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시조의 발생과 기원
Ⅲ. 시조의 사적 전개 과정과 그 특성
1. 강호시조 형태의 연시조 등장
2. 도학적 관념주의에 기반한 강호시조의 융성과 쇠퇴
3. 관료 문인 시조와 향촌 사족 시조의 양분화
4. 가집의 출현과 사설시조의 등장
5. 시조의 전문화와 대중화
Ⅳ. 개화기시조와 현대시조의 등장 - 결론을 대신하여
Ⅱ. 시조의 발생과 기원
Ⅲ. 시조의 사적 전개 과정과 그 특성
1. 강호시조 형태의 연시조 등장
2. 도학적 관념주의에 기반한 강호시조의 융성과 쇠퇴
3. 관료 문인 시조와 향촌 사족 시조의 양분화
4. 가집의 출현과 사설시조의 등장
5. 시조의 전문화와 대중화
Ⅳ. 개화기시조와 현대시조의 등장 - 결론을 대신하여
본문내용
제반 기록이 생략된 채, 노랫말만 시조창 방식으로 적혀 있다. 곡목 분류에 있어서도 권두에 낙시됴, 롱, 편, 송, 소용, 우됴, 후졍화, 계면, 만수딪엽, 원사쳬, 잡가, 갓 등 12항목이 나열되어 있다.
대구에서 발견된 『詩餘』는 국한문 혼용체라는 점만 다를 뿐, 전체적인 틀은 『남훈태평가』와 동일하다. 권두에 樂時調, 弄, 編, 頌, 쇼용, 羽調, 後庭花, 계면, 萬壽大葉, 원싶쳬 등의 곡목이 나열되어 있고, 170수의 작품을 기록한 뒤에 잡가 「小春香歌」가 덧붙여져 있다. 또한 『시조』의 각 이본들은 서로 이름만 같을 뿐 뚜렷한 연관관계는 없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시조』의 경북대본은 작품 수록량이 338수에 달해서 이 계열의 가집 중에는 가장 많은 작품을 담고 있는 것으로 주목 받고 있다. 『남훈태평가』와 『시여』, 『시조』는 서로 간에 가장 많은 작품을 공유하고 있어 이들 사이의 밀접한 친연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남훈태평가』계열의 사설시조는 율격적 이완와 시어의 통속화 경향이 지배적이다. 또한 『남훈태평가』계 가집에는 『가곡원류』계에서 나타나지 않는 잡가들이 덧붙어져 있다. 이는 대중시조집의 수용층이 중간계층의 하위범주에서부터 잡가를 향유하는 도시하층민들에까지 걸쳐 있음을 보여준다. 『남훈태평가』계 작품에서는 구어체의 다양한 구사와 잡가적 표현 등을 즐겨 사용함으로써 평이한 어조와 정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가집에서도 평시조를 두드러지게 선호하고 있으며, 평시조와 사설시조 사이의 경계가 매우 불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점 등은 『가곡원류』계열과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지만 언어표현과 기법의 차이로 인해서 매우 통속적인 정조를 만들어 내는 점은 질적으로 구별된다.
19세기에는 사대부층의 시조에 대한 깊은 관심 역시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신위가 『소악부』를 통해서 민간에 가요화된 시조을 한역화한 것이나 19세기 후반 정현석이 『교방가요』를 편찬하여 평시조뿐만 아니라 사설시조를 한역하는 등에서도 확인된다. 19세기 소악부 작가들은 단형 평시조를 칠언절구라는 한시 형식으로 번역했다. 신위의 『소악부』와 이유승의 『소악부』, 원세순의 『속악부인』등은 원세순이 『삼가악부』라는 이름으로 1904년경에 편찬되었다. 『삼가악부』에는 신위의 『소악부』에 속하는 시조 31수와 한역시, 이유승의 『소악부』에 속하는 시조 10수와 한역시, 그리고 원세순의 『속악부인』에 속하는 시조 17수와 한역시의 총 58수의 시조와 한역시로 이루어져 있다.
) 고미숙, 앞의 책, 242쪽.
조황은 『삼죽사류』에 평시조를 통해서 자기 세상을 일관되게 표출하였다. 그는 한미한 향반으로 밀혀오는 서학에 맞서 성리학적 이념을 고수하려는 의지를 시조 111수를 통해서 드러내었다. 그의 작품들이 기본적으로는 성리학적 이념의 전달이라는 점에서는 교술적 성격을 지니지만 이러한 가운데서도 호탕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지니는 것도 있고, 경제적 모순에 질곡받느 농민의 현실을 다룬 것도 있어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질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가곡창법을 염두해 두고 작품을 수록하였으며, 음악에 대한 철학적 이론을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곡원류』계열의 가집과 일정한 유사성을 지닌다.
