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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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시대적 배경(이방원 출생 當時)
2. 이방원의 생애 1(왕위즉위 전)
-역성혁명과 왕자의 亂을 중심으로-
3. 이방원의 생애 2(왕위즉위 후)
-대내적 , 대외적 治積 정리-
4. 역사적 의의와 후대에의 영향
-오늘날과 비교함-

본문내용

도 하였다.
1412년과 1417년에는 선저에 석회를 발라 충해를 방지하는 축선법과 선저를 연기로 그을려서 충해를 방지하는 연훈법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사법 경찰은 1402년에 고려말 이래의 순군만호부를 순위부로 개칭하였고, 1403년에 순위부를 의용순금사로 개편하여 도적을 방지하면서 반역죄인 등을 사찰, 심문, 처벌하게 하였다.
바. 적극적 대외 진출
1401년 명나라 건문제로부터 조선왕위계승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절차인 고명, 인신을 취득했으나, 성조 영락제가 황위를 잇자 이듬해 다시 하륜 등을 보내 등극을 축하하고 건문제가 준 고명, 인신을 업그레이드 해줄 것을 요청, 1403년에 새로운 고명, 인신을 취득함으로써 명 황조와 조선왕조간의 확실한 대외관계를 정립시켰다.
이후 여진인과 입거 요동인을 둘러싸고 불편한 적도 있었고, 또 1년에 세 차례의 사신파견에 따른 조공과 처녀 환관 말 소 등의 무리한 진헌이 있기도 하였지만, 서적 약재 역서 등의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국기를 튼튼히 하는 명분을 얻었다.
한편, 왜인관계에서는 1407년에 흥리왜인의 무역을 정하고 통교무역자의 입구를 입증하는 행장을 발급하였고, 도박소를 부산포와 내이포로 한정시켜 병비를 정탐하고 난언작폐함을 제약하였으며, 1414년에는 왜인범죄 논결법을 정하였다.
1417년 경상도에서의 선박건조를 금하고, 이듬해 염포를 추가로 개방하였지만 왜인제약은 계속하였다.
이와 함께 입국왜인, 왜선, 체류시일, 조어지 등을 제한하였으며, 거주왜인들은 모두 내륙으로 이주시켜 왜구와의 내통을 근절시켰다. 여진에 대해서는 회유와 정벌 등의 강온책을 실시하였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404년에 상경시위제를 실시하고, 1406년에는 경성 경원에 무역소를 개설하였다. 서북국경의 개척은 1403년 강계부, 1413년 갑산군, 1416년 여연군을 각각 설치하면서 압록강까지 진출하였다.
그런데 동북면은 왕 초기에 경원부와 경성성을 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406년부터 1410년에 걸친 여진의 침입으로 경원부를 경성으로 옮기고 공주에 있는 덕릉, 안릉을 함흥으로 옮겼으며, 1415년에 길주, 영흥성을 축조하면서 1417년에야 경원부를 복설하였다. 그밖에 오키나와 그리고 자바(현 인도네시아) 등과도 교섭이 있었고, 오키나와(유구)로부터는 왜구에 의해 잡혀간 포로를 송환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위한 뒤에도 군권에 참여하여 심정, 박습의 옥獄을 치죄하였고, 병선 227척, 군사 1만7000여명으로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세종의 왕권에 기여하였다.
4. 역사적 의의와 후대에의 영향 -오늘날과 비교함-
지금까지 태종 이방원의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그가 한 행적의 의의와 그 행적이 후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정리해보면, 태종은 이성계를 보필하여 조선왕조 개창에 공헌하였고, 개국초에는 일시 불우하기도 하였으나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국권을 장악하였으며,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이룩함으로써 세종이 盛世를 이루는 데 바탕을 이루어주었다.
좀 더 자세히 논해 보면, 먼저 공신세력과 외척들이 왕의 힘을 빌려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시키려는 것을 없앴다. 즉, 태종은 공신인 이거이 등과 외척인 민무구 등을 숙청함으로써 왕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게 했을 뿐더러 후세 왕들 외척들에게도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세종대부터 고려 말 때처럼 외척에 의한 간섭이 없는 강력한 왕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다.
다음으로 군사력 확보다. 태종 전만 해도 음성적으로 각 지방 호족들이 사병세력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왕권의 힘을 뒷받침해 주는 것 중 가장 크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 바로 군사력이다. 현대를 보더라도 그 나라를 힘을 나타내주는 것이 강력한 국방력이라고 할 수 있다. 국방력이 강한 나라는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자주적일 수 있다. 지금을 보더라도 그렇듯이, 태종도 역시 국가의 군사력이 흩어져있는 것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세종 초까지 군사력만큼은 자신이 관리를 하면서 세종이 정치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태종대에 그것이 정비 되어 후세에도 왕권을 쉽게 넘보려는 무리들은 없었다.
그 다음으로 중앙과 지방을 하나로 묶기 시작했다. 고려 때에는 중앙과 지방이 서로 분리가 되어 있었지만 태종의 토지제도 때문에 서서히 지방까지 흡수를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중종 때에 이르러 완전히 통합이 되어서 지방 사림까지 중앙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현대 정치와 연관해서 보면, 지방 자치 제도와 비교를 할 수 있다. 하나의 중앙을 두고 여러 지방들이 독자적이면서 중앙과 연결된 구조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공신세력들의 거세와 외척의 배제, 그리고 사병혁파를 통한 군사력의 중앙통제 강화, 지방에 까지 뻗친 왕권 통제력의 제고 등등 이러한 갖가지 업적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말은 바로 왕권의 강화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조선 건국이후 태조 정종을 거쳐 태종의 치세에 와서야 비로소 왕권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는 단군이래 모든 왕조를 통틀어 가장 안정되고 중앙집권적이며 강력한 왕이 자리잡았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태종 이방원이 가지는 역사적 상징성은 우리가 지금 머릿속에 넣고 있는 '왕'의 이미지, 바로 그것을 확립했다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즉, 조선 왕의 전형적인 모습은 바로 태종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세종이 그토록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버지 태종의 과감한 개혁시도였던 왕권강화정책이 가져온 국정안정이 그 첫 번째 조건이 되었다는 점에서 개혁이 최고의 화두가 되어있는 오늘날의 국내정세를 파악하는 데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
물론 오늘날의 개혁과 태종 당시의 개혁은 개념은 다르다. 그 당시는 분권을 집권으로 바꾸는 것이 개혁이었다면, 지금은 집권을 분권으로 바꾸는 것이 개혁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이 두 시대를 같이 보는 이유는 낡은 기존체제에 대한 최고통수권자의 과감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것인바, 태종 이방원의 역사적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할 것이다.

키워드

태종,   조선,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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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21
  • 저작시기2004.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4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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