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조선시대의 장신구
3. 맺음말
2. 조선시대의 장신구
3. 맺음말
본문내용
, 천도, 연화, 석류 등의 식물형태, 호로병, 주머니, 종, 표주박, 북, 장구, 자물쇠, 안경집, 도끼, 방아다리, 방울, 투호, 장도, 석등, 벼루 등 생활주변에서 얻은 형태, 또 불수, 염주 등의 형태가 있다. 노리개의 형태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동식물이나 생활주변에서 얻은 소재를 택하였는데, 이들 형태의 공통된 주제는 수복강녕, 수부귀다남자, 오자등과라는 노리개에 새겨진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조 여인의 현세에 대한 희망과 기원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다남, 부귀, 복, 장수를 뜻하는 길상적인 문양을 보편적으로 사용하였다.
다남을 상징하는 노리개로는 고추, 가지, 도끼, 박쥐, 투호의 형상을 패물로 장식한 것들이 있다.
이와 같이 노리개는 하나의 호사스런 장식품이기 이전에 그 시대의 사회적 여건 속에서 안정된 조화를 이루며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여성의 지혜와 소망이 담겨 있다. 노리개는 혼인 때의 예물로 시부모로부터 물려받아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주는 가보였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위엄과 자존을 지키며, 집안을 두호하는 믿음으로 노리개를 소중히 간직하였다. 또한 노리개는 여러 가지 문양, 덕담의 문자를 새겨 장수와 복을 빌거나 액을 피하는 것으로 어떤 염원을 위해 차기도 했다.
단작노리개로 장식적인 면과 실용적인 면을 겸한 향갑, 향낭, 향집, 침낭, 장도가 있는데, 행낭, 행집, 비취발향, 줄향은 오늘날 향수를 대신하여 여인들이 항상 몸에 지녔던 것이고, 급할 때에는 구급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바늘을 보관하는 바늘집노리개나 노리개의 장도인 패도는 실용적인 것이었던 것이 장식화 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3) 장도
장도는 부녀의 절개를 상징하며 호신용으로도 사용하였으며, 또 여기에 은젓가락을 매달아 음식물의 독의 유무를 알아보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남녀가 장도를 차는 풍습은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한 뒤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에는 널리 일반화되었다. 1498년(연산군 4년)의 사치금제에서도 서인의 은장도 사용을 금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아서 1670년(현종11년)에는 유생 잡직 및 서인 남녀 중 은장도 차는 자를 논죄하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금과 은의 사용이 봉건사회에서 상하, 존비, 귀천을 가리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명나라에 금, 은의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한 조처로 취해진 것이었다. 여인들의 은장도는 부녀의 절개를 상징하며 호신용으로도 사용하였으며, 여기에 은젓가락을 매달아 음식물의 독의 유무를 알아보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남자의 경우 저고리 고름이나 허리띠에 장도끈목의 고리를 꿰어서 차고, 여자의 경우에는 치마 속 허리띠에 차거나 노리개의 주체로 삼기도 한다.
3.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장신구와 수식품은 전 시대와 다른 상항 여건 하에서 나름의 특징을 지니고 발달 하였으며 그 예술적 수준과 미적 감각, 실용적인 부분에서도 뛰어난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물들이 주로 여성들의 일개 장식품이라는 폄하된 가치와 무관심 속에서 재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당시 세공 기술자와 장인들의 기술적인 측면과 예술적인 측면을 좀 더 살피고 그들이 조선 시대 신분제 사회에서 중인이나 입공노비였다는 점에 유의 하여 그들의 손에서 가장 상류층에 걸 맞는 패물과 장신구들이 어떻게 만들어 졌으며, 그 기술의 세습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를 관심 있게 조명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유물들을 과거의 어쩔 수 없는 처치곤란의 쓰레기나 사극의 전유물, 혹은 의례용 장식품으로 전락 시키지 말고 좀 더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전승시키는 것은 남아 있는 우리의 숙제일 것이다.
다남을 상징하는 노리개로는 고추, 가지, 도끼, 박쥐, 투호의 형상을 패물로 장식한 것들이 있다.
이와 같이 노리개는 하나의 호사스런 장식품이기 이전에 그 시대의 사회적 여건 속에서 안정된 조화를 이루며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여성의 지혜와 소망이 담겨 있다. 노리개는 혼인 때의 예물로 시부모로부터 물려받아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주는 가보였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위엄과 자존을 지키며, 집안을 두호하는 믿음으로 노리개를 소중히 간직하였다. 또한 노리개는 여러 가지 문양, 덕담의 문자를 새겨 장수와 복을 빌거나 액을 피하는 것으로 어떤 염원을 위해 차기도 했다.
단작노리개로 장식적인 면과 실용적인 면을 겸한 향갑, 향낭, 향집, 침낭, 장도가 있는데, 행낭, 행집, 비취발향, 줄향은 오늘날 향수를 대신하여 여인들이 항상 몸에 지녔던 것이고, 급할 때에는 구급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바늘을 보관하는 바늘집노리개나 노리개의 장도인 패도는 실용적인 것이었던 것이 장식화 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3) 장도
장도는 부녀의 절개를 상징하며 호신용으로도 사용하였으며, 또 여기에 은젓가락을 매달아 음식물의 독의 유무를 알아보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남녀가 장도를 차는 풍습은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한 뒤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에는 널리 일반화되었다. 1498년(연산군 4년)의 사치금제에서도 서인의 은장도 사용을 금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아서 1670년(현종11년)에는 유생 잡직 및 서인 남녀 중 은장도 차는 자를 논죄하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금과 은의 사용이 봉건사회에서 상하, 존비, 귀천을 가리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명나라에 금, 은의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한 조처로 취해진 것이었다. 여인들의 은장도는 부녀의 절개를 상징하며 호신용으로도 사용하였으며, 여기에 은젓가락을 매달아 음식물의 독의 유무를 알아보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남자의 경우 저고리 고름이나 허리띠에 장도끈목의 고리를 꿰어서 차고, 여자의 경우에는 치마 속 허리띠에 차거나 노리개의 주체로 삼기도 한다.
3.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장신구와 수식품은 전 시대와 다른 상항 여건 하에서 나름의 특징을 지니고 발달 하였으며 그 예술적 수준과 미적 감각, 실용적인 부분에서도 뛰어난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물들이 주로 여성들의 일개 장식품이라는 폄하된 가치와 무관심 속에서 재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당시 세공 기술자와 장인들의 기술적인 측면과 예술적인 측면을 좀 더 살피고 그들이 조선 시대 신분제 사회에서 중인이나 입공노비였다는 점에 유의 하여 그들의 손에서 가장 상류층에 걸 맞는 패물과 장신구들이 어떻게 만들어 졌으며, 그 기술의 세습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를 관심 있게 조명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유물들을 과거의 어쩔 수 없는 처치곤란의 쓰레기나 사극의 전유물, 혹은 의례용 장식품으로 전락 시키지 말고 좀 더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전승시키는 것은 남아 있는 우리의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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