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조선중기 사회배경
2.사림의 대두
3.사화의 종류및 설명
4.기타
2.사림의 대두
3.사화의 종류및 설명
4.기타
본문내용
사가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허목(許穆)·이현일(李玄逸)·이상정(李象靖)·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 등이 있다. 한편 영남학파에서는 광해군 12년(1620) 이황 문하의 양대고족(兩大高足)의 유성룡과 김성일을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추향(追享)함에 있어, 위차(位次)의 선후를 놓고 양현(兩賢)의 자손과 후학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 오랫동안 시비가 분분하였다. 이 사건을 병호시비(屛虎是非) 또는 애학시비(厓鶴是非)라고 한다. 이로 인한 두 계열의 대립은 이후로 해소되지 않고 계속되었는데, 유성룡 계열에서는 병산서원(屛山書院)을 근거지로 하고 김성일 계열에서는 호계서원을 독점하여 서로 대치함으로써, 마침내 병파와 호파로 갈리게 되있다. 병파나 호파 모두 이황의 주리설(主理說)에 귀일하고 있다.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병파의 학통은 정경세·유진(柳袗)·유원지(柳元之)·정종로(鄭宗魯) 등으로 이어지고, 김성일을 중심으로 한 호파는 장흥효(張興孝)·이현일·이재(李栽)·이상정·유도원(柳道源) 등을 거쳐 이진상·곽종석에게 이어진다. 한편 이황의 적전으로 조식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던 정구의 학통은 근기지방(近畿地方)으로 전해져 별파(別派)를 형성한다. 정구는 성리학과 예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역사·지리·의학 등 방대한 저술을 통해 <응용구시(應用救時)>의 측면에 크게 유의함으로써, 후일 허목을 통해 근기학파의 학자들에게 발전적으로 계승되어, 이익·안정복(安鼎福)·정약용(丁若鏞) 등의 경세치용(經世致用)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신분질서 안정
-서인 : 이이(이+기), 성혼, 김안국, 조광조 / 경험현실 - 주기론 / 기호학파
) 기호학파(畿湖學派)
이이(李珥)의 성리학설(性理學說)을 계승한 일단의 학자들에 대한 총칭. 이들이 주로 경기(京畿)와 호서(湖西)에 살았기 때문에, 이황(李滉) 및 그의 문인들과 구별하여 기호학파라 하였다. 기호학파를 성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는 이이·성혼·송익필(宋翼弼)을 들 수 있으며,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기호학파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이이의 문인인 김장생(金長生)을 거쳐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서는 연산(連山)·회덕(懷德) 등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기호학파는 정계·학계의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기호학파가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데는 무엇보다도 서울에 지역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이점이 많이 작용하였다. 숙종대에 이르면 기호학파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회덕을 중심으로 한 송시열 계열은 노론이 되고, 이산(泥山)을 중심으로 한 윤증(尹拯) 계열은 소론으로 분립되었다. 기호학파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등의 성리설과 예학 등에서 많은 학문적 성과를 남겼는데, 특히 송익필·김장생·송시열 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예학은 현종대에 남인과 맞서 극렬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일으키게 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 사회개혁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한국사28권」 「한국근대사」 「정암집」 「야은집」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비교2
훈구세력
사림세력
이념
역성혁명
불사이군
연원
조선건국, 세조의 찬위에 협조한 공신
*고려왕조에 절의를 지켰던 정몽주, 길재 계통
*길재의 학풍을 이은 영남 출신의 학파
기반
유향소를 통해 향촌에 영향력
등장시기
15세기
15세기말(성종)훈구 견제 목적으로 등용
주두시기
15세기
16세기말 이후(선조)
학풍
사장중시
경학중시
지방통치이념
중앙집권
향촌자치
정치이념
패도정치
왕도 정치
사상
실용적 학문(불교, 도교에 관대)
*성리학의 도리론과 명분론을 중시
*성리학 이외의 사상 배척(불교, 도교) 즉, 배타적
경제바탕
대토지 소유
중소 지주
※사화의 정리 비교
사화명
시기
사건의 개요
피해 세력
가해 세력
무오사화
연산군 4년(1498)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린 사건.
사림
훈구
갑자사화
연산군10년(1504)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의 폐출 사사 사건을 들추어서 자신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사림과 훈구의 제거.
훈구
사림
기묘사화
중종 14년(1519)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불만을 품은 훈구세력이 자신들의 공로를 깎으려는 의도를 계기로 조광조를 퇴각 시킴.
사림
훈구
을사사화
명종즉위년(1545)
중종의 배다른 두 아들의 왕위계승과 관련된 외척/ 또한 그들과 연결된 양반들의 파간의 대립
인종과 연결된 사림
명종과 연결된 훈구
/ 신분질서 안정
-서인 : 이이(이+기), 성혼, 김안국, 조광조 / 경험현실 - 주기론 / 기호학파
) 기호학파(畿湖學派)
이이(李珥)의 성리학설(性理學說)을 계승한 일단의 학자들에 대한 총칭. 이들이 주로 경기(京畿)와 호서(湖西)에 살았기 때문에, 이황(李滉) 및 그의 문인들과 구별하여 기호학파라 하였다. 기호학파를 성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는 이이·성혼·송익필(宋翼弼)을 들 수 있으며,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기호학파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이이의 문인인 김장생(金長生)을 거쳐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서는 연산(連山)·회덕(懷德) 등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기호학파는 정계·학계의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기호학파가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데는 무엇보다도 서울에 지역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이점이 많이 작용하였다. 숙종대에 이르면 기호학파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회덕을 중심으로 한 송시열 계열은 노론이 되고, 이산(泥山)을 중심으로 한 윤증(尹拯) 계열은 소론으로 분립되었다. 기호학파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등의 성리설과 예학 등에서 많은 학문적 성과를 남겼는데, 특히 송익필·김장생·송시열 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예학은 현종대에 남인과 맞서 극렬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일으키게 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 사회개혁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한국사28권」 「한국근대사」 「정암집」 「야은집」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비교2
훈구세력
사림세력
이념
역성혁명
불사이군
연원
조선건국, 세조의 찬위에 협조한 공신
*고려왕조에 절의를 지켰던 정몽주, 길재 계통
*길재의 학풍을 이은 영남 출신의 학파
기반
유향소를 통해 향촌에 영향력
등장시기
15세기
15세기말(성종)훈구 견제 목적으로 등용
주두시기
15세기
16세기말 이후(선조)
학풍
사장중시
경학중시
지방통치이념
중앙집권
향촌자치
정치이념
패도정치
왕도 정치
사상
실용적 학문(불교, 도교에 관대)
*성리학의 도리론과 명분론을 중시
*성리학 이외의 사상 배척(불교, 도교) 즉, 배타적
경제바탕
대토지 소유
중소 지주
※사화의 정리 비교
사화명
시기
사건의 개요
피해 세력
가해 세력
무오사화
연산군 4년(1498)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린 사건.
사림
훈구
갑자사화
연산군10년(1504)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의 폐출 사사 사건을 들추어서 자신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사림과 훈구의 제거.
훈구
사림
기묘사화
중종 14년(1519)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불만을 품은 훈구세력이 자신들의 공로를 깎으려는 의도를 계기로 조광조를 퇴각 시킴.
사림
훈구
을사사화
명종즉위년(1545)
중종의 배다른 두 아들의 왕위계승과 관련된 외척/ 또한 그들과 연결된 양반들의 파간의 대립
인종과 연결된 사림
명종과 연결된 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