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들어가며
Ⅰ.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과 반제인식의 형성
1. 공산당 입당
2. 당재건 운동과 반제투쟁
Ⅱ. 반제인식의 변화
1. 임시민주정부 수립운동
2. 탄력적 반제인식
Ⅲ. 원칙론적 반제인식과 무장투쟁 노선
1. 미군정의 탄압강화와 무장투쟁의 전개
2. 분단국가의 성립과 한국전쟁
나오며
Ⅰ.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과 반제인식의 형성
1. 공산당 입당
2. 당재건 운동과 반제투쟁
Ⅱ. 반제인식의 변화
1. 임시민주정부 수립운동
2. 탄력적 반제인식
Ⅲ. 원칙론적 반제인식과 무장투쟁 노선
1. 미군정의 탄압강화와 무장투쟁의 전개
2. 분단국가의 성립과 한국전쟁
나오며
본문내용
었다. 콜코부부는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고도 사흘동안 남진을 하지 않았던 것은 남한과의 협상을 통해 통일을 이룩하려는 제한전의 의도가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홍익표,「박헌영의 반제노선 전개과정 연구」,고려대학교 대학원,1990 에서 재인용
이 당시 박헌영은 미제국주의자에 의해 남한이 식민지화되어 있다고 규정하고 남한의 인민들이 미제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착취되고 있다고 여러 군데서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무장투쟁의 역할을 강조하고는 있으나 당시는 남북노동당 연합 중앙위원회 휘하의 서울지도부에 의해 지도되던 유격투쟁이 9월 공세이후 남한군경의 진압작전 등으로 1949년의 동계 토벌작전이후는 그 역량이 크게 약화된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미군이 철수에도 불구하고 전면적인 전쟁이 발발할 시 미국의 재개입 가능성을 박헌영이 알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면 기존의 한국전쟁의 발발원인에서 박헌영의 역할을 강조하는 주장들은 설득력이 많이 감소한다. 박헌영은 제국주의의 본질을 이전부터의 투쟁과정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세력이 갖고 있는 강력한 무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그가 전면적인 남침 무력전쟁을 주장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나오며
이상에서 살펴본 결과 '실패했던 혁명'의 지도자로서 박헌영을 단죄론적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당시의 객관적 상황을 소홀히 다루는 결과론적 해석임을 알 수 있었다. 아울러서 미국이라는 압도적 규정성이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박헌영이 가졌던 인식과 노선의 내용은 각각의 단계에서 당연히 취했어야 할 전술적 대응으로서의 부분적인 오류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정당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고준석
고준석은 조선해방 직후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박헌영의 지도 아래 실질적인 당중앙조사부였던 조선산업노동조사소를 설립하고 서기장으로 일했는데, 1946년 9월부터의 남조선 3당합동을 계기로 하여 발생한 조선공산당 내의 주류파(박헌영 일파)와 반주류파(대회파)사이의 분파투쟁에 휩쓸려 '대회파'입장에서 박헌영에게 반대하게 된 인물이다.
은 박헌영에 대해 기술함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럼에도 박헌영의 사상과 그의 행적에 대해서 저자의 비판적인(곱지않은) 시각이 내재되어 있음은 감추어지지 않는다. 그 구체적인 내용 중 몇몇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분단된 지역에 대조적인 두 개의 전위당이 출현함으로써 남북 공산주의자의 대립이 공공연히 나타나게 되었다. … 그런데 박헌영은 남한의 3당 합당을 계기로 한 분파투쟁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정적'을 만들고 말았다. 이것은 뒷날 북한에서 김일성일파와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또 하나 결정적인 오류는 남한운동의 지도에 극좌모험주의를 사용하여, 수많은 전위부대와 인민을 희생시킨 일이다.…(p127)
②…모든 투쟁이 그의 지시대로 진행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그가 극좌모험주의 전술을 이용한 것은 사실이다. 극좌 모험주의적 전술에 의한 지도가 없었다면 인민의 희생은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박헌영은 10월 인민항쟁의 피맺힌 투쟁이 한창일 때인 10월 중순에 안전지대인 북한으로 도피했다. 공산당의 최고지도자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다.…(p166)
③ …박헌영 일파는 남한에서의 빨치산 투쟁의 전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이것은 대량의 조직원의 희생을 무시한 데다가, 자신들이 지도하는 빨치산 투쟁을 과대하게 발표해 북한에서의 불안정한 지위를 회복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p170)
④…박헌영은 뛰어난 공산주의자였지만 기구한 운명의 혁명가였다. 그는 남조선노동당 시절에 수많은 투쟁을 조직했지만, 그것이 극좌모험주의에 의한 것이었던 점, 또 대남공작을 이해 수많은 당원을 남파하여 희생시켰던 점, 역사적인 파벌의식이 강했던 점 등이 그 자신을 몰락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p222)
⑤ 그러나 박헌영은 우수한 공산주의자이고 그 투쟁경력도 훌륭했으나 파벌투쟁 때문에 코민테른으로부터 공산당의 승인이 취소된 조선의 역사적인 파벌의 우두머리였고… 이에 비해 김일성은 …(p229) 등이다.
