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시대에 필요한 친일문학론 - 서론
2.세 가지 형식의 친일문학론
1)실증주의적 친일문학론
2)근대의 제도사적 친일문학론
3)운동론적 친일문학론
3.탈식민과 통일시대 한국인의 자기정체성
1)지역사의 모순 극복으로서의 친일문학논쟁
2)국가제도에 대한 설계와 기획
3)탈식민을 통한 통일시대 한국의 자기정체성
4.친일문학에 대한 한국인의 착각
5.친일문학론의 과제 - 결론
2.세 가지 형식의 친일문학론
1)실증주의적 친일문학론
2)근대의 제도사적 친일문학론
3)운동론적 친일문학론
3.탈식민과 통일시대 한국인의 자기정체성
1)지역사의 모순 극복으로서의 친일문학논쟁
2)국가제도에 대한 설계와 기획
3)탈식민을 통한 통일시대 한국의 자기정체성
4.친일문학에 대한 한국인의 착각
5.친일문학론의 과제 - 결론
본문내용
결정된 논리가 완벽하게 들어 있어서 과학의 실증이 들어설 틈이 없다. 실증주의라는 것도 그 자체는 실증주의이지만, 그 주제를 택한 것 자체가 이미 결정론적인 정신사적 강제인 것이다.
나는 과학을 한 것이 아니라 문학을 빙자한 계몽운동을 한 셈이다. 글이라는 것 자체가 지극히 민족적이고 인종적인 언어를 도구로 하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인이 한국어로 한국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주관적이고 계몽적이다. 이 필연의 운명을 피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이 점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무슨 부채(負債)인 것으로 나름대로 괴로워했던 것이다. 하여간 나는 한국문학의 정신사에 관계되는 것을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인 학자가 한국어로 쓴 작품을 연구한다는 점에 대해서 식민성(coloniality)을 재확인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이 가지기 쉬운 이 식민성의 잠재의식에서 보면 한국근대문학의 성립은 결국 전신자로서의 일본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라는 점으로 나가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는 참 고약하다. 이것을 치욕으로 간주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우기게 되는 순간, 문학이나 학문은 투쟁으로 돌변한다. 문학과 학문을 하면서 근대와 국가라는 이상한 주제의 혁명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지난 시절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혁명으로서의 문학과 혁명가다운 문인을 자처했다.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야 내가 무엇이라는 점을 설명할 수 있었으니까. 타자로부터 좀 감정적이라는 비판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니 그런 비판쯤은 아랑곳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이 점은 분명히 말하지만 착각이었다. 한국인 연구자이기 때문에 친일문학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연구의 독점을 전제하는 것이어서 옳지 않다. 친일문학과 친일문학논쟁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늘 친일문학이나 한일문학의 관련양상을 친일문학논쟁으로 치환시켜 인식한다. 친일문학의 실재는 변하지 않는 항수(恒數)이며 역사적 사실을 실증적이고 논리적으로 밝히는 일이다. 반면 친일문학논쟁은 친일문학이라는 역사의 거울을 통해서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의 주체를 형성하는 대타의식의 발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친일문학 연구를 한국인만이 해야 한다거나, 한국인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한국인들의 자기중심주의에 불과하다. 이것은 민족주의 의식의 정신사적 발현(發現)이다.
