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고구려
1. 고구려
2. 고구려의 건국
3.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⑴ 중앙 집권력의 강화
⑵ 부자 상속제의 확립
⑶ 대외 정복 활동―초기 단계
⑷ 4세기의 대외 관계
4. 고구려 문화
5. 고구려 문화재
⑴ 중원고구려비
⑵ 무용총
⑶ 장군총
6. 주요 인물
⑴ 고구려 대제국을 건설한 광개토대왕
⑵ 담징
⑶ 양만춘
⑷ 을지문덕
⑸ 연개소문
7. 고구려의 사회경제
⑴ 자연환경
⑵ 경제
8. 고구려의 생활문화 ; 결혼 풍속
Ⅱ. 백제
1. 백제의 건국
⑴ 건국과 멸망
① 성립
② 발전
③ 체제의 정비와 대외팽창
④ 천도와 중흥
⑤ 말기의 변동과 멸망
⑵ 건국신화
2. 백제의 발전
⑴ 백제의 팽창(전성기)
⑵ 백제의 대외관계
⑶ 백제의 일본 경영
3. 백제의 문화 ; 백제문화의 일본 전파
4. 백제의 문화재
⑴ 백제의 유물
① 사적 13호, 무령왕릉, 충남 공주시 금성동, 백제 중기
②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 금동향로, 백제 7세기 초, 전체높이 64cm, 지름 20cm
③ 국보 145호/ 귀면청동로, 삼국시대-백제, 금속공예
④ 연화문전[蓮花文塼]
⑤ 보물 329호/ 석조여래좌상 [石造如來坐像]
⑵ 백제의 유적지
① 무녕왕릉
② 능산리 고분군
5. 주요 인물
⑴ 일본태자의 스승이 된 왕인
⑵ 일본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를 그린 아좌 태자
⑶ 최후의 충신 황산벌 싸움터의 계백
⑷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룬 근초고왕
Ⅲ. 신라
1. 신라의 건국
2. 신라의 발전
⑴ 신라의 발전
⑵ 신라의 전성기
3. 신라의 문화재
⑴ 세계의 문화유산 불국사
⑵ 동양 최고의 천문기상대, 첨성대
⑶ 세계의 문화유산 석굴암
⑷ 힘이 넘치는 남성미를 보여준 석가탑
⑸ 여성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진 다보탑
4. 주요 인물
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
⑵ 대승불교의 참뜻을 일깨운 원효
⑶ 천축국 순례승 혜초
Ⅳ. 삼한
1. 삼한
2. 마한
3. 진한
4. 변한
1. 고구려
2. 고구려의 건국
3.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⑴ 중앙 집권력의 강화
⑵ 부자 상속제의 확립
⑶ 대외 정복 활동―초기 단계
⑷ 4세기의 대외 관계
4. 고구려 문화
5. 고구려 문화재
⑴ 중원고구려비
⑵ 무용총
⑶ 장군총
6. 주요 인물
⑴ 고구려 대제국을 건설한 광개토대왕
⑵ 담징
⑶ 양만춘
⑷ 을지문덕
⑸ 연개소문
7. 고구려의 사회경제
⑴ 자연환경
⑵ 경제
8. 고구려의 생활문화 ; 결혼 풍속
Ⅱ. 백제
1. 백제의 건국
⑴ 건국과 멸망
① 성립
② 발전
③ 체제의 정비와 대외팽창
④ 천도와 중흥
⑤ 말기의 변동과 멸망
⑵ 건국신화
2. 백제의 발전
⑴ 백제의 팽창(전성기)
⑵ 백제의 대외관계
⑶ 백제의 일본 경영
3. 백제의 문화 ; 백제문화의 일본 전파
4. 백제의 문화재
⑴ 백제의 유물
① 사적 13호, 무령왕릉, 충남 공주시 금성동, 백제 중기
②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 금동향로, 백제 7세기 초, 전체높이 64cm, 지름 20cm
③ 국보 145호/ 귀면청동로, 삼국시대-백제, 금속공예
④ 연화문전[蓮花文塼]
⑤ 보물 329호/ 석조여래좌상 [石造如來坐像]
⑵ 백제의 유적지
① 무녕왕릉
② 능산리 고분군
5. 주요 인물
⑴ 일본태자의 스승이 된 왕인
⑵ 일본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를 그린 아좌 태자
⑶ 최후의 충신 황산벌 싸움터의 계백
⑷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룬 근초고왕
Ⅲ. 신라
1. 신라의 건국
2. 신라의 발전
⑴ 신라의 발전
⑵ 신라의 전성기
3. 신라의 문화재
⑴ 세계의 문화유산 불국사
⑵ 동양 최고의 천문기상대, 첨성대
⑶ 세계의 문화유산 석굴암
⑷ 힘이 넘치는 남성미를 보여준 석가탑
⑸ 여성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진 다보탑
4. 주요 인물
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
⑵ 대승불교의 참뜻을 일깨운 원효
⑶ 천축국 순례승 혜초
Ⅳ. 삼한
1. 삼한
2. 마한
3. 진한
4. 변한
본문내용
금강지라는 고승으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고 장안에 살면서 불경을 번역하였다.
