 국가위기라고 보곤 한다 - 지식인들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경제적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지식의 창출을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한국은 현대사회에서는 경제와 과학의 직접적인 결합이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만일 과학이 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이는 많은 경우에 여러 단계의 우회로를 거치는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과학을 경제에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고, 전자로 하여금 후자에 직접적으로 봉사하도록 강요한다면, 다양한 삶의 영역과 공간이 독립성과 자율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며, 이는 결국 현대가 필요로 하는 사회적-문화적 기초를 뿌리째 흔들어 버리게 될 것이다.
VI. 맺음말 - 근대적 과학을 위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서구의 근대 과학이 어떻게 한국의 전통적인 학문의 틀 위에서 수용되고 변형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것의 수용과 변형 과정은 한국의 문화적 근대화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문화적 과정은 한국이 비약적인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적 합리성과 서구의 근대적 합리성의 결합으로 형성된 근대적 비합리성은 이제 한국의 발전과 성장을 가로막고 있으며, 또한 과학 또는 학문 자체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작금의 한국의 과학과 교육이 직면한 상황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체제만이 아니라 정신 역시 근대화되는 것이다. 근대와 현대의 선험적 전제조건 (transzendentale Voraussetzung; Max Weber)은 바로 근대와 현대에 있다. 그리고 전통을 추구하는 경우에도 어디까지나 근대와 현대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