그러나 저자 또한 박헌영을 반혁명분자였던가 반민족파괴분자였던가. 하는 이런 주장들에 대해서는 모두 부정하면서, '한국혁명사에서 최대의 비극은 국내파 공산주의 세력의 궤멸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일제하부터 현재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한국공산당주의 운동사나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연구할 때 많은 비판적 관점과 방법론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한정권에 의해 주어진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거기에 모든 준거점을 맞추어 다른 인물들이나 노선, 사물이나 사태를 규정하고 평가하는 것은 그리 옳은, 객관적인 역사연구방법이 아니다. 특히 해방 직후의 그 거대한 탈식민해방의 움직임과 자주독립국가 수립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가장 많은 힘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자주독립국가 수립으로 이끌어가지 못한 박헌영과 남로당에 대해 엄정한 객관의 자로써 비판을 가해야 한다는 점은 재론을 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박헌영-남로당 유일죄악론 또는 간첩으로까지 비화되는 것은 아마도 올바른 태도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역사문제연구소 현대사분과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었나」,역사비평(통권 15호), 1991
참고문헌
1. 박종성 저『박헌영론-한 조선혁명가의 좌절과 꿈』,인간사랑, 1992
2. 박갑동 저 『박헌영』,인간, 1983
논문·기사
1.홍익표,「박헌영의 반제노선 전개과정 연구」,고려대학교 대학원,1990
2.역사문제연구소 현대사분과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었나」,역사비평(통권 15호), 1991
3. 정병준 「박헌영·남로당노선 무엇이 문제인가」,역사비평, 1989
4. 임경석 「박헌영과 김단야」,역사비평, 2000
5. 이지훈「박헌영 사건으로 죄없이 숙청된 사람없다」,말(통권 90호), 1993
6. 김민희 「박헌영-김진계의 증언」,말(통권 101호), 1994
7. 양성철「조선공산당·남로당의 정치노선의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연세대대학원, 1993
이 당시 박헌영은 미제국주의자에 의해 남한이 식민지화되어 있다고 규정하고 남한의 인민들이 미제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착취되고 있다고 여러 군데서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무장투쟁의 역할을 강조하고는 있으나 당시는 남북노동당 연합 중앙위원회 휘하의 서울지도부에 의해 지도되던 유격투쟁이 9월 공세이후 남한군경의 진압작전 등으로 1949년의 동계 토벌작전이후는 그 역량이 크게 약화된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미군이 철수에도 불구하고 전면적인 전쟁이 발발할 시 미국의 재개입 가능성을 박헌영이 알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면 기존의 한국전쟁의 발발원인에서 박헌영의 역할을 강조하는 주장들은 설득력이 많이 감소한다. 박헌영은 제국주의의 본질을 이전부터의 투쟁과정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세력이 갖고 있는 강력한 무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그가 전면적인 남침 무력전쟁을 주장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나오며
이상에서 살펴본 결과 '실패했던 혁명'의 지도자로서 박헌영을 단죄론적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당시의 객관적 상황을 소홀히 다루는 결과론적 해석임을 알 수 있었다. 아울러서 미국이라는 압도적 규정성이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박헌영이 가졌던 인식과 노선의 내용은 각각의 단계에서 당연히 취했어야 할 전술적 대응으로서의 부분적인 오류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정당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고준석
고준석은 조선해방 직후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박헌영의 지도 아래 실질적인 당중앙조사부였던 조선산업노동조사소를 설립하고 서기장으로 일했는데, 1946년 9월부터의 남조선 3당합동을 계기로 하여 발생한 조선공산당 내의 주류파(박헌영 일파)와 반주류파(대회파)사이의 분파투쟁에 휩쓸려 '대회파'입장에서 박헌영에게 반대하게 된 인물이다.
