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근대 음악 문화적 입장에서 본 한국의 위치
2. 근대 음악 문화적 입장에서 본 한국의 기독교
3. 역사적 개관
1) 공인 찬송가가 나오기 이전 시대(1885-1892)
2) 찬송가 한국화의 기반을 닦는 시대(1892-1931)
3) 찬송가 한국화의 퇴보 시대(1931-1967)
4) 찬송가 한국화의 도약 시대(1967-1994)
4. 앞으로 해야 할 일
1) 비 서양 문화화론(非西洋文化化論)
2)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공존(共存)을 위한 노력
5. 맺는 말
2. 근대 음악 문화적 입장에서 본 한국의 기독교
3. 역사적 개관
1) 공인 찬송가가 나오기 이전 시대(1885-1892)
2) 찬송가 한국화의 기반을 닦는 시대(1892-1931)
3) 찬송가 한국화의 퇴보 시대(1931-1967)
4) 찬송가 한국화의 도약 시대(1967-1994)
4. 앞으로 해야 할 일
1) 비 서양 문화화론(非西洋文化化論)
2)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공존(共存)을 위한 노력
5. 맺는 말
본문내용
가 공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둘의 공존(共存)을 거부하는 사
람들은 한국 음악이나 악기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으려 할 때 환영하지 못하고
대단히 경계하며 무슨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우려를 표명한다. 한국 음악과
악기는 아직도 제 나라 민족 교회에 이물질이요 이방인인 셈이다.
교회 내의 서양 음악 절대자들은 한국 음악의 공존(共存) 문제가 곧 서양
음악의 기득권 침해 문제로 연결시킨다. 이것은 마치 흑인과의 공존 문제가
백인들의 기득권 침해 문제로 인식되어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근까지의
정치 현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가 내세우는 공존 문제를 지배
자들도 같이 공존의 문제로 이해할 때 거기에 평화가 있고, 둘 다 살아 남는
길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 교회가 서양 음악과 더불어 한국 음악을 共存
的 차원에서 수용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한국 교회 음
악 문화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으며 서양 음악에 대한 주체적 자기 수용이 이
루어지게 된다. 이미 자기 음악 문화에 대한 기반이 튼튼한 서양 교회들은 이
러한 외래 문화의 주체적 자기 수용에 별 어려움이 없다. 1990년에 개편된 미
국 찬송가 346장에는 우리 민요 '아리랑'의 곡조가 들어 있으며, 이제 동서독
통일을 기념하여 나오는 독일 통일찬송가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여러
문화권의 찬송가들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우선적 과제는
이러한 서양 교회의 외래문화 수용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전
단계인 자기 문화 기반 다지기에 힘써야 한다. 자기의 것이 없이 타인의 것
을 받아들일 때 '주체적 수용'대신 '문화적 事大'만이 남게 된다. '아리랑'이
한국 교회에서는 배척을 받고 서양 교회에서는 환영을 받는 현상은 바람직하
지 못한 것이고 한국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우리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문
제다. 아리랑을 속된 음악이라 하여 배척하는 한국 교회가 그보다 더 속된 음
악이었던 서양의 민요들을 가사만 바꾸어 은혜스럽다고 부르는 현실은 심히
유감스럽다. 아리랑을 찬송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현행 한국 찬송가 중에
우리가 찬송가로 인정할 수 없는 곡이 수십 곡에 이른다는 말이다. 내가 말하
는 바는 당장 아리랑을 찬송가 곡조로 부르자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아리랑도
못 부르면서 어떻게 남의 나라 민요나 국가(國歌)들은 비판 없이 예배 시간에
부르고 있느냐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문화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 행하는
'문화적 事大' 현상인 것이다. 한국 찬송과 서양 찬송이 어우러지며, 가야금
과 오르간이 共存하는 한국 교회 예배를 기대해 보면서, 우리는 서양 것과 한
국 것을 공존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겠다. 공존시키되 지금까지 기독교의
안방을 차지해 왔던 서양 찬송의 자리에 우리 국산 찬송을 앉히자는 말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교회 음악의 전통을 만들어 갈 수 있으며 세계에 자랑할
만한 기독교 음악 문화를 정립해 나갈 수 있다.
