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1. 이광수의 ‘ 민족개조론’
(1) 민족주의의 원심력과 민족 절대주의의 오류
(2) ‘민족개조론’의 내용구성
(3)사회 사상적 측면과 민족문제에 대한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본 ‘ 민족개조론’
2.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1) ‘ 조선혁명선언’의 배경
(2) ‘ 조선혁명선언’의 내용
(3) 무력적민중혁명론
(4)‘ 조선혁명선언’의 의의
3. ‘ 민족개조론’과 ‘조선혁명선언’의 비교
결론
본론
1. 이광수의 ‘ 민족개조론’
(1) 민족주의의 원심력과 민족 절대주의의 오류
(2) ‘민족개조론’의 내용구성
(3)사회 사상적 측면과 민족문제에 대한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본 ‘ 민족개조론’
2.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1) ‘ 조선혁명선언’의 배경
(2) ‘ 조선혁명선언’의 내용
(3) 무력적민중혁명론
(4)‘ 조선혁명선언’의 의의
3. ‘ 민족개조론’과 ‘조선혁명선언’의 비교
결론
본문내용
면서, 그것은 한마디로 '무실역행'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민족 쇠퇴의 책임은 치자(治者)계급, 즉 국왕과 양반에게 있다면서, "치자계급인 그네에게도 자유, 평등, 사회성, 진취성이 있었다 하면 결코 조선민족을 이렇게 못되게 만들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치자계급만이 아니라 조선민중도 앞서 본 것처럼 일반적으로 허위, 나타, 비사회성, 겁나 (怯懦)등을 민족성으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같은 민족성을 개조하기 위한 개조주의로서 1)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 2) 공상과 공론을 버릴 것, 3) 의리와 약속, 신의를 지킬 것, 4) 고식(姑息), 준순(浚巡) 등 겁나(怯懦)를 버릴 것, 5) 개인보다 단체를, 즉 사보다 공을 중히 여겨 사회에 대한 봉사를 생명으로 알 것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민족개조의 강조는 개인보다는 민족을 강조하는 경향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에 신채호는 이광수의 강렬히 민족개조를 비판하였고 민족독립운동의 주도적 담당 세력으로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 실천방법도 임정의 독립노선인 외교론·준비론이 아니라 암살·파괴·폭동 등 폭력에 의한 독립투쟁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그가 임정에 적을 두었다가 탈퇴한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그 도안 자기 자신이 체험하고 구상해 온 민족 독립의 방략을 논리적 체계로 밝혀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며, 그는 마침 의열단의 요청으로 이 선언을 기초하면서 무력적민중혁명론의 노선을 구체화 한 것이다.
그가 민족독립운동의 방안과 담당계층으로 각기 '민중' 과 '혁명' 개념을 도입한 것은, 1920년대 민족운동의 새로운 단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이 새로운 전환점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즉 3·1운동 이후에 대두된 노동운동·농민운동은 때마침 유입되기 시작한 사회주의·무정부주의 등의 영향뿐 아니라 경제적 민족주의에 눈뜬 민중의 자발적 역량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신채호는 이들 민중세력에 크게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민중을 토대로 한 혁명의 성취를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자각시키는 일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된다.
신채호가 초기에 입론한 민족자강사상에서 민중적 혁명 사상으로의 변환은, 당시의 시대적 정세 변화를 예리하게 반영한 결과이었으며 사실 신채호가 이 선언에서 격렬한 어조로 주장한 것은 일제 이족통치의 타파였으며, 또 그 제국주의적 속성의 부정을 통해, 고유적 조선·자유적 조선민중·민중적 경제·민중적 사회·민중적 문화가 실현된 조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우리 민족의 이상적 미래를 설계하고자 함이었다.
결론
이상과 같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조선의 민족운동과 관련되며 그 내용성격에 있어서 지향하는 바를 달리 하지만 민족의 독립을 위한 방안으로서 우리 민족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의 방향을 제시해줌에 의의가 있다. 또한 이 두 논설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그 시대상황과 당대 지식인들의 사상과 동향 등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조선민족 쇠퇴의 책임은 치자(治者)계급, 즉 국왕과 양반에게 있다면서, "치자계급인 그네에게도 자유, 평등, 사회성, 진취성이 있었다 하면 결코 조선민족을 이렇게 못되게 만들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치자계급만이 아니라 조선민중도 앞서 본 것처럼 일반적으로 허위, 나타, 비사회성, 겁나 (怯懦)등을 민족성으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같은 민족성을 개조하기 위한 개조주의로서 1)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 2) 공상과 공론을 버릴 것, 3) 의리와 약속, 신의를 지킬 것, 4) 고식(姑息), 준순(浚巡) 등 겁나(怯懦)를 버릴 것, 5) 개인보다 단체를, 즉 사보다 공을 중히 여겨 사회에 대한 봉사를 생명으로 알 것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민족개조의 강조는 개인보다는 민족을 강조하는 경향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에 신채호는 이광수의 강렬히 민족개조를 비판하였고 민족독립운동의 주도적 담당 세력으로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 실천방법도 임정의 독립노선인 외교론·준비론이 아니라 암살·파괴·폭동 등 폭력에 의한 독립투쟁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그가 임정에 적을 두었다가 탈퇴한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그 도안 자기 자신이 체험하고 구상해 온 민족 독립의 방략을 논리적 체계로 밝혀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며, 그는 마침 의열단의 요청으로 이 선언을 기초하면서 무력적민중혁명론의 노선을 구체화 한 것이다.
그가 민족독립운동의 방안과 담당계층으로 각기 '민중' 과 '혁명' 개념을 도입한 것은, 1920년대 민족운동의 새로운 단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이 새로운 전환점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즉 3·1운동 이후에 대두된 노동운동·농민운동은 때마침 유입되기 시작한 사회주의·무정부주의 등의 영향뿐 아니라 경제적 민족주의에 눈뜬 민중의 자발적 역량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신채호는 이들 민중세력에 크게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민중을 토대로 한 혁명의 성취를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자각시키는 일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된다.
신채호가 초기에 입론한 민족자강사상에서 민중적 혁명 사상으로의 변환은, 당시의 시대적 정세 변화를 예리하게 반영한 결과이었으며 사실 신채호가 이 선언에서 격렬한 어조로 주장한 것은 일제 이족통치의 타파였으며, 또 그 제국주의적 속성의 부정을 통해, 고유적 조선·자유적 조선민중·민중적 경제·민중적 사회·민중적 문화가 실현된 조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우리 민족의 이상적 미래를 설계하고자 함이었다.
결론
이상과 같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조선의 민족운동과 관련되며 그 내용성격에 있어서 지향하는 바를 달리 하지만 민족의 독립을 위한 방안으로서 우리 민족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의 방향을 제시해줌에 의의가 있다. 또한 이 두 논설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그 시대상황과 당대 지식인들의 사상과 동향 등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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