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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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실크로드 이야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프롤로그

2. 상인이야기

3. 병사이야기

4. 목부이야기

5. 공주이야기

6. 승려이야기

7. 기생이야기

8. 비구니이야기

9. 과부이야기

10. 관리이야기

11. 화가이야기

본문내용

주는 지위로, 관료의 상위 9등급에 낄 만큼 높은 자리였다. 자이펑다는 새로운 지위와 함께‘은청광록대부국자좨주(銀靑光祿大夫國子祭酒)’라는 중국의 명예 칭호를 얻었지만 사실상 둔황은 이제 중국 영토가 아니었다. 둔황의 관리들에게는 여전히 그런 칭호가 부여되었지만, 그것은 과거의 유물에 불과했고, 중위안에서는 거의 무의미했을 것이다.
958년에 자이펑다는 75세였지만, 여전히 활기차게 일하고 있었다. 그는 제자에게 역법지식을 가르쳤고, 최근에는 공공사업부 부국장으로 승진했다. 이 부서는 현지의 공공건축사업, 도로와 관개수로의 유지보수, 도량형의 표준화 등을 책임지고 있었다. 몇 년 전에 그는 둔황 지역의 지리와 전설에 대한 저술을 마쳤기 때문에,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쓴 지리책과 함께 자신의 저서를 지침으로 이용했다.
자이펑다는 땅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있었고, 관리로서 받는 봉급과 지위에 따른 온갖 부수입에다 역법을 팔아서 얻는 수입도 꽤 짭짤했다. 점점 부자가 되자, 시주도 더 많이 할 수 있었고 새로 판 석굴에 벽화를 기부할 수도 있었다. 절도사를 비롯한 현지의 고위층 인사들도 모두 석굴에 기부금을 냈으니까, 자이펑다의 아낌없는 기부가 유력자들의 관심을 끌고 공동체에서 그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는‘사비어대(賜緋魚垈)’를 비롯하여 더 많은 칭호를 받았고,‘행사주경학박사(行沙州經學博士)’로 임명되었다. 역법을 만들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도 계속했다. 자이펑다는 960년에 송 왕조가 중국 제국을 다시 통일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조상들의 땅에는 끝내 가보지 못했다. 그가 얻은 칭호와 벼슬은 비록 중국 문관의 명칭을 사용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그를 중국이 아니라 실크로드의 시민으로 자리매김해 주었다.
『화가이야기』- 둔황 석굴을 장식하는 데 평생을 바친 화가 둥바오더(董保德)(965).
둔황 왕 차오위안중(曺元忠과) 그의 아내 자이씨(翟氏) 부인은 불교를 후원했다. 그들은 둔황의 여러 사찰에 수많은 물품을 봉납했고, 그 봉납품들은 모두 면밀히 기록되었다. 이 시기에 차오위안중이 봉납한 물품 중에는 중국의 공방에서 제조된 최고급 종이 한 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고급 종이는 도서관용 사경을 제작할 때 쓰였지만, 787년에 티베트군이 둔황을 점령하기 전에도 이곳에서는 좀처럼 구하기 힘든 귀중품이어서, 인쇄공과 사자생들은 대개 현지에서 제조된 훨씬 거친 종이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차오위안중은 휴대용 비단 그림과 석굴사원의 벽화 같은 그림도 주문했다. 많은 사람들이 왕을 본받았고, 둥바오더 같은 직업 화가들은 그 주문을 소화해 내느라 바빴다. 둥바오더는 몇 년 전에 화가로서 최고 지위에 올라, 이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가 가진 공식 직함은 특별히 높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역사회에서 그의 위상을 더욱 높여주었다. 그는‘태자빈객(太子賓客’과‘은청광록대부국자좨주(銀靑光祿大夫國子祭酒)’라는 명예 칭호도 갖고 있었다. 둥바오더는 주제넘게 참견하는 관료들과 게으른 직공들을 다루느라 일에 많은 지장을 받았을게 분명하지만, 그의 작품은 숙련된 솜씨를 보여주었고 비교적 후한 대가를 받은데다 주문량도 많았다.
둔황 안팎에는 15개 이상의 사찰과 승방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둔황에서 남동쪽으로 20km쯤 떨어져 있는 막고굴이라는 석굴사원이었다.
그곳에는 동쪽을 향한 벼랑이 작은 시내 위로 30m가 넘는 높이까지 불규칙하게 솟아 있고, 양쪽으로 1.5km쯤 뻗어 있다. 4세기부터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불교 승려와 신자들이 이 벼랑에도 여러 층으로 굴을 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참선수행을 하기 위한 암자로 굴을 팠지만, 나중에는 불공을 드리기 위한 장소로 굴을 파고 그곳을 장식하기 위해 정교한 벽화와 채색한 불상을 봉납했다. 둥바오더가 한 일은 대부분 기존의 석굴벽화를 복원하고 새로 판 석굴을 장식하는 일이었다.
3년 전인 962년, 둥바오더는 차오위안중의 후원으로 새로 조성된 석굴의 장식을 감독했다. 석굴을 파는 작업은 비숙련 일꾼이 맡았다. 벼랑 기슭에 비계를 세울 자리를 고른 다음, 계획된 석굴의 지붕 높이까지 비계를 세웠다. 벼랑을 이루고 있는 역암은 아주 물러서, 파기는 어렵지 않았다. 곡괭이와 삽만 있으면 충분히 팔 수 있었다. 인부들은 지붕 쪽부터 파기 시작하여 벼랑 안쪽과 아래쪽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바위부스러기는 바구니에 담아서 밖으로 운반했다. 굴을 파는 예비작업이 끝나자, 석공들이 천장과 벽을 끌로 마무리하고 바닥을 다져서 평평하고 매끄럽게 만들었다.
굴착잡업이 끝나자, 미장이들이 작업을 이어받아 짚과 진흙을 섞은 걸쭉한 회반죽을 돌벽에 바르고 그 위에 고운 점토액을 덧칠했다. 석굴의 벽과 천장을 장식하기 위해 부자들은 다양한 그림을 주문했다. 사방 벽의 주요 부분에는 정토 장면,『관음경』에 나오는 일화, 새리푸트라가 마귀들을 복종시킨 설화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불화가 그려질 예정이었다. 둥바오더는 젊은 도제 시절부터 그런 설화를 그리곤 했기 때문에 전반적인 구도는 잘 알고 있었지만, 작업은 대부분 젊고 미숙한 화가들이 맡게 될 테고, 그들에게는 스케치가 아주 중요했다. 그림 치수에 맞취 벽을 구획하는 작업이 끝나자, 둥바오더는 다른 화가들과 함께 동물 털로 만든 붓과 먹물로 첫 번째 도안의 윤곽을 스케치했다. 다음 단계는 세부를 묘사하고 채색하는 작업이었다. 둥바오더는 이미 화실에 있는 물감과 가루, 붓 같은 그림도구를 점검하고 필요한 재료를 새로 주문했다. 물감을 실제로 배합하는 작업은 젊은 화가들에게 맡겼다. 이런 작업이 끝나면 둥바오더는 전체구도를 실물 크기로 꼼꼼히 스케치한 뒤에야 비로소 그림을 그려 완성한다.
둥바오더와 같은 시대에 송나라 수도인 장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위대한 실크로드의 전성기를 망각하고, 자신들이 실크로드의 예술과 문화에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둔황을 기껏해야 변방의 침체된 시골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았다. 오늘날 둥바오더와 동시대의 실크로드 화가들은 이름은 잊혀진 지 오래지만 작품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수많은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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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2.11
  • 저작시기2004.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2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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