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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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정치의 개관

2. 행정

3. 사회·경제

4. 문화

5. 미술

6. 한국과의 관계

본문내용

관에 치우쳐서 신경지를 개척하지는 못하였는데, 화암(華,:新羅山人)·김동심(金冬心)만은 확실히 별격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청나라 초의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은 명왕조 판화의 흐름을 받은 금릉(金陵:南京)의 출판이지만, 금릉판화가 청대에 와서 쑤저우[蘇州]로 진출, 훌륭한 판화의 성행을 보게 되자 서양화의 원근법과 음영법(陰影法)을 받아들여 서민예술로서 뿌리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청왕조 공예의 대표는 도자기인데, 강희·옹정·건륭의 3대, 백 수십 년간에 징더전요[景德鎭窯]를 비롯하여 여러 곳의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도자기는 일품으로서 서유럽 여러 나라에 수출되었다. 칠공예(漆工藝)로는 건륭·가경(嘉慶) 연간에 궁정 용구로서 대소 갖가지의 제품이 만들어졌으나 명왕조 작풍(作風) 답습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기교를 부리고 의장(意匠)도 부질없이 번거로운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인간의 재능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섬세한 기법으로 정성들여 만든 칠공예품은 유럽 각국으로 수출되어 진중히 간직되었다. 그 밖에 중국 특산의 옥(玉)이나 비취(翡翠)를 가공, 옥기와 세공물을 만들었으며, 이와 관련 있는 것으로는 유리를 재료로 한 화병·공기·향로 등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건륭유리[乾隆硝子]’라 불리는 작품은 특히 유명하다.
<한국과의 관계>
한반도 북변에 할거하면서 17세기 초 중국 본토에 진출하여 통일왕조 청(淸)을 세운 여진은 조선 개국 초부터 북방개척에 힘을 기울였던 조선 정부의 가장 부심(腐心)거리로 등장하여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회유책을 써서 이들의 조공(朝貢)·귀화(歸化)를 권장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들이 노략질하는 동기의 하나가 생활 필수품의 결핍에 있음을 감안하여 함경도의 경성(鏡城)과 경원(慶源)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그들이 필요한 물건을 바꾸어 가도록 하였으며, 여진 추장들에게는 중추원지사(中樞院知事)를 비롯하여 호군(護軍)·사직(司直)·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명예 군직(軍職)을 주기도 하였다. 특히 청을 일으킨 건주여진은 1467년(세조 13) 남이(南怡) 등이 이끄는 조선군의 정벌을 당해, 추장 이만주(李滿住) 부자가 살해되어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 조선의 힘이 만주에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조선 선조가 의주(義州)에 피란하였을 때 건주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그 속셈을 알 수 없어 거절하였다. 그 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 태종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켜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36년(인조 14)에는 다시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종래의 수직 또는 수평 관계는 전도(顚倒)되어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선은 약 250년간 해마다 정기·부정기적으로 사절과 조공품을 보내어 사대(事大)의 예를 하였으나, 조선은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고 대체로 독자성을 유지하여 청나라의 종주국 행세는 극히 형식적인 것이었으며, 양국 관계도 별 어려움이 없이 무난하게 보냈다.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으로 조선에 앞서 개국한 청나라는 조선이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으로 쇄국의 둑이 무너지자, 82년(고종 19) 조선과 미국의 통상을 권유하고 조미·조독 수호통상조약을 돕는다는 구실로 마건충(馬建忠)·정여창(丁汝昌)이 군함을 끌고 들어와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함 3척에 4,500명 병력을 끌고 와서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였고,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독일인 묄렌도르프 및 마건충 등을 조선 정부의 정치·외교·세관 등의 고문으로 앉게 함으로써 청나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청·일 양군이 충돌해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자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주조선 총리로 임명해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간섭하는 등 종주국 행세를 하였다. 청나라는 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군대를 파견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협력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일본과 충돌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는데 이 전쟁에서 패함에 따라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조선은 96년 250년간 사용하여 온 청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건양(建陽)’을 연호로 사용함으로써 최초로 자체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97년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청나라와 대등한 황제국임을 선포하였다.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더욱 일어 당시의 학자는 물론 일반 민중에까지 뿌리깊이 스며들었는데, 학자로서는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 그 극에 달하였다. 이는 중국 본토의 ‘중화(中華)’만이 문화·가치이고 일본·베트남·거란·몽골·흉노 및 여진[淸]은 야만의 ‘이(夷)’이니 비문화·비가치(非價値)라는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의 소산이어서, 중국 변두리의 오랑캐 여진족이 형성한 청나라의 문화는 배척되고, 주자학(朱子學)만이 국가사회 유지의 규범으로 정치와 결합되어 숭상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이 형식적·관념적·배타적인 면만이 강화되어 학문으로서의 자유로운 비판을 거부하자, 그 반동으로 실학(實學)이 일어났고, 영조·정조 때에는 청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박학(樸學)이 일어나서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청나라를 경유하여 서학(西學:유럽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이 유입되어 과학기술과 종교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전성기를 맞이한 강희∼건륭 연간(1662~1795)에 부연사(赴燕使) 일행에 끼어 청나라의 물질문명을 보고 돌아온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은 청나라의 문화를 들여와 문화를 개발하고 산업을 일으키자는 ‘북학(北學)’운동을 벌였다. 이와 같이 청나라의 근대문화는 조선의 학자들을 자극하여 그 고증학적 방법과 과학사상을 바탕으로, 역사학·지리학·언어학·금석학(金石學) 및 천문학·지도제작 등에 많은 역작이 나왔고, 이와 같은 학문의 방법은 백과사전파에도 영향을 끼쳐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가 편찬될 정도로 근대문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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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08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1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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