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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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1. 선사.삼국시대의 강화도
2. 고려시대의 강화도
3. 조선시대의 강화도
4. 근대의 강화도

[3] 결론

본문내용

시작이며 또한 걸쭉한 사건들에 언제나 휩싸인 고통의 땅이다. 강화도는 한강.예성강.임진강등 3대 하천 어귀에 있으면서 개경이나 한성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삼국 시대에는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과정으로 강화도에서 접전을 벌였고 고려 시대에는 동.서양에 할것없이 전란의 공포에 휩싸이게 한 몽고족을 피해 강화 천도를 단행하였던 곳으로 38년간 고려의 수도로써 기능을 하였고 이러한 역사적 가치는 현재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려 궁터가 작게나마 전한다. 또한 조선 시대의 강화도야말로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약탈당하고 불태워지고 하던 역사를 가졌다. 고려 몽고족에 이어 조선 시대에는 여진족(만주족)에 의한 병자호란을 시작으로 하여 프랑스인에 의한 병인양요, 미국인에 의한 신미양요 등이 있으며 최종적으로 일본의 배 운요호에 의하여 강화는 굴복하고 말 았다.
강화는 전시대에 걸친 수난에 대항하면서 상처투성이의 땅이 되었다. 한마디로 피에 물든 한국사의 축소판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난 속에서도 일궈지고 지켜진 문화-특히 팔만대장경,상감청자등은 저항속에서 일구고 승화시킨 것이어서 귀하고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조선 시대의 외규장각에 비치된 중요한 서적들이 이민족에 의해 약탈당하거나 방화로 인하여 소실되어 안타까울 뿐이다. 삼국 시대의 혈구라는 이름에서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처음 강화라 칭해진이후 고 려 충렬왕때 인주(현재 인천)에 병합되었다가 우왕3년(1377)에 강화부로 승격되었다. 1973년에 강화면이 읍으로 승격된 이후 하나의 군으로 자리매김 하였으나 바로 3년전 인 1995년 1월 강화는 다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어 고려 충렬왕때의 상황으로 돌아가 게 되었다.
강화는 선사시대의 고인돌 유적으로 시작하여 단군의 유적으로 전해진 삼랑성과 참성단등을 거쳐 고려 시대의 궁터, 조선 후기에 프랑스군인에 의해 전부 불에 탔으나 간신히 남아 증축한 용흥궁(철종의 집)이나 아니면 이민족의 침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초지진이나 광성보등을 살펴볼 수가 있다. 강화는 아픈 역사의 흔적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관광지가 되었지만, 강화는 여전히 강화이고 강인한 땅이다. 그것이 해쳐서는 안 될 강화의 정서이다.
☞참 고 문 헌☜
『경기남부와 남한강』, 한국문화유산답사회, 1996, 돌베개
『섬.섬.섬』, 최성민, 1996, 한겨레 신문사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웅진출판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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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4.02.15
  • 저작시기2004.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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