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시대 민족해방운동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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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식민의 전사(前史)

2. 식민지하 각 사회세력의 동향

본문내용

주로 돌아갔고, 홍범도·이청천 등의 독립군 일부는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적군 제5군단 예하의 1개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한편 박일리아파에 가담했던 독립군은 박일리아파와 함께 연해주로 가서 한인의용군사회(韓人義勇軍士會)를 만들고 이 지역을 침략한 일본군대에 맞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22년 10월 이후 소련은 극동에서 백군을 완전히 제압하게 되었고, 일본군도 연해주에서 철병하였다. 이에 여기에 남아 있던 독립군의 경우 이제는 무장활동의 목표가 완전히 없어진 셈이었다. 이 중 홍범도를 비롯한 일부 독립군들은 소련에 남아 볼셰비키당에 협조하면서 한인사회를 이끌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기 만주로 돌아와 재기를 모색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토벌(1920년)과 자유시사변(1921년)을 겪고 나서 다시 만주지역으로 돌아온 민족주의자들은 조직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토벌과 자유시사변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독립군이 흩어졌고, 일본군의 무자비한 초토화작전으로 독립운동조직들은 물론 한인사회 전반이 황폐화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은 극히 어려운 것이었다. 북로군정서의 총재였던 서일이 만주로 돌아와 재기를 모색하다가 1922년 10월 자살해버린 일은 이와 같은 당시 독립운동계의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 각지에서 이전의 조직들이 복구되거나 재정비되었고, 1922년부터는 이들 단체간에 새로운 통합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독립운동단체들 간의 통합운동은 운동단체들이 분열·분산되어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던 과거운동에 대한 비판 속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구책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통합운동의 결과로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가 만들어지고, 이후 만주 민족주의운동은 이 3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한편 1920년대 중반이 되면서 만주 지역 독립 운동가들 중 일부는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조선의 해방을 시도하였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가 양립하는 중, 마침 중국에서는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여기에 영향을 받아 만주지역에서도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세력을 아우르는 민족유일당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국내에서는 신간회)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하게 된다. 민족유일당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민족주의자들은 3부의 통합을 시도하고 마침내 1929년 4월 길림에서 새로이 국민부라는 군정부를 수립하였다. 1929년 12월에는 이를 개편하여 조선혁명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1930년 8월 조선혁명당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국민부를 지지·육성하자는 쪽과 이를 반대하는 쪽의 대립이었다. 양자는 유혈사태를 일으키는 등 극심한 상쟁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분열속에서도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梁世奉)을 비롯한 일부 독립군들은 만주사변 이후에도 중국국민군과 함께 활동하였다. 양세봉은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 직후 평안북도 삭주군에 있는 천마산(天摩山)을 근거로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천마산대 독립군에 입대해 일제의 통치기관 파괴, 친일파 숙청 활동을 하였다. 1920년 만주로 건너간 후 1923년 참의부가 결성되자 소대장으로 활발한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였으며, 뒤에는 제3중대장으로 승진하였다. 1929년 재만 각 단체가 통합하여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할 때 참여하였으며, 국민부가 소속 독립군으로 조선혁명군을 편성하자 제1중대장이 되었다. 1931년 신빈현(新賓縣)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주요 간부 다수가 붙잡히는 신빈사건 이후 조선혁명군을 개편하여 총사령이 되었다. 1932년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석권하자, 재만 중국군과의 연합작전을 펼치기로 하고 중국의용군 총사령관 이춘윤(李春潤)과 협의하여 한중연합군을 편성하였다. 이 해 3월 한중연합군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영릉가성(永陵街城)을 공격하여 탈환하였고, 1933년 흥경(興京)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이와 같이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한편, 전투에서 소모되는 혁명군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혁명군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서 직접 군대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뒤 흥경성전투·노구대전투(老溝臺戰鬪)·쾌대모자전투(快大帽子戰鬪)에 참전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1934년 9월, 전부터 잘 알고 있던 일본 경찰 밀정인 박창해(朴昌海)의 계략에 빠져 대원 여러 명과 같이 환인현 소황구(小荒溝)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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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15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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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20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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