5.친일문학론의 과제 - 결론
친일문학론 또는 친일문학논쟁은 친일문학을 보는 눈에 따라서 달라진다. 예컨대 친일문학은 없고, 일본어로 쓰여진 언어예술작품만 있다고 한다면 친일문학론은 폐기되어야 하며 '일제시대의 이중언어 문학' 정도의 범주가 설정되어야 한다. 반면 친일문학을 논쟁적으로 인식하려는 실천운동가들에게, 친일문학은 극복해야 할 과거이며 지금까지 민족문학사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부정적인 것이므로 해체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 해체는 실증주의적으로 실체를 밝혀서, 그 과오를 역사의 하늘에 기록해 놓자는 아주 선명한 전략(戰略)을 가지고 있다. 그래야만 문학이 추구하는 문학적 진실과 역사적 진실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친일문학론의 궁극적인 과제는 식민성의 극복이다. 과거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이것은 우리 내면의 식민성을 해체하고 치유할 때만이 가능하다. 식민의 지배 구조가 내면적으로 온존하는 구조를 스스로 치유하고 극복할 때, 지배와 피지배라는 근대의 모순이 해결될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초두에 우리가 친일문학론을 논쟁의 정점에 올려 둔 것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담지하는 생산적 사유의 결과다. 한마디로 줄여서 끊임없는 받아쓰기와 반복의 패러다임 속에서 상실한 자기정체성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바로 2002년의 친일문학론이다. 따라서 언어 예술인 문학 속에 잠재된 억압의 구조를 근원에서 치유하려는 탈식민의 의지가 작동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21세기의 한국은 역사의 상처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단계에 이르렀다. 상처에 아파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단계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모순인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통일시대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앞에 놓아두고 있다. 이 점이 친일문학논쟁을 재점화한 역사의 잉걸불이었다. 이렇게 보면 친일문학이라는 실재가 있어서 그것을 실증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는 일은 언제나 유효하고 중요하다. 그와는 다르게 그 성과를 바탕으로 친일문학의 과거가 한국의 미래에 어떻게 작동되어야 하는가를 논의하는 친일문학논쟁이 있다. 시대적 콘텍스트(context)의 역학적 기능이다. 남한의 2002년 전후의 친일문학론은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통일시대를 열어가려는 한국의 새로운 정체성 확립의 과정에서 파생된 자기확인의 논쟁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탈근대보다 탈식민이 우선적인 과제임을 선포하는 자기선언이다. 거듭 말하지만 여기서의 탈식민은 제1세계가 이야기하는 이론으로서의 탈식민이 아니라 한국식의 탈식민이거니와 이에 대한 담론을 확정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으므로 탈식민의 전망이라고 우선 정의해 두고 싶다. 이것은 한국인 내면의 부끄러운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역사단계로 나가야 한다는 절박한 의지였던 것이다.
지금 남한 사람들은 중국인과 베트남인, 그리고 인도네시아인을 열등한 타자로 설정하는 경우가 있다. 과거 일본인이 조선인을 반개화의 열등한 타자로 설정해서 자기의식을 가졌던 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역사의 시간을 넘어선 베껴쓰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부당한 우월감을 생산하는 한편, 서구나 일본에 대한 자기식민화라는 이상한 형태의 식민성을 현대화시킨 것이다. 지배자들에 대한 단절의 시도는 반복의 결과로 드러난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 타자를 설정해서 자신의 상처를 대타적으로 인식하여 객관화시키려는 이 전략은 사실 유치하다. 필요한 것이기는 해도 한국인 내면의 식민성을 스스로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선택한 이 방식은 머지않아 식민성의 강화라는 이상한 형식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끝-
나는 과학을 한 것이 아니라 문학을 빙자한 계몽운동을 한 셈이다. 글이라는 것 자체가 지극히 민족적이고 인종적인 언어를 도구로 하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인이 한국어로 한국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주관적이고 계몽적이다. 이 필연의 운명을 피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이 점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무슨 부채(負債)인 것으로 나름대로 괴로워했던 것이다. 하여간 나는 한국문학의 정신사에 관계되는 것을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인 학자가 한국어로 쓴 작품을 연구한다는 점에 대해서 식민성(coloniality)을 재확인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이 가지기 쉬운 이 식민성의 잠재의식에서 보면 한국근대문학의 성립은 결국 전신자로서의 일본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라는 점으로 나가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는 참 고약하다. 이것을 치욕으로 간주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우기게 되는 순간, 문학이나 학문은 투쟁으로 돌변한다. 문학과 학문을 하면서 근대와 국가라는 이상한 주제의 혁명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지난 시절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혁명으로서의 문학과 혁명가다운 문인을 자처했다.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야 내가 무엇이라는 점을 설명할 수 있었으니까. 타자로부터 좀 감정적이라는 비판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니 그런 비판쯤은 아랑곳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이 점은 분명히 말하지만 착각이었다. 한국인 연구자이기 때문에 친일문학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연구의 독점을 전제하는 것이어서 옳지 않다. 친일문학과 친일문학논쟁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늘 친일문학이나 한일문학의 관련양상을 친일문학논쟁으로 치환시켜 인식한다. 친일문학의 실재는 변하지 않는 항수(恒數)이며 역사적 사실을 실증적이고 논리적으로 밝히는 일이다. 반면 친일문학논쟁은 친일문학이라는 역사의 거울을 통해서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의 주체를 형성하는 대타의식의 발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친일문학 연구를 한국인만이 해야 한다거나, 한국인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한국인들의 자기중심주의에 불과하다. 이것은 민족주의 의식의 정신사적 발현(發現)이다.
