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정치권력
가. 정권형성과정
나. 정치체제
1) 북한
(1) 체제
2) 남한
(1) 체제
(2) 체제의 성격 변화
다. 정치방식
1) 북한
2) 남한
(1) 선거제도
(2) 당선자 결정방식
2. 권력구조
1) 북한
(1) 권력체제
(2) 노동당의 정치적 위상
(3) 정권체제
2) 남한
(1) 권력체제
(2) 정권체제
3. 외교정책
1) 북한
(1) 북한의 외교 목표와 원칙
(2) 북한 외교활동의 특징
(3) 북한 외교 정책의 변천 과정
2) 남한
(1) 외교정책 목표
(2) 외교정책의 변천과정
4. 대립체제로서의 남북한 정치체제
가. 정권형성과정
나. 정치체제
1) 북한
(1) 체제
2) 남한
(1) 체제
(2) 체제의 성격 변화
다. 정치방식
1) 북한
2) 남한
(1) 선거제도
(2) 당선자 결정방식
2. 권력구조
1) 북한
(1) 권력체제
(2) 노동당의 정치적 위상
(3) 정권체제
2) 남한
(1) 권력체제
(2) 정권체제
3. 외교정책
1) 북한
(1) 북한의 외교 목표와 원칙
(2) 북한 외교활동의 특징
(3) 북한 외교 정책의 변천 과정
2) 남한
(1) 외교정책 목표
(2) 외교정책의 변천과정
4. 대립체제로서의 남북한 정치체제
본문내용
표는 “국가이익”이며, 그렇기에 그 범주, 정의, 우선순위 등을 확인하고, 또한 그것에 따른 적절한 전략과 행동방침 등을 정해야 할것이다.
(2) 외교정책 변화 과정
[제1 공화국] 시절 -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이후 미국의 영향력의 보호 하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지 때문데 사실상 자주성은 없었다. 게다가 경제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종송된 사실상 미국에 종속된 상태였다.
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내세우긴 했지만 친미편향적이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무조건적인 감정적 반일정책과 나라를 위해 일할만한 이재의 부족 및 이승만 대통령중심의 권위주의적 상황도 외교에 있어 악영향으로 작용하였다.
즉, 조직과 사회구조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내정치권력과 국제정세를 중심으로 외교정책등이 수립되어 이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경제적 안보적 자립이 불가능한 상황과 정치지도자들의 권위주의 때문에 국내정치권력과 국제정세의 상황이 강조되어진 시대였다.
[제2 공화국] 시절 - 이때는 [비동맹국가들] & [제3세계 국가들] 등의 개념이 국제정치적으로 생겨난 시절이었다.
또한, [4.19]에 의한 탄생의 배경 때문에 [민주외교], [비동맹관계 정상화], 외교적 합리성(일방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서는 안된다는 개념) 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다시금 미국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하기도 하였다. 특히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시장은 필수적으로 필요하였다. 결국, 이 정권은 단명으로 끝이 남으로서 분석할만한 것이 거의 없다.
[제3 & 제4 공화국 시절] - 국민을 속여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베트남 파병, 화폐개혁, 일본으로부터 경제적인 긴급수혈을 받기위한 한일 국교 정상화 등을 실시하였다. 지금 관점에서는 비난받아야 하나, 이것은 당시로서는 "현실주의에 바탕한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적성국가와 수교를 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90년대 초반의 북방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또, 국내시장의 좁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수출 지향적 경제건설이 시작되었다.
또 건설 & 중공업에 있어서의 말 그대로 '군인정신'에 바탕한 투자와 군 병력의 건설 및 여타 중요 작업 투입 등도 그 결과를 돌아보면 비판만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수는 결국 "독재"를 낳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전체주의적인 국가 형태"가 나왔었다는 점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유신체제]
외교적으로는 미국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자주국방 등으로 국내정치권력이 좀 줄기는 시작하였지만, 대신 국제정세가 엄청나게 적용된 셈이었다.
[제 5 공화국 시절] - 정통성의 부족 등으로 외치에 의하여 내치를 보완하려 하였고, 또한 삼청교육대 등을 동원하는 등의 사회적 탄압이 실시되어졌다.