이세보
) 이세보는 철종 때 안동 김씨 일파의 횡포를 논하다가 4년간 신지도로 유배생활을 하였던 것을 제외하고는 대원권 정권 이후 민비가 시해될 때까지 줄곧 높은 벼슬을 지내며 영화를 누렸다.
는 평시조의 영역을 가장 넓게 확장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시집 『풍아』는 19세기 말엽까지 사대부가 시조를 적극 향유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며, 평시조가 담을 수 있는 내용적 폭을 크게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세보의 시조는 애정, 유배, 현실비판, 유람·유흥, 회고, 도덕, 기행, 농사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특히 수령이나 아전을 비판하고 농민적 현실에 주목한 현실 비판류의 시조는 시조사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그의 시집 『풍아』에 실린 작품 전체는 종장 말구가 생략된 시조창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한글 표기로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세보의 작품은 『남훈태평가』계열의 대중시조들과 정조나 표현 방식이 대체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이세보는 왕족이면서 상층과료층이라는 사회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으면서도 고급적이고 전문적인 예능인들과 교류하지 않고, 일반 대중들에게서 향유되는 류의 노래를 취하였다는 특성을 지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고미숙, 앞의 책 참조.
Ⅳ. 개화기 시조와 현대 시조의 등장-결론을 대신하여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각 시대별로 시조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았다. 3장 6구, 4음보의 정제된 형식을 취하면서 등장한 시조는 사설시조의 형태적인 변모를 겪으면서 점차 대중화·전문화되었다. 이러한 고시조는 19세기에 이르러 널리 성행한 잡가와 판소리에 의해 일시적으로 쇠퇴하는 듯 하였으나, 『대한매일신보』나 『대한민보』, 『소년』 등의 신문과 잡지에 발표되기도 하였다. 이 시조들은 항일, 국권회복, 자주독립, 국민계몽, 신문화 수용 등을 주제로 하고 있어 개화기 시조의 특성을 드러낸다.
) 『대한매일신보』에는 386수, 『대한민보』에는 155수, 『소년』에는 123수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다고 본다.
(김경미, 「평시조의 형성과 전개』, 『한국고전시가사』. 2003, 집문당, 434쪽.)
최남선이 1907년 『대한유학생회보』에 발표한 작품을 현대시조의 효시로 보기도 하지만, 1926년 발간된 『백팔번뇌』를 계기로 시조가 부흥의 기운을 갖게 되며, 이후로 창작되는 작품을 현대시조라 하는데, 주로 이병기, 정인보, 이호우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이들은 시조의 창작뿐만이 아니라, 국민문학으로서 新詩와 함께 시조를 창작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후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으로 큰 수난을 겪게 되지만, 1932년 『노산시조집』과 1940년 『시조시학』, 1960년 『시조문학』등의 전문지가 지속적으로 간행되었다. 이는 시조가 그만큼 오랜 기간 동안 여러 계층의 애호를 받으며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시가 양식임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신함.
대구에서 발견된 『詩餘』는 국한문 혼용체라는 점만 다를 뿐, 전체적인 틀은 『남훈태평가』와 동일하다. 권두에 樂時調, 弄, 編, 頌, 쇼용, 羽調, 後庭花, 계면, 萬壽大葉, 원싶쳬 등의 곡목이 나열되어 있고, 170수의 작품을 기록한 뒤에 잡가 「小春香歌」가 덧붙여져 있다. 또한 『시조』의 각 이본들은 서로 이름만 같을 뿐 뚜렷한 연관관계는 없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시조』의 경북대본은 작품 수록량이 338수에 달해서 이 계열의 가집 중에는 가장 많은 작품을 담고 있는 것으로 주목 받고 있다. 『남훈태평가』와 『시여』, 『시조』는 서로 간에 가장 많은 작품을 공유하고 있어 이들 사이의 밀접한 친연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남훈태평가』계열의 사설시조는 율격적 이완와 시어의 통속화 경향이 지배적이다. 또한 『남훈태평가』계 가집에는 『가곡원류』계에서 나타나지 않는 잡가들이 덧붙어져 있다. 이는 대중시조집의 수용층이 중간계층의 하위범주에서부터 잡가를 향유하는 도시하층민들에까지 걸쳐 있음을 보여준다. 『남훈태평가』계 작품에서는 구어체의 다양한 구사와 잡가적 표현 등을 즐겨 사용함으로써 평이한 어조와 정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가집에서도 평시조를 두드러지게 선호하고 있으며, 평시조와 사설시조 사이의 경계가 매우 불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점 등은 『가곡원류』계열과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지만 언어표현과 기법의 차이로 인해서 매우 통속적인 정조를 만들어 내는 점은 질적으로 구별된다.
