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 성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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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론
1. 삼한(三韓)에 대한 고서들의 기록

Ⅱ. 본론
1. 삼한의 형성과정에 대한 견해
2. 삼한의 성립과 위치문제
3. 삼한의 특징
4. 삼한의 사회
5. 후대들의 인식

Ⅲ. 결론

본문내용

아직도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로 부족공동체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소위 대국이라야 여러 부족의 연맹체에 불과하였으며 정치와 제사(祭祀)는 분리된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위지》 <변진조(弁辰條)>에 보면 격이 높은 것부터 열거하여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 등의 군장(君長)의 칭호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삼한 전체에 공통된 것이었고 격의 차이는 있으나 이들은 모두 한 부족국가의 우두머리에 대한 칭호였다. 각 부족국가는 이들 우두머리가 통솔하였으나 아직 도시와 촌락의 구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을은 미분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부락 단위 공동체적 조직은 매우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② 종교
삼한시대에는 천군(天君)이라 부르는 제사장(祭祀長)이 각 국읍(國邑)마다 1인씩 있어서 소도(蘇塗:솟대)라 부르는 제사 지역을 관할하였는데, 소도는 신성한 지역으로서 법률의 힘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고 범죄인이 이 곳으로 도피하면 그를 돌려보내지도 않았으며, 또 이들을 잡아가지도 못하게 되어 있었다.
③ 산업
농업과 양잠 길쌈 등이 삼한을 통하여 널리 행하여졌다. 특히 평야가 많은 삼한지역에는 벼농사가 일찍부터 행하여졌고 수리시설로 저수지도 많이 만들었던 것 갈다. 그 한 예로 김제(金堤)의 벽골지(碧骨池),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제천(堤川)의 의림제(義林堤) 등은 이 때의 저수지이다. 목축도 성했고 해안지대에는 어업도 성하였다. 특히 진한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산출되어 널리 쓰였다. 철은 물품매매에 화폐처럼 사용되고 낙랑 방면과 일본에까지 수출하였다고 한다.
④ 생활양식 및 풍습
삼한시대에는 농업이 그들 경제의 최대 근본이었으므로 씨를 뿌리는 봄과 추수하는 가을에는 계절적인 제사가 성행하였다. 씨를 뿌리고 난 5월에는 부락 전체의 군중이 모여 신에게 제사하고 가무(歌舞)와 음주로 밤낮을 즐겁게 놀았고 추수가 끝난 10월에도 그러하였다. 집은 대개 평지에 움집, 산지에는 귀틀집이 많았는데, 의복은 삼베모시명주 등으로 만들어 입었다. 남자는 도포처럼 된 웃옷을 입고 상투를 틀고 가죽신 또는 짚신을 신었으며 이때부터 지게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구슬을 재보(財寶)로 삼았고, 또 그것을 치레로 옷에 달기도 하였으며 귀고리와 목걸이도 사용하였다. 이러한 유물은 지금도 당시의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진한변한에서는 길 가던 사람들이 서로 길을 사양하였다 하니 풍속의 순후함을 말해 주고 있으며 혼인 등 예절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었고 법과 형벌은 일반적으로 엄하였다. 자연환경이 온화하고 곡식이 풍부하여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노래춤음주가 성행하였으며 특히 변한마한 지역에는 비파와 같은 악기도 있었다고 한다.
⑤ 음악
삼한시대에 5월 파종(播種)과 10월 추수가 끝났을 때 베풀어졌을 성대한 가무연(歌舞宴)은 오늘날의 농악무(農樂舞)나 호남지방의 강강술래, 영남지방의 쾌지나칭칭나네와 같은 군무(群舞)나 원무(圓舞)의 시원일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변한과 진한에는 중국의 축(筑)과 비슷한 현악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야금과 거문고가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고'로 추정된다. 이 '고'에 딸린 속요(俗謠)나 속무(俗舞)가 의당 존속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고'는 6세기경 등장한 가야금의 전신으로 보이며 가야금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5. 후대들의 인식
① 신라(新羅) ~ 삼한을 곧 삼국 자체로 인식
② 후삼국시대 ~ 삼한은 아방(我邦)으로 인식, 각각 삼국으로 대응 분립적 인식
③ 고려(高麗)후기 ~ 최치원의 인식 계승, 삼한을 신라, 고구려, 백제로 파악
④ 조선(朝鮮)중기 ~ 삼한의 계통 및 삼국과의 관계 이해 연구
Ⅲ. 결론
삼한은 중앙 집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연맹왕국에서 머물렀으며,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마한은 한강유역으로부터 충청, 전라도에 걸쳐 있었으며, 진한은 경기, 강원도 일부, 변한은 낙동강 유역 경상도에 비정된다. 《위지(魏志)》 및 《후한서(後漢書)》 등은 진한은 동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다고 그 위치를 적고 있다. 그러므로 마한은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진한은 지금의 경상남북도, 변한은 낙동강 유역에서 전라남도의 동부에 이르는 지방으로 보는 것이다.
삼한 지역 내에 분포된 소국(부족국가)들의 수와 그 위치 및 그들의 최고 맹주인 진왕과의 관계를 보면 《위지》를 근거로 하여 엮은 《후한서》에는 마한에 54국, 진한에 12국, 변한에 12국이 있다고 하였으나 그 숫자에 대해서는 고증이 구구하여 아직 결론이 나 있지 않다. 그러나 우선 《위지》 중 <마한조(馬韓條)>를 보면 거기에 나오는 50여 개국은 진한 마한 두 지역의 국읍(國邑)을 한데 묶어 열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들 50여 국은 목지국의 진왕을 최고 맹주로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정치적으로 하나의 큰 연합체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국(國)은 한 부족의 거주지역을 뜻하는 말로, 그 영역과 인구가 낙랑(樂浪) 대방(帶方) 등 한 군현(郡縣)의 1현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대국(大國:목지국과 같은 것)이 1만여 가(家), 소국이 수천 가(家)라 하고 이들 50여 국의 총 호수가 10여 만 호라 하였는데, 이 호(戶)란 혈연적인 가부장제(家父長制)의 공동체였다.
♣참고 문헌
문창로 < 삼한 시대의 읍락과 사회> (신서원,1989) p32 ̄33
문창로 < 삼한 시대의 읍락과 사회> (신서원,1989) p30 ̄33
이경, 엄애경, 김재선 < 한글 동이전> (서문 문화사,1999) p48~53, p76~82
김원중 옮김 < 정사 삼국지> (신원 문화사,1999) p321~327
이종욱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체계> (소나무,1999)p63
문창로 < 삼한 시대의 읍락과 사회> (신서원, 1989)p28~31
국사편찬위원회 <국사 上> (교육부,1999) p34~36, p43
문창로 < 삼한 시대의 읍락과 사회> (신서원,1989) p287~296
☞ < 두산세계대백과 > 참조

키워드

삼한성립,   삼한,   변한,   진한,   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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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18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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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79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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