그리고 선정용으로써 경제력 및 국방력향상을 과시하기 위해 통일방안 작성과 발표가 많이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이 당시에 대통령이 직접 외교사항을 들고서 다른 나라들, 특히 유럽 여러 나라들을 방문하는 등의 행위를 "무대뽀로"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초청도 안했는데 옴으로서" 실제로는 "망신만 당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최소한 망신은 당하지 않기 위하여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남남협력(남한 & 남반구 국가들의 협력)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여하튼, 비정상적이기는 하였지만, 작은 나라들끼리 뭉쳐서 힘을 키우는 것을 시도하였다는 점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만도 하다.
[제 6 공화국 시절 ] - 제5 공화국 당시에 활성화되었던 사회세력의 성장이 뚜렷하였고, 북방외교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북방외교는 국내정치권력의 영향이 지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는 러시아 와 한국 외교 마찰의 원인이 되었던 셈이다.
게다가, 사회부문과 여론의 영향이 폭발적으로 증대하였다. 즉, 국민의사에 대한 존중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체적으로는 국내정치세력과 사회부문과여론, 국제정세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외교다운 외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4. 대립체제로서의 남북한 정치체제
남북한의 정치체제는 여러 면에서 대립적인 이념을 기반으로 성립되어있다. 물론 그 이유는 일본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이 민족자결 노력이 아닌 강대국의 ‘전리품’ 형식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식민통치가 막 끝난 북한에서 점령군인 소련군에 의한 소비에트화는 거역할 수 없는 선택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점령된 나라들에서 정책을 집행했던 소련의 군인들이나 외교관들은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을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이를 가능한 빨리 실현하는 것을 인류번영을 실현하는 지름길로 보았다는 점이다. 둘째로, 여러 점령 지역에서 소련 점령군의 주요한 지지세력은 소련을 최고의 이상국가로, 그리고 소련의 제반 이념과 통치방식을 무조건 모범적이고 완벽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지역 공산주의자들이었는데 북한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남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남북한 모두 해방초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반체제 세력(예컨대 북한의 경우, 지주 및 자본가 출신들 종교인, 남한의 경우 남로당 세력을 비롯한 친공성향의 정치인, 예술인들)이 대거 월남월북하면서 체제의 순결성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남북한이 보다 완벽한 대립체제로 고정화된 계기는 북한에 의해서 도발된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미국을 제국주의로, 그리고 남한을 그의 식민지로 보는 적대사관을 탄생시켰으며 그후 그것을 무단히 확대 재생산해 왔다. 남한 역시 한국전쟁을 통해 실제화된 안보위기가 반공이념을 보편화시키고 이러한 반공 이데올로기는 국민의 일체감을 조성시키고 체제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수렴하는 강력한 정치적 수단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기반 위에서 남북한은 1970년대 초반 <세습체제>와 <유신체제>를 출범시키고 안정적인 한반도의 양분화에 전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 끊임없는 군비경쟁으로 인해 북한이 먼저 붕괴위기를 맞았고 남한 역시 IMF체제라는 경제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2) 외교정책 변화 과정
[제1 공화국] 시절 -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이후 미국의 영향력의 보호 하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지 때문데 사실상 자주성은 없었다. 게다가 경제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종송된 사실상 미국에 종속된 상태였다.
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내세우긴 했지만 친미편향적이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무조건적인 감정적 반일정책과 나라를 위해 일할만한 이재의 부족 및 이승만 대통령중심의 권위주의적 상황도 외교에 있어 악영향으로 작용하였다.
즉, 조직과 사회구조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내정치권력과 국제정세를 중심으로 외교정책등이 수립되어 이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경제적 안보적 자립이 불가능한 상황과 정치지도자들의 권위주의 때문에 국내정치권력과 국제정세의 상황이 강조되어진 시대였다.
[제2 공화국] 시절 - 이때는 [비동맹국가들] & [제3세계 국가들] 등의 개념이 국제정치적으로 생겨난 시절이었다.
또한, [4.19]에 의한 탄생의 배경 때문에 [민주외교], [비동맹관계 정상화], 외교적 합리성(일방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서는 안된다는 개념) 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다시금 미국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하기도 하였다. 특히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시장은 필수적으로 필요하였다. 결국, 이 정권은 단명으로 끝이 남으로서 분석할만한 것이 거의 없다.
