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아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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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부르주아 유토피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부르주아 유토피아 만들기 - 영국의 교외화
1) 클래펌, 진정한 파라다이스
2) 문화로서의 교외, 상품으로서의 교외
3) 교외와 산업도시 : 맨체스터

3. 도시성 대 교외성 - 프랑스와 미국
1) 도시성의 본보기 - 프랑스 파리
2) 미국으로 전파된 교외화

4. 나 오 며

본문내용

에도 불구하고 귀족적 도시 이상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충실했다.
2) 미국으로 전파된 교외화
파리가 부르주아 주거 교외를 배척하고 있던 그해에, 미국 도시들은 그것을 도시구조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이처럼 중산층 주거 교외를 수용하게 된 근원이 미국 중산층의 문화와 경제에 아주 깊이 뿌리박혀 있었기에 미국 교외지역을 아주 진지하게 연구한 학자들조차도 교외화가 ‘미국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세기 초 미국 도시들의 ‘주변지역’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미국의 부르주아지가 주변부로 향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여전히 도시의 연립주택을 선호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분명 아주 부유한 상인들은 18세기 중엽의 런던 상인들을 모방해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턴의 주거지역을 벗어난 벌판에 아름다운 빌라들을 건설했다. 그러나 이 빌라들은 여름용 주택이거나 은퇴자를 위한 주택이었지, 결코 런던에서처럼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런 경향들을 공동체 디자인으로 전환시킬 미국의 존 내시가 없었다.
이처럼 미국에 진정한 교외 양식이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국 도시들은 런던만큼 규모가 크지 않았다. 1800년에 런던의 인구는 1백만 명 이상이었지만, 뉴욕의 인구는 6만 명에 불과했다. 런던의 규모가 크다는 것은 빠져나갈 필요성뿐만 아니라 대안적 스타일을 정의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많은 부르주아가 있었음을 의미했다. 더구나 이 시기의 미국 대도시는 어느 도시도 맨체스터와 같은 산업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그래서 상업용 사무실과 작업장들은 도시의 심각한 오염이나 심각한 계급 갈등을 낳지 않았다.
그렇다면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 부르주아지 사이에서 타운하우스를 대체할 교외 양식이 출현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대답은 분명 무질서하고 평민적인 도시에서 주거를 유지할 수 있게 했던 자부심이 상실된 것과 관련된다. 물론 가장 익숙한 이유들은 여전히 가장 유효한 것들, 즉 대량 이주, 산업화, 정당정치이다. 그 모든 것의 근원을 이루는 것은 맨체스터에서 작용했던 거대한 힘, 즉 계급 분리의 욕구였다.
대부호 이외의 사람들에게 도시의 타운하우스는 상당한 경제적·사회적 위험을 의미했다. 중산층 가운데 지위가 덜 안정적이던 사람들이 상업주의나 빈자들로 물든 급변하는 도시 근린에 속해 있었다면, 그들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단일계급근린의 이상이 뿌리를 내리자 30년 전 맨체스터에서 달성했던 것과 비교될 수 있는 이와 같은 부자와 빈자의 의도적인 혼합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제 ‘중산층을 위해 중심지를 개선하는 어떤 조화로운 정치적·경제적 건설 프로그램을 수립할 것이냐, 아니면 부르주아지를 격리시키고 작은 단지를 효과적으로 개발할 수 있을 만큼 멀리 떨어진 주변부로 나갈 것이냐’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나폴레옹 3세와 독재적 프랑스 정부가 없는 상황에서 미국의 오스만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새로운 이민인구가 미국 도시들로 물밀 듯이 유입됨에 따라 엘리트만의 주거지구는 도시 중심부와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교외화’의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도시로부터의 거리만으로는 교외가 쇠락하는 것-‘불쾌한 것들(떠들썩하고 먼지가 많고 연기가 솟아오르고 시끄럽고 혼란스럽고 악취가 나는 것 등)’-을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외를 건설하려면, 빌라를 짓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머지 않아 이 교외의 지구들이 황폐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어떤 확신을 주는 것이 필요했다. 이에 대한 해답은 바람직하지 않은 모든 용도들로부터 미개발 토지구역을 떼어내어, 그 토지를 중산층 주거에만 적합한 교외로 지정하는 의식적인 계획 및 디자인 과정에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세기 중엽 미국에서 교외의 이상이 성공하게 된 것은 ‘영국의 교외빌라를 이상적인 미국의 주거형태’로 표현했던 일군의 평론가들에 의해서였다.
4. 나 오 며
이 책의 저자 피시만은 18세기 런던에서 근대 교외의 기원을 찾았다. 하지만 런던 부르주아지가 18세기에 들어 급작스럽게 도시주택을 포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주거양식인 교외주택으로 이주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 중간단계로 주말빌라라는 주거양식을 선택했다.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주는 지역이 바로 클래펌 마을이다. 그 곳의 사람들은 ‘복음주의’라는 같은 가치관을 바탕으로 ‘정원 속의 가족’이라는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이러한 교외 양식이 엘리트로부터 나머지 중산층으로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교외는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부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패러독스를 가지고 있었다. 즉, 그것은 도시의 위험요소로부터의 피난처이자 부르주아 사회 자체의 조화롭지 못한 요소들로부터의 도피처였다. 아무튼 이렇게 시작된 교외화의 물결은 맨체스터를 비롯해 기타 1840년대 초기 산업도시들의 부르주아지에게 영향을 미쳐 산업도시의 기본구조를 만들었다.
교외지역의 출현은 도시적 가치들의 총체적인 변형, 즉 중심과 주변의 의미 반전뿐만 아니라 작업장과 가족생활의 분리, 새로운 도시공간형태(계급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주거전용으로 지구가 있는)의 창조를 요했다.
이러한 교외 모델은 급성장하는 미국 도시들의 외곽에서 자리를 잡았으나 프랑스에서는 거부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 부르주아지가 도심을 장악하고 있었다. 피시만은 그에 대한 해답을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프랑스인과 앵글로 아메리카인의 도시에 대한 이미지의 차이와 오스만의 대대적인 파리 재건의 특성에서 찾았다. 따라서 중산층의 교외화가 부르주아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동시에 교외지역은 사실상 문화적 창조물, 즉 경제구조와 문화적 가치에 토대를 둔 앵글로 아메리카 부르주아지의 의식적 선택이었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요컨대 18세기 후반 런던 외곽에 형성되었던 초기의 근대 교외들은 그 후의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교외 이미지를 정의했을 뿐만 아니라 계급과 기능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도 근대 도시를 위한 새로운 구조를 의미했다. 그것이 바로 ‘부르주아 유토피아’를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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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5.01.04
  • 저작시기2005.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8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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