5. 맺는 말
우리가 한국식으로 찬송가를 만드는 작업이나 서양 사람들이 서양식으로
찬송을 만들거나, 또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기식 대로 만드는 작업은 모두
하나의 복음에 대한 각기 다른 문화의 응답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가
알고 있는 문화적 방식대로 응답한다고 해서 복음이 변질되는 일은 없다. 오히
려 우리 정서를 듬뿍 나타내 줄 수 있는 박자와 가락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
리에게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반주 악기도 이해의 폭을 넓히고 공감대 형
성을 위해서는 기존의 피아노나 오르간을 그대로 사용하여야 하겠지만, 이와
더불어 가야금이나 장고 등의 우리 나라 악기도 예배 악기로 받아들여야 하겠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 안에서 아직도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이 공존하
지 못하는 이유는 한국 교회가 19세기 말의 문화적 상황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문화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가 그대로 있
으며 전통음악이나 악기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비 신앙적인 일로 우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안에서는 아직도 '국악'을 기생음악, 술집음악, 유흥
음악 정도로 생각하여 천시하고 비웃는 경향이 있다. 교회가 이렇게 오랜세월
동안 전통음악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과 배타적 태도로 일관해 오고 있는 동안
교회 밖에서는 전통음악이 민족의 음악으로 새롭게 태어나 성장하고 있다. 우
리의 것을 사랑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겨 간직하고 보존, 발전시키려는 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고 있다. 섹스물이나 폭력물이 아닌 순
수한 판소리음악을 내용으로하는 영화 '서편제'의 흥행 성공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그 뿐아니라 우리민족의 위대함과 뛰어남을 한 눈에 보여주었던
고분벽화전시회인 '아! 고구려'가 예상 밖의 큰호응을 얻은 것과 민족의 영웅적
스토리를 담은 소설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사실, 최근 불교나 동양사상을
풀이한 서적들의 인기등은 모두가 우리 국민들의 의식속에서 우리의 전통문화
와 역사를 보는 시각이 크게 변화되고 있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교회는 토끼
처럼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우리사회는 거북이처럼 천천히 민족문화의 진정한
가치가 숨겨진 그 결승점에 서서히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이 사회를
비교해 볼때 교회는 사막속의 오아시스가 아니라 전통문화적 관점에서는 오히
려 오아시스속의 사막처럼 고립되어가고있는 느낌이다. 최근들어 기독교인 수
가 급격히 감소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것인가? 이것은 민족의 정서와
유리된채 서양문화만을 감싸고도는 기독교가 더이상 이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귀중한 교훈이다. 종교란 사회와 유리되어 존재할 수
없고 더구나 기독교는 사회안에서 언제나 제 몫을 담당해야 생존할 수 있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전통문화에 대한 이러한 교회밖의 인식 변화에 대
해 더이상 무감각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이제라도 무관심의 잠에서 깨어나 전
통음악을 민족의 음악으로, 나아가서 교회의 음악으로 수용하므로 사회로부터
의 문화적 고립을 면해야 할 것이다.
람들은 한국 음악이나 악기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으려 할 때 환영하지 못하고
대단히 경계하며 무슨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우려를 표명한다. 한국 음악과
악기는 아직도 제 나라 민족 교회에 이물질이요 이방인인 셈이다.
교회 내의 서양 음악 절대자들은 한국 음악의 공존(共存) 문제가 곧 서양
음악의 기득권 침해 문제로 연결시킨다. 이것은 마치 흑인과의 공존 문제가
백인들의 기득권 침해 문제로 인식되어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근까지의
정치 현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가 내세우는 공존 문제를 지배
자들도 같이 공존의 문제로 이해할 때 거기에 평화가 있고, 둘 다 살아 남는
길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 교회가 서양 음악과 더불어 한국 음악을 共存
的 차원에서 수용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한국 교회 음
악 문화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으며 서양 음악에 대한 주체적 자기 수용이 이
루어지게 된다. 이미 자기 음악 문화에 대한 기반이 튼튼한 서양 교회들은 이
러한 외래 문화의 주체적 자기 수용에 별 어려움이 없다. 1990년에 개편된 미
국 찬송가 346장에는 우리 민요 '아리랑'의 곡조가 들어 있으며, 이제 동서독
통일을 기념하여 나오는 독일 통일찬송가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여러
문화권의 찬송가들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우선적 과제는
이러한 서양 교회의 외래문화 수용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전
단계인 자기 문화 기반 다지기에 힘써야 한다. 자기의 것이 없이 타인의 것
