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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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무신정권하 농민 천민의 난

【농민항쟁의 배경과 원인】
1. 농민항쟁의 배경
1)민의 유망현상
2)지배층의 분열과 전쟁의 격화
2. 농민 항쟁의 원인
1) 토지탈점과 토지분급제의 모순
2) 지방관원의 부세수탈과 군현체제의 모순
3. 농민 항쟁의 지향과 의미

【농민 항쟁의 전개와 의의】
1. 전개
① 무신정권 전반기
② 최씨정권기
③대몽 항쟁기의 농민 항쟁
2. 의의

【참고자료】

본문내용

민란의 성격을 띤 것이기는 하나, 무인 정부에 대한 반항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거사도 결국 무신 정권에 의해 진압되었다.
망이 망소이의 난
서북 지방에서 조위총의 난이 한창일 때, 남쪽에서는 남적(南賊)이라 불리는 민란이 일어났다. 남적 가운데 가장 기세를 떨친 것은 명종 6년 정월에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 망소이(亡伊, 亡所伊) 의 무리였다. 이들 무리는 산행 병마사(山行兵馬使)를 자칭하면서 공주를 함락할 정도로 규모와 세력이 대단하자, 정부는 무력에 의한 토벌을 중지하고 회유책을 써 명학소를 충순현(忠順懸)으로 승격시켜 선무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임시 방편으로 이들을 회유, 타협하고는 사태가 진전되자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억압, 공격하므로 이들은 7월 정월에 재차 봉기하였으며, 7월에 이르러서야 진압 되었다. 망이, 망소이 등의 봉기는 농민 반란의 성격을 지니면서도 천민 집단인 소민이 중심이 된 신분 해방 운동의 측면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전주 관노의 난
전주에서는 출신이 농민인 주현군(州縣軍)의 보승(保勝)·정용(精勇)과 관노(官奴)·승려가 합세하여 항쟁을 일으켰다. 새로 사록(司錄)으로 부임한 지방관이 형벌을 혹독하게 시행하였으며, 상호장(上戶長)과 사록(司錄)이 관선(官船)을 만드는 일을 가혹하게 감독한 것이 계기가 되어 폭발하였다. 하급장교들의 자휘아래 사록을 내쫓고 향리(鄕吏)들의 집을 불태웠으며, 판관(判官)을 위협해 향리를 바꿔 임명하게 하였다. 마침 도내를 순행하던 안찰사(按察使)가 전주에 도착하자 이들은 시위를 벌여 사록을 개경으로 압송케 하였다. 안찰사가 훈계를 했으나 계속 항쟁하자, 안찰사는 도내의 지방군을 동원, 진압하려 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고위 관직자를 보내 민란원인을 조사케 하면서, 반란군을 분열시켜 농민군 지휘관을 죽이고, 전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전주민란은 종지부를 찍었다.
김사미 효심의 항쟁
명종 20년 정월에 동경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은 명종 23년에 김사미에 인도되어 운문산으로 들어가 웅거하였다. 이들은 효심이 이끄는 초전의 항쟁군과 연합하여 공동전선을 구축하면서 경주 부근의 여러 고을을 공격하였다. 이들의 반란은 결국 정부군에 의해 평정되고 말았지만, 밀양 싸움에서 반란군 7천명이 죽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만적의 난
무신 정권의 수립기로 문신 귀족 중심의 지배체제가 붕괴되고, 신분 질서가 동요되자 천민들도 신분 해방을 내세우고 반란을 획책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개경에서 일어난 사노 만적의 난이다. 신종 원년 최충헌의 사노였던 만적은 공사 노비를 개경 뒷산인 송악산에 모아 놓고, “장상(將相)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을까 보냐.”“우리도 상전을 죽이고 천적을 불태워 삼한에 천인(賤人)을 없게 하면 공경장상(公卿將相)은 우리들이 모두 할 수 있다.”라고 하며 반란을 꾀하였으나, 밀고자가 있어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만적의 난은 신분 해방은 물론, 정권의 탈취까지를 노린 점은 당시 사회의 하극상의 풍조를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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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2.10
  • 저작시기2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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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85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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