[제3 & 제4 공화국 시절] - 국민을 속여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베트남 파병, 화폐개혁, 일본으로부터 경제적인 긴급수혈을 받기위한 한일 국교 정상화 등을 실시하였다. 지금 관점에서는 비난받아야 하나, 이것은 당시로서는 "현실주의에 바탕한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적성국가와 수교를 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90년대 초반의 북방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또, 국내시장의 좁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수출 지향적 경제건설이 시작되었다.
또 건설 & 중공업에 있어서의 말 그대로 '군인정신'에 바탕한 투자와 군 병력의 건설 및 여타 중요 작업 투입 등도 그 결과를 돌아보면 비판만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수는 결국 "독재"를 낳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전체주의적인 국가 형태"가 나왔었다는 점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유신체제]
외교적으로는 미국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자주국방 등으로 국내정치권력이 좀 줄기는 시작하였지만, 대신 국제정세가 엄청나게 적용된 셈이었다.
[제 5 공화국 시절] - 정통성의 부족 등으로 외치에 의하여 내치를 보완하려 하였고, 또한 삼청교육대 등을 동원하는 등의 사회적 탄압이 실시되어졌다.
그리고 선정용으로써 경제력 및 국방력향상을 과시하기 위해 통일방안 작성과 발표가 많이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이 당시에 대통령이 직접 외교사항을 들고서 다른 나라들, 특히 유럽 여러 나라들을 방문하는 등의 행위를 "무대뽀로"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초청도 안했는데 옴으로서" 실제로는 "망신만 당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최소한 망신은 당하지 않기 위하여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남남협력(남한 & 남반구 국가들의 협력)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여하튼, 비정상적이기는 하였지만, 작은 나라들끼리 뭉쳐서 힘을 키우는 것을 시도하였다는 점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만도 하다.
[제 6 공화국 시절 ] - 제5 공화국 당시에 활성화되었던 사회세력의 성장이 뚜렷하였고, 북방외교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북방외교는 국내정치권력의 영향이 지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는 러시아 와 한국 외교 마찰의 원인이 되었던 셈이다.
게다가, 사회부문과 여론의 영향이 폭발적으로 증대하였다. 즉, 국민의사에 대한 존중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체적으로는 국내정치세력과 사회부문과여론, 국제정세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외교다운 외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4. 대립체제로서의 남북한 정치체제
남북한의 정치체제는 여러 면에서 대립적인 이념을 기반으로 성립되어있다. 물론 그 이유는 일본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이 민족자결 노력이 아닌 강대국의 ‘전리품’ 형식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식민통치가 막 끝난 북한에서 점령군인 소련군에 의한 소비에트화는 거역할 수 없는 선택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점령된 나라들에서 정책을 집행했던 소련의 군인들이나 외교관들은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을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이를 가능한 빨리 실현하는 것을 인류번영을 실현하는 지름길로 보았다는 점이다. 둘째로, 여러 점령 지역에서 소련 점령군의 주요한 지지세력은 소련을 최고의 이상국가로, 그리고 소련의 제반 이념과 통치방식을 무조건 모범적이고 완벽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지역 공산주의자들이었는데 북한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남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남북한 모두 해방초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반체제 세력(예컨대 북한의 경우, 지주 및 자본가 출신들 종교인, 남한의 경우 남로당 세력을 비롯한 친공성향의 정치인, 예술인들)이 대거 월남월북하면서 체제의 순결성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남북한이 보다 완벽한 대립체제로 고정화된 계기는 북한에 의해서 도발된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미국을 제국주의로, 그리고 남한을 그의 식민지로 보는 적대사관을 탄생시켰으며 그후 그것을 무단히 확대 재생산해 왔다. 남한 역시 한국전쟁을 통해 실제화된 안보위기가 반공이념을 보편화시키고 이러한 반공 이데올로기는 국민의 일체감을 조성시키고 체제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수렴하는 강력한 정치적 수단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기반 위에서 남북한은 1970년대 초반 <세습체제>와 <유신체제>를 출범시키고 안정적인 한반도의 양분화에 전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 끊임없는 군비경쟁으로 인해 북한이 먼저 붕괴위기를 맞았고 남한 역시 IMF체제라는 경제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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