을 받아들일 때 '주체적 수용'대신 '문화적 事大'만이 남게 된다. '아리랑'이
한국 교회에서는 배척을 받고 서양 교회에서는 환영을 받는 현상은 바람직하
지 못한 것이고 한국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우리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문
제다. 아리랑을 속된 음악이라 하여 배척하는 한국 교회가 그보다 더 속된 음
악이었던 서양의 민요들을 가사만 바꾸어 은혜스럽다고 부르는 현실은 심히
유감스럽다. 아리랑을 찬송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현행 한국 찬송가 중에
우리가 찬송가로 인정할 수 없는 곡이 수십 곡에 이른다는 말이다. 내가 말하
는 바는 당장 아리랑을 찬송가 곡조로 부르자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아리랑도
못 부르면서 어떻게 남의 나라 민요나 국가(國歌)들은 비판 없이 예배 시간에
부르고 있느냐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문화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 행하는
'문화적 事大' 현상인 것이다. 한국 찬송과 서양 찬송이 어우러지며, 가야금
과 오르간이 共存하는 한국 교회 예배를 기대해 보면서, 우리는 서양 것과 한
국 것을 공존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겠다. 공존시키되 지금까지 기독교의
안방을 차지해 왔던 서양 찬송의 자리에 우리 국산 찬송을 앉히자는 말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교회 음악의 전통을 만들어 갈 수 있으며 세계에 자랑할
만한 기독교 음악 문화를 정립해 나갈 수 있다.
5. 맺는 말
우리가 한국식으로 찬송가를 만드는 작업이나 서양 사람들이 서양식으로
찬송을 만들거나, 또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기식 대로 만드는 작업은 모두
하나의 복음에 대한 각기 다른 문화의 응답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가
알고 있는 문화적 방식대로 응답한다고 해서 복음이 변질되는 일은 없다. 오히
려 우리 정서를 듬뿍 나타내 줄 수 있는 박자와 가락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
리에게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반주 악기도 이해의 폭을 넓히고 공감대 형
성을 위해서는 기존의 피아노나 오르간을 그대로 사용하여야 하겠지만, 이와
더불어 가야금이나 장고 등의 우리 나라 악기도 예배 악기로 받아들여야 하겠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 안에서 아직도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이 공존하
지 못하는 이유는 한국 교회가 19세기 말의 문화적 상황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문화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가 그대로 있
으며 전통음악이나 악기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비 신앙적인 일로 우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안에서는 아직도 '국악'을 기생음악, 술집음악, 유흥
음악 정도로 생각하여 천시하고 비웃는 경향이 있다. 교회가 이렇게 오랜세월
동안 전통음악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과 배타적 태도로 일관해 오고 있는 동안
교회 밖에서는 전통음악이 민족의 음악으로 새롭게 태어나 성장하고 있다. 우
리의 것을 사랑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겨 간직하고 보존, 발전시키려는 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고 있다. 섹스물이나 폭력물이 아닌 순
수한 판소리음악을 내용으로하는 영화 '서편제'의 흥행 성공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그 뿐아니라 우리민족의 위대함과 뛰어남을 한 눈에 보여주었던
고분벽화전시회인 '아! 고구려'가 예상 밖의 큰호응을 얻은 것과 민족의 영웅적
스토리를 담은 소설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사실, 최근 불교나 동양사상을
풀이한 서적들의 인기등은 모두가 우리 국민들의 의식속에서 우리의 전통문화
와 역사를 보는 시각이 크게 변화되고 있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교회는 토끼
처럼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우리사회는 거북이처럼 천천히 민족문화의 진정한
가치가 숨겨진 그 결승점에 서서히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이 사회를
비교해 볼때 교회는 사막속의 오아시스가 아니라 전통문화적 관점에서는 오히
려 오아시스속의 사막처럼 고립되어가고있는 느낌이다. 최근들어 기독교인 수
가 급격히 감소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것인가? 이것은 민족의 정서와
유리된채 서양문화만을 감싸고도는 기독교가 더이상 이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귀중한 교훈이다. 종교란 사회와 유리되어 존재할 수
없고 더구나 기독교는 사회안에서 언제나 제 몫을 담당해야 생존할 수 있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전통문화에 대한 이러한 교회밖의 인식 변화에 대
해 더이상 무감각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이제라도 무관심의 잠에서 깨어나 전
통음악을 민족의 음악으로, 나아가서 교회의 음악으로 수용하므로 사회로부터
의 문화적 고립을 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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