오늘날의 세계는 '지구촌'이라 하여 어느 곳이나 가까운 이웃처럼 드나들지만 당시는 먼 옛날 지구가 둥근 것인지도 모르고 인도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확실히 몰랐던 시대였으므로 인도을 여행하기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인도 여행기는 인도에 대한 자세한 모습을 재미있게 적어 놓았는데 이는 서양의 '동방견문록'보다 더 가치 있는 고전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Ⅳ. 삼한
1. 삼한
상고시대에 한반도 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3부족사회. 마한·진한·변한을 말한다. 본래 이 지역에는 목지국의 군장의 세력 하에 진국이라는 부락연맹체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진국의 동북계 지역에는 일찍부터 북쪽 나라에서 남하 이주한 사람들로 형성된 집단사회가 있었다.
고조선 마지막 임금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겨 남으로 망명하여 정주한 곳도 이 고장이다. 이 이류민의 사회는 준왕 이래로 스스로 한이라 부르며 목지국의 우두머리인 진왕의 보호와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낙랑의 한인들은 이를 진한이라 불렀다. 그 뒤 한의 칭호는 점점 확대되어 진왕을 맹주로 받드는 모든 소국에 대해서도 한의 칭호를 붙이게 되었다.
이리하여 후한 말 대방군이 새로 설치될 무렵에는 진한과 아울러 마한 · 변한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게 되었다. 마한의 마(馬)는 본래 족명인 개마에서 온 것이라 하며, 변한의 변(弁)은 그들이 사용한 관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위지》 및 《후한서》 등은 진한은 동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다고 그 위치를 적고 있다. 그러므로 마한은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진한은 지금의 경상남북도, 변한은 낙동강 유역에서 전라남도의 동부에 이르는 지방으로 보는 것이다.
삼한 지역 내에 분포된 소국들의 수와 그 위치 및 그들의 최고 맹주인 진왕과의 관계를 보면 《위지》를 근거로 하여 엮은 《후한서》에는 마한에 54국, 진한에 12국, 변한에 12국이 있다고 하였으나 그 숫자에 대해서는 고증이 구구하여 아직 결론이 나 있지 않다. 그러나 우선 《위지》 중 <마한조>를 보면 거기에 나오는 50여 개국은 진한 ·마한 두 지역의 국읍을 한데 묶어 열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들 50여 국은 목지국의 진왕을 최고 맹주로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정치적으로 하나의 큰 연합체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국(國)은 한 부족의 거주지역을 뜻하는 말로, 그 영역과 인구가 낙랑 · 대방 등 한 군현의 1현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대국(목지국과 같은 것)이 1만여 가(家), 소국이 수천 가(家)라 하고 이들 50여 국의 총 호수가 10여 만 호라 하였는데, 이 호(戶)란 혈연적인 가부장제의 공동체였다.
2. 마한
대체로 BC 1세기~AD 3세기에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 분포한 54개의 소국을 가리킨다. 진수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54소국은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모두 합하면 10여 만 호가 된다고 한다.