은 박헌영에 대해 기술함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럼에도 박헌영의 사상과 그의 행적에 대해서 저자의 비판적인(곱지않은) 시각이 내재되어 있음은 감추어지지 않는다. 그 구체적인 내용 중 몇몇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분단된 지역에 대조적인 두 개의 전위당이 출현함으로써 남북 공산주의자의 대립이 공공연히 나타나게 되었다. … 그런데 박헌영은 남한의 3당 합당을 계기로 한 분파투쟁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정적'을 만들고 말았다. 이것은 뒷날 북한에서 김일성일파와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또 하나 결정적인 오류는 남한운동의 지도에 극좌모험주의를 사용하여, 수많은 전위부대와 인민을 희생시킨 일이다.…(p127)
②…모든 투쟁이 그의 지시대로 진행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그가 극좌모험주의 전술을 이용한 것은 사실이다. 극좌 모험주의적 전술에 의한 지도가 없었다면 인민의 희생은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박헌영은 10월 인민항쟁의 피맺힌 투쟁이 한창일 때인 10월 중순에 안전지대인 북한으로 도피했다. 공산당의 최고지도자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다.…(p166)
③ …박헌영 일파는 남한에서의 빨치산 투쟁의 전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이것은 대량의 조직원의 희생을 무시한 데다가, 자신들이 지도하는 빨치산 투쟁을 과대하게 발표해 북한에서의 불안정한 지위를 회복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p170)
④…박헌영은 뛰어난 공산주의자였지만 기구한 운명의 혁명가였다. 그는 남조선노동당 시절에 수많은 투쟁을 조직했지만, 그것이 극좌모험주의에 의한 것이었던 점, 또 대남공작을 이해 수많은 당원을 남파하여 희생시켰던 점, 역사적인 파벌의식이 강했던 점 등이 그 자신을 몰락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p222)
⑤ 그러나 박헌영은 우수한 공산주의자이고 그 투쟁경력도 훌륭했으나 파벌투쟁 때문에 코민테른으로부터 공산당의 승인이 취소된 조선의 역사적인 파벌의 우두머리였고… 이에 비해 김일성은 …(p229) 등이다.
그러나 저자 또한 박헌영을 반혁명분자였던가 반민족파괴분자였던가. 하는 이런 주장들에 대해서는 모두 부정하면서, '한국혁명사에서 최대의 비극은 국내파 공산주의 세력의 궤멸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일제하부터 현재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한국공산당주의 운동사나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연구할 때 많은 비판적 관점과 방법론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한정권에 의해 주어진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거기에 모든 준거점을 맞추어 다른 인물들이나 노선, 사물이나 사태를 규정하고 평가하는 것은 그리 옳은, 객관적인 역사연구방법이 아니다. 특히 해방 직후의 그 거대한 탈식민해방의 움직임과 자주독립국가 수립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가장 많은 힘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자주독립국가 수립으로 이끌어가지 못한 박헌영과 남로당에 대해 엄정한 객관의 자로써 비판을 가해야 한다는 점은 재론을 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박헌영-남로당 유일죄악론 또는 간첩으로까지 비화되는 것은 아마도 올바른 태도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역사문제연구소 현대사분과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었나」,역사비평(통권 15호), 1991
참고문헌
1. 박종성 저『박헌영론-한 조선혁명가의 좌절과 꿈』,인간사랑, 1992
2. 박갑동 저 『박헌영』,인간, 1983
논문·기사
1.홍익표,「박헌영의 반제노선 전개과정 연구」,고려대학교 대학원,1990
2.역사문제연구소 현대사분과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었나」,역사비평(통권 15호), 1991
3. 정병준 「박헌영·남로당노선 무엇이 문제인가」,역사비평, 1989
4. 임경석 「박헌영과 김단야」,역사비평, 2000
5. 이지훈「박헌영 사건으로 죄없이 숙청된 사람없다」,말(통권 90호), 1993
6. 김민희 「박헌영-김진계의 증언」,말(통권 101호), 1994
7. 양성철「조선공산당·남로당의 정치노선의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연세대대학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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