19세기에는 사대부층의 시조에 대한 깊은 관심 역시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신위가 『소악부』를 통해서 민간에 가요화된 시조을 한역화한 것이나 19세기 후반 정현석이 『교방가요』를 편찬하여 평시조뿐만 아니라 사설시조를 한역하는 등에서도 확인된다. 19세기 소악부 작가들은 단형 평시조를 칠언절구라는 한시 형식으로 번역했다. 신위의 『소악부』와 이유승의 『소악부』, 원세순의 『속악부인』등은 원세순이 『삼가악부』라는 이름으로 1904년경에 편찬되었다. 『삼가악부』에는 신위의 『소악부』에 속하는 시조 31수와 한역시, 이유승의 『소악부』에 속하는 시조 10수와 한역시, 그리고 원세순의 『속악부인』에 속하는 시조 17수와 한역시의 총 58수의 시조와 한역시로 이루어져 있다.
) 고미숙, 앞의 책, 242쪽.
조황은 『삼죽사류』에 평시조를 통해서 자기 세상을 일관되게 표출하였다. 그는 한미한 향반으로 밀혀오는 서학에 맞서 성리학적 이념을 고수하려는 의지를 시조 111수를 통해서 드러내었다. 그의 작품들이 기본적으로는 성리학적 이념의 전달이라는 점에서는 교술적 성격을 지니지만 이러한 가운데서도 호탕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지니는 것도 있고, 경제적 모순에 질곡받느 농민의 현실을 다룬 것도 있어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질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가곡창법을 염두해 두고 작품을 수록하였으며, 음악에 대한 철학적 이론을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곡원류』계열의 가집과 일정한 유사성을 지닌다.
이세보
) 이세보는 철종 때 안동 김씨 일파의 횡포를 논하다가 4년간 신지도로 유배생활을 하였던 것을 제외하고는 대원권 정권 이후 민비가 시해될 때까지 줄곧 높은 벼슬을 지내며 영화를 누렸다.
는 평시조의 영역을 가장 넓게 확장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시집 『풍아』는 19세기 말엽까지 사대부가 시조를 적극 향유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며, 평시조가 담을 수 있는 내용적 폭을 크게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세보의 시조는 애정, 유배, 현실비판, 유람·유흥, 회고, 도덕, 기행, 농사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특히 수령이나 아전을 비판하고 농민적 현실에 주목한 현실 비판류의 시조는 시조사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그의 시집 『풍아』에 실린 작품 전체는 종장 말구가 생략된 시조창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한글 표기로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세보의 작품은 『남훈태평가』계열의 대중시조들과 정조나 표현 방식이 대체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이세보는 왕족이면서 상층과료층이라는 사회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으면서도 고급적이고 전문적인 예능인들과 교류하지 않고, 일반 대중들에게서 향유되는 류의 노래를 취하였다는 특성을 지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고미숙, 앞의 책 참조.
Ⅳ. 개화기 시조와 현대 시조의 등장-결론을 대신하여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각 시대별로 시조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았다. 3장 6구, 4음보의 정제된 형식을 취하면서 등장한 시조는 사설시조의 형태적인 변모를 겪으면서 점차 대중화·전문화되었다. 이러한 고시조는 19세기에 이르러 널리 성행한 잡가와 판소리에 의해 일시적으로 쇠퇴하는 듯 하였으나, 『대한매일신보』나 『대한민보』, 『소년』 등의 신문과 잡지에 발표되기도 하였다. 이 시조들은 항일, 국권회복, 자주독립, 국민계몽, 신문화 수용 등을 주제로 하고 있어 개화기 시조의 특성을 드러낸다.
) 『대한매일신보』에는 386수, 『대한민보』에는 155수, 『소년』에는 123수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다고 본다.
(김경미, 「평시조의 형성과 전개』, 『한국고전시가사』. 2003, 집문당, 434쪽.)
최남선이 1907년 『대한유학생회보』에 발표한 작품을 현대시조의 효시로 보기도 하지만, 1926년 발간된 『백팔번뇌』를 계기로 시조가 부흥의 기운을 갖게 되며, 이후로 창작되는 작품을 현대시조라 하는데, 주로 이병기, 정인보, 이호우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이들은 시조의 창작뿐만이 아니라, 국민문학으로서 新詩와 함께 시조를 창작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후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으로 큰 수난을 겪게 되지만, 1932년 『노산시조집』과 1940년 『시조시학』, 1960년 『시조문학』등의 전문지가 지속적으로 간행되었다. 이는 시조가 그만큼 오랜 기간 동안 여러 계층의 애호를 받으며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시가 양식임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