각 소국에는 우두머리가 있는데, 세력의 대소에 따라 신지·읍차라 불렀다. 이들 소국은 다수의 읍락으로 구성되었으며, 중심 읍락인 국읍은 각 읍락간의 물자교역의 중심지이고, 국읍의 주수는 대내외 교역활동을 장악함으로써 경제적인 측면에서 각 읍락을 통솔하고 유사시에는 군사 활동의 지휘권까지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마한 소국을 형성한 주체에 대해서는 마한족이라는 별개의 종족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이주 정착하여 성립시켰다고 보는 삼한이동설의 입장도 있으나, 대부분은 선주 토착집단의 점진적인 발전의 결과 삼한이 대두했다고 본다. 즉, BC 3,2세기 중남부 지역에 좁은놋 단검 문화를 배경으로 한 다수의 정치집단이 존재했는데, 더욱 선진적 정치집단은 다른 지역에 비해 충남·전라 지역에 밀도 있게 분포함으로써 이들이 마한 소국의 상당 부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BC 1세기 이후 위씨조선계 유민과 문화의 유입, 철기의 보급, 부여계 유이민 집단의 정착 등의 정치 문화적 변화 속에서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세력권이 형성됨에 따라 청동기문화 단계의 마한의 영향력은 점차 위축되었다. 그리하여 2세기 이후부터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통합할 때까지 마한 지역은 한강 유역의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와 목지국 중심의 토착세력권이 병존하는 상태였으며, 이후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가 점차 마한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편제 질서를 확립해간 것이다. 마한 54국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3. 진한
대체로 기원 전후부터 4세기경에 지금의 대구·경주 지역에 분포한 12개의 소국을 가리킨다.
진한의 형성 주체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삼국지》에서는 진한을 옛 진국이라 하고 《후한서》에서는 진국이 진한뿐만 아니라 삼한 전체를 포괄한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은 《삼국지》 진한조에 중국 진나라의 유민들이 노역을 피해 한나라로 이주해 와서, 마한의 동쪽 땅을 분할 받아 진한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들 소국들은 3세기 후반에 신라의 기본세력으로 편제되어갔으며, 그 중 일부는 가야의 소국으로 발전한 듯하다.
4. 변한
변진이라고도 한다. 대체로 기원 전후부터 4세기경까지 지금의 김해·마산 지역에 분포한 정치 집단을 가리킨다. 진한과 변한의 구분은 종족적·지역적인 구분에 의해서 대비되지만 《삼국지》 우지동이전에 “변진은 진한과 잡거하며 언어·법속·의식주가 같고 다만 귀신의 섬김이 다르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한과 변한은 전체적으로 같은 문화기반을 가진 정치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에 변진은 12개의 소국 이외에 독립된 거수가 있는 여러 소별읍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변진은 경상도 지역에 분포한 여러 정치 집단 가운데 진한연맹체에 속하지 않은 세력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 중 대부분은 뒤에 가야연맹체를 구성하였다. 변한은 유명한 철산지로서 중국 군현과 왜에 철을 수출하였고 왜와 인접한 지역에서는 문신의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 출처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네이버 백과사전
- 책 「다시 찾는 우리역사」
오늘날의 세계는 '지구촌'이라 하여 어느 곳이나 가까운 이웃처럼 드나들지만 당시는 먼 옛날 지구가 둥근 것인지도 모르고 인도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확실히 몰랐던 시대였으므로 인도을 여행하기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인도 여행기는 인도에 대한 자세한 모습을 재미있게 적어 놓았는데 이는 서양의 '동방견문록'보다 더 가치 있는 고전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Ⅳ. 삼한
1. 삼한
상고시대에 한반도 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3부족사회. 마한·진한·변한을 말한다. 본래 이 지역에는 목지국의 군장의 세력 하에 진국이라는 부락연맹체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진국의 동북계 지역에는 일찍부터 북쪽 나라에서 남하 이주한 사람들로 형성된 집단사회가 있었다.
고조선 마지막 임금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겨 남으로 망명하여 정주한 곳도 이 고장이다. 이 이류민의 사회는 준왕 이래로 스스로 한이라 부르며 목지국의 우두머리인 진왕의 보호와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낙랑의 한인들은 이를 진한이라 불렀다. 그 뒤 한의 칭호는 점점 확대되어 진왕을 맹주로 받드는 모든 소국에 대해서도 한의 칭호를 붙이게 되었다.
이리하여 후한 말 대방군이 새로 설치될 무렵에는 진한과 아울러 마한 · 변한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게 되었다. 마한의 마(馬)는 본래 족명인 개마에서 온 것이라 하며, 변한의 변(弁)은 그들이 사용한 관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위지》 및 《후한서》 등은 진한은 동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다고 그 위치를 적고 있다. 그러므로 마한은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진한은 지금의 경상남북도, 변한은 낙동강 유역에서 전라남도의 동부에 이르는 지방으로 보는 것이다.
