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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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화대혁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문화대혁명의 배경과 원인
Ⅰ. 문화대혁명의 배경과 원인
1-1. 문화대혁명의 시대적 배경
1-2. 문화대혁명의 문화적 사회적 배경
1-3. 문화대혁명의 정치적 배경
1-4 문화대혁명의 조짐
2. 문화대혁명의 원인

Ⅱ. 문화대혁명의 경과와 중국의 모습
1. 문화대혁명의 간략 보고
1-1. 년도별 주요사건
1-2. 권력변화
1-3. 사회, 경제(평균주의의 시대)
2. 문화대혁명의 경과 보고
2-1. 1966년 5월 문화대혁명 발동에서 1969년 4월 중공구대
2-2 중공구대부터 1973년 8월 중공 제10차 전국대표대회
2-3 중공십대에서 1976년 10월까지
2-4. 문화대혁명의 결과

Ⅲ. 문화 대혁명과 기존체제의 붕괴 고찰

Ⅳ. 문화 대혁명의 평가

본문내용

원은 주로 농민이나 군인으로 구성된 무보수의 혁명가임에 반하여 1949년 이후에 가입한 당원은 당 정부 기타 대중조직의 간부로서 관료의 일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연히 관료화 전문화의 경향을 띄게 되었으며, 모택동의 정풍도 결국은 이러한 당의 구조적 변화에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니 당의 단결도 점차 약화되었던 것이다.
당의 구조적 변화와 더불어 일당독재의 취약성을 초래한 것은 모택동의 지도력의 강화이다. 물론 모택동은 문화혁명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이 대중의 지지를 독점함으로서 거국적인 권위를 발휘하여 왔지만 당내 고위간부 사이에서 그의 권위가 실추되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첫째로 모택동이 1956년 당무의 제일선에서 물러나고, 더구나 1958년 국가주석의 지위를 양보한 후부터 국내정치에 있어서 그의 참여가 감소됨에 따라 그 지도력도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국가주석을 유소기에게 이양한 것은 유소기를 그의 후계자로 확정한 결과를 낳았고, 따라서 중공의 정치는 모택동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일탈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권력의 이양에 민감한 당간부의 입장에서 보면 모택동 사상의 영구화보다는 모택동의 지위를 계승할 당지도자에 더 큰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권력의 이양에 의하여 정치적 보수가 증가될 가능성이 보다 많았던 당간부들이 모택동의 개인적 영도력으로부터 멀어짐은 필연적 현상이었을 것이다.
둘째로 모택동의 권위는 1957년 이후 당의 중요정책의 실패와 관련된다. 이 시기의 중요한 중공정치의 정책은 중소분쟁과 대약진운동이었다. 그런데 모택동은 이러한 정책이 가져온 부정적 영향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모택동의 책임이 대외적으로 부인되었지만 지배계급내부에서 권위의 실추를 초래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후 만약 모택동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수정주의 노선>을 쫓는 신축성을 보였다면, 당의 분열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택동은 수정주의와의 야합을 거부하고, 자신의 이상을 현실화하려는 장기적인 계획을 꾀했던 것이다. 문화혁명은 바로 이와 같은 모택동의 계획이 폭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중공의 많은 지도자들이 모택동의 이상을 의문시하고, 그에게의 복종을 허락하지 아니한 것에서 문화혁명의 권력투쟁은 발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69년 4월에 개최된 <구전대회>이후 중공은 다시 모택동의 영도아래 붕괴된 당의 재건에 고 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산주의국가에 있어서 당의 부재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모택동의 입장에서 문화혁명의 목적은 사실상 당의 파괴가 아니라 당내의 불순분자를 제거함으로서 그가 원하는 당의 재정비에 있었다. 그러므로 <구전대회>이후에 재건되어 온 당은 명실공히 <모택동의 정당>일 것이다. 그러나 <모택동의 정당>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모택동의 개인적 존재일 것이며, 모택동이 부재하는 <모택동 정당>은 비록 어느 누가 그의 정책을 고집한다 해도 취약성을 난면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택동의 후계자가 해결할 문제는 당내외에 있어서 모택동의 개인적 권위와 대치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의 건설이다. 이것이 정치적 반대세력이 제도화되어 있지 아니하고 모택동의 개인적 지도력에 지나치게 의존해 온 일당독재가 당면한 과제이다.
결 론
Ⅳ. 문화 대혁명의 평가
문화대혁명이 형식적으로 종식된 1969년 4월 중국공산당 <구전대회>에서 당부주석 임표는 문화혁명의 경위에 관하여 주목할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임표는 문화혁명의 목적이 이념적·정치적·경제적 성질의 것이였다고 말하면서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권력의 문제이며, 어떤 계급이 지도력을 장악하느냐 하는 문제" 임을 강조했다. 이것은 문화혁명을 단행한 모택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당과 정부내에 있던 <반모세력>에 대한 숙청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지배계급의 동질성이 강조되어 오던 중공지도체제의 분열은 바로 무택동과 유소기의 대립에서 구체화되었음을 시사한 것이다.
이와 같은 지도층내의 분열에서 시작하여 전개된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의 이상과 변화하는 중국의 사회적 현실과의 괴리에서 출발하여 전자의 승리로 끝난 사건이다. 그러나 그 혁명은 사회의 구조적 분화와 전문화에 대한 요구와 다양한 사회적 조직의 물질적 이익에 보다 실용적으로 적응해 온 제도자체를 파괴했다는 점에서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문화혁명에서 강조된 모택동 사상의 제 측면은 하나의 제도로서 영구화된다기 보다는 중국의 사회적 현실을 무시했기 때문에 결국은 배격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문화혁명이 지배와 복종사이의 분열을 없애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구별을 없애고 정책결정과정에 있어서 피지배자의 지접적인 참여를 중시하는 모택동의 이상이 승리한 것이라고 본다면, 오늘날 중공의 정치는 완전히 모택동 개인의 낭만적 혁명정신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하면 영구혁명에 대한 모택동의 꿈이 현실화된 무용담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이데올로기>와 당의 훈련에도 불구하고 중공에 있어서도 지도자의 개인성이 의회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와 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문화대혁명은 다시 좌파를 유리한 입장에 서게 하였지만, 1949년 이래 중공당이 그 선택에 망설이던 발전의 두 노선, 즉 대중의 정치적 동원 및 밑으로부터의 주도권 강조와 경영에서의 위로부터의 선택적 계획과 경제적 기준 강화 중에서 어느 하나를 별정적으로 선택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당과 국가 기구 그리고 그 변경 불가능의 명령의 합법성이 의심되고, 장래에도 유사한 다른 공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실히 해둠으로써, 문화혁명은 중국 공산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국가 소멸론에 본질적이고도 특이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1. 최명, <문화혁명과 중공의 정치>, <<공삼민 박사 화갑기념논총>>, 1973
2. F.르 바르비에, J.셰노, J.벨라센, A-M.뒤보아, J.-F.올리비에, J.-P.
뻬만스, N.왕/공기두 옮김, <중공 1949-1976>,
중국공산당 80주년 실록 ―홍위병운동 시말 유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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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21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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