5.친일문학론의 과제 - 결론
친일문학론 또는 친일문학논쟁은 친일문학을 보는 눈에 따라서 달라진다. 예컨대 친일문학은 없고, 일본어로 쓰여진 언어예술작품만 있다고 한다면 친일문학론은 폐기되어야 하며 '일제시대의 이중언어 문학' 정도의 범주가 설정되어야 한다. 반면 친일문학을 논쟁적으로 인식하려는 실천운동가들에게, 친일문학은 극복해야 할 과거이며 지금까지 민족문학사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부정적인 것이므로 해체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 해체는 실증주의적으로 실체를 밝혀서, 그 과오를 역사의 하늘에 기록해 놓자는 아주 선명한 전략(戰略)을 가지고 있다. 그래야만 문학이 추구하는 문학적 진실과 역사적 진실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친일문학론의 궁극적인 과제는 식민성의 극복이다. 과거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이것은 우리 내면의 식민성을 해체하고 치유할 때만이 가능하다. 식민의 지배 구조가 내면적으로 온존하는 구조를 스스로 치유하고 극복할 때, 지배와 피지배라는 근대의 모순이 해결될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초두에 우리가 친일문학론을 논쟁의 정점에 올려 둔 것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담지하는 생산적 사유의 결과다. 한마디로 줄여서 끊임없는 받아쓰기와 반복의 패러다임 속에서 상실한 자기정체성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바로 2002년의 친일문학론이다. 따라서 언어 예술인 문학 속에 잠재된 억압의 구조를 근원에서 치유하려는 탈식민의 의지가 작동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21세기의 한국은 역사의 상처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단계에 이르렀다. 상처에 아파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단계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모순인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통일시대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앞에 놓아두고 있다. 이 점이 친일문학논쟁을 재점화한 역사의 잉걸불이었다. 이렇게 보면 친일문학이라는 실재가 있어서 그것을 실증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는 일은 언제나 유효하고 중요하다. 그와는 다르게 그 성과를 바탕으로 친일문학의 과거가 한국의 미래에 어떻게 작동되어야 하는가를 논의하는 친일문학논쟁이 있다. 시대적 콘텍스트(context)의 역학적 기능이다. 남한의 2002년 전후의 친일문학론은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통일시대를 열어가려는 한국의 새로운 정체성 확립의 과정에서 파생된 자기확인의 논쟁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탈근대보다 탈식민이 우선적인 과제임을 선포하는 자기선언이다. 거듭 말하지만 여기서의 탈식민은 제1세계가 이야기하는 이론으로서의 탈식민이 아니라 한국식의 탈식민이거니와 이에 대한 담론을 확정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으므로 탈식민의 전망이라고 우선 정의해 두고 싶다. 이것은 한국인 내면의 부끄러운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역사단계로 나가야 한다는 절박한 의지였던 것이다.
지금 남한 사람들은 중국인과 베트남인, 그리고 인도네시아인을 열등한 타자로 설정하는 경우가 있다. 과거 일본인이 조선인을 반개화의 열등한 타자로 설정해서 자기의식을 가졌던 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역사의 시간을 넘어선 베껴쓰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부당한 우월감을 생산하는 한편, 서구나 일본에 대한 자기식민화라는 이상한 형태의 식민성을 현대화시킨 것이다. 지배자들에 대한 단절의 시도는 반복의 결과로 드러난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 타자를 설정해서 자신의 상처를 대타적으로 인식하여 객관화시키려는 이 전략은 사실 유치하다. 필요한 것이기는 해도 한국인 내면의 식민성을 스스로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선택한 이 방식은 머지않아 식민성의 강화라는 이상한 형식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