삼한 지역 내에 분포된 소국들의 수와 그 위치 및 그들의 최고 맹주인 진왕과의 관계를 보면 《위지》를 근거로 하여 엮은 《후한서》에는 마한에 54국, 진한에 12국, 변한에 12국이 있다고 하였으나 그 숫자에 대해서는 고증이 구구하여 아직 결론이 나 있지 않다. 그러나 우선 《위지》 중 <마한조>를 보면 거기에 나오는 50여 개국은 진한 ·마한 두 지역의 국읍을 한데 묶어 열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들 50여 국은 목지국의 진왕을 최고 맹주로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정치적으로 하나의 큰 연합체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국(國)은 한 부족의 거주지역을 뜻하는 말로, 그 영역과 인구가 낙랑 · 대방 등 한 군현의 1현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대국(목지국과 같은 것)이 1만여 가(家), 소국이 수천 가(家)라 하고 이들 50여 국의 총 호수가 10여 만 호라 하였는데, 이 호(戶)란 혈연적인 가부장제의 공동체였다.
2. 마한
대체로 BC 1세기~AD 3세기에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 분포한 54개의 소국을 가리킨다. 진수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54소국은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모두 합하면 10여 만 호가 된다고 한다.
각 소국에는 우두머리가 있는데, 세력의 대소에 따라 신지·읍차라 불렀다. 이들 소국은 다수의 읍락으로 구성되었으며, 중심 읍락인 국읍은 각 읍락간의 물자교역의 중심지이고, 국읍의 주수는 대내외 교역활동을 장악함으로써 경제적인 측면에서 각 읍락을 통솔하고 유사시에는 군사 활동의 지휘권까지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마한 소국을 형성한 주체에 대해서는 마한족이라는 별개의 종족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이주 정착하여 성립시켰다고 보는 삼한이동설의 입장도 있으나, 대부분은 선주 토착집단의 점진적인 발전의 결과 삼한이 대두했다고 본다. 즉, BC 3,2세기 중남부 지역에 좁은놋 단검 문화를 배경으로 한 다수의 정치집단이 존재했는데, 더욱 선진적 정치집단은 다른 지역에 비해 충남·전라 지역에 밀도 있게 분포함으로써 이들이 마한 소국의 상당 부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BC 1세기 이후 위씨조선계 유민과 문화의 유입, 철기의 보급, 부여계 유이민 집단의 정착 등의 정치 문화적 변화 속에서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세력권이 형성됨에 따라 청동기문화 단계의 마한의 영향력은 점차 위축되었다. 그리하여 2세기 이후부터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통합할 때까지 마한 지역은 한강 유역의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와 목지국 중심의 토착세력권이 병존하는 상태였으며, 이후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가 점차 마한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편제 질서를 확립해간 것이다. 마한 54국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3. 진한
대체로 기원 전후부터 4세기경에 지금의 대구·경주 지역에 분포한 12개의 소국을 가리킨다.
진한의 형성 주체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삼국지》에서는 진한을 옛 진국이라 하고 《후한서》에서는 진국이 진한뿐만 아니라 삼한 전체를 포괄한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은 《삼국지》 진한조에 중국 진나라의 유민들이 노역을 피해 한나라로 이주해 와서, 마한의 동쪽 땅을 분할 받아 진한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들 소국들은 3세기 후반에 신라의 기본세력으로 편제되어갔으며, 그 중 일부는 가야의 소국으로 발전한 듯하다.
4. 변한
변진이라고도 한다. 대체로 기원 전후부터 4세기경까지 지금의 김해·마산 지역에 분포한 정치 집단을 가리킨다. 진한과 변한의 구분은 종족적·지역적인 구분에 의해서 대비되지만 《삼국지》 우지동이전에 “변진은 진한과 잡거하며 언어·법속·의식주가 같고 다만 귀신의 섬김이 다르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한과 변한은 전체적으로 같은 문화기반을 가진 정치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에 변진은 12개의 소국 이외에 독립된 거수가 있는 여러 소별읍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변진은 경상도 지역에 분포한 여러 정치 집단 가운데 진한연맹체에 속하지 않은 세력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 중 대부분은 뒤에 가야연맹체를 구성하였다. 변한은 유명한 철산지로서 중국 군현과 왜에 철을 수출하였고 왜와 인접한 지역에서는 문신의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 출처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네이버 백과사전
- 책 「다시 찾는 우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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