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있는 하느님의 만남이다. 환상을 볼 때에도, 예언자의 주체성은 사라져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 사건의 충격을 받아 더욱 강해진다. 그와 함께 예언자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게 아니라, 깨달음이 주어진다. 예언자는 계시를 받기 위하여 무슨 의식을 행하지 않는다. 계시는 예언자의 의지에 반하여 발생한다.
예언자는 자신의 개인적 구원에 관심하지 않고, 그의 경험의 배경에는 백성의 삶이 있다.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구원만을 강조하고 또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선포를 하는 경우가 있음을 본다. 그러나 사역자는 백성들과 하느님 사이에서 자신을 희생하며-그것이 비록 자신의 뜻과 반하여도- 서 있어야 한다.
예언자들은 예언의 행위가 아니라 말씀을 더욱 본질적인 것으로 여긴다. 예언자들이 이해한바 가장 중요한 원리는 하느님이 예언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려고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인격을 조금도 상실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예언자의 스스로 의식하는 살아 있는 “나”가 영감을 주는 살아 있는 하느님의 “나”와 만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역사는 한정될 수 없지만 오늘날 행하여지는 소위 성령운동에서의 예언은 심히 문제가 많다. 모든 초점이 예언의 행위와 예언자라는 사람에게 있다. 예언자를 통해 주어지는 하느님의 말씀이 무시되고 있다. 솔직히 그런 자들을 통해 과연 말씀하실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무아경 이론과 검토
본서에서는 예언이 시적 상상의 일부라고 한다. 시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시문학은 성경에서 그 문학적 능력의 비밀을 캐어보려고 했고, 성경의 단어 선택과 표현의 형태 등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시는 시인의 영감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의 작업 자체를 평가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반면, 예언자에게는 영감 자체가 예언의 본질이며 그의 정체와 그의 일을 정당화시킨다. 소위 예언하는 자들의 행동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언의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 예언의 성취를 보아 진정한 예언을 알 수 있다.
예언과 정신이상
원인을 결과로 봄으로 예언자를 마치 정신병자로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비록 예언자들의 행위기 노이로제의 증상을 보인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그 증상이 그들의 경험의 원인인지 아니면 결과인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위대한 예언자들의 경험과 태도를, 우리의 경험의 폭 안에서 우리 자신의 태도나 개념 따위에 맞추어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그리고 예언은 현실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자신이 인식한 내용을 그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
예언자의 영감에 대한 해석들
예언자는 그의 경험의 근거를 “확신”의 근거로 삼는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타당성과 특이성은 그의 경험의 순간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 “기원”에 있다. 예언은 인격적 사건이다. 그것은 단순히 말씀을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만남에 참여하는 분의 신성한 인격에 의하여 발생하는 사건이다. 예언자는 단순히 그것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것을 대면한다. 그것이 예언 행위임을 결정지어 주는 표시는 그것의 초월적인 성격에 있다. 예언자가 맑은 의식을 가지고 예언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의식 너머에서 발생하는 행위, 초월적인 행위, 하느님의 무아경 덕분이다.
예언자가 주제로 삼은 것은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결코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 않는다. 말씀만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당신의 정념만을, 당신의 의지만을 알려주신다. 성경이 보여주는 인류의 전역사는 사람을 찾는 하느님의 역사이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발견하였다. 성경은 인간에게 접근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기에 예언자의 향인간성이 표현되는 곳은 역사다. 역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감정은 하느님에 대한 동정, 인간에 대한 동정이며 그 경건한 노정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진행한다.
세계 도처의 예언자들
예언자가 보는 계시는 신의 정념에서 발단되어 나름의 기질(에토스)틀 품고 선과 악의 술어로 판단되는 인간의 행실에 스스로 관계 맺는다. 그러나 점치는 기술은 점쟁이가 신에게 직접 영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지향이 없다. 점쟁이는 인간의 물음에 대한 신의 힘을 얻고자 한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질문에 대한 인간의 답을 찾는다. 마리의 예언자들은 사람들의 전체 실존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 때문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어떤 특수한 명령이 아니라 백성의 전체 삶에 연관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언자는 신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여 말한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독특하다. 그들이 일반 사람과 다른 점은 인간의 상황을 신의 비상 상태로 감지한 것 이었다.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정념에 민감했던 것처럼 오늘날 말씀을 들고 매주 강단에 서는 사역자들도 하느님의 정념에 민감해야 한다.
예언자의 기본 의식에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관심”이 있다. 예언의 궁극적인 목적 역시 그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언의 내용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인간의 관련이다. 이것은 사역자들의 말씀 사역도 하나님의 “간섭, 돌봄, 관심”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성경의 예언자들을 살펴봄으로 오늘날 선지자는 아니지만 선지자적 사명을 갖고 강단에 서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요청한다. 오늘의 상황을 선지자의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성취는 그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예언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그 의미를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작성 선언이 아니며 하나님의 섭리 선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이 예언의 포커스다.
본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돌이키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을 참으시는 하나님은 결국 언약을 성실히 지키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언약의 중보자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죄를 용서하시길 기뻐하신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는가? 이에 선지자적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예언자는 자신의 개인적 구원에 관심하지 않고, 그의 경험의 배경에는 백성의 삶이 있다.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구원만을 강조하고 또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선포를 하는 경우가 있음을 본다. 그러나 사역자는 백성들과 하느님 사이에서 자신을 희생하며-그것이 비록 자신의 뜻과 반하여도- 서 있어야 한다.
예언자들은 예언의 행위가 아니라 말씀을 더욱 본질적인 것으로 여긴다. 예언자들이 이해한바 가장 중요한 원리는 하느님이 예언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려고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인격을 조금도 상실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예언자의 스스로 의식하는 살아 있는 “나”가 영감을 주는 살아 있는 하느님의 “나”와 만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역사는 한정될 수 없지만 오늘날 행하여지는 소위 성령운동에서의 예언은 심히 문제가 많다. 모든 초점이 예언의 행위와 예언자라는 사람에게 있다. 예언자를 통해 주어지는 하느님의 말씀이 무시되고 있다. 솔직히 그런 자들을 통해 과연 말씀하실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무아경 이론과 검토
본서에서는 예언이 시적 상상의 일부라고 한다. 시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시문학은 성경에서 그 문학적 능력의 비밀을 캐어보려고 했고, 성경의 단어 선택과 표현의 형태 등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시는 시인의 영감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의 작업 자체를 평가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반면, 예언자에게는 영감 자체가 예언의 본질이며 그의 정체와 그의 일을 정당화시킨다. 소위 예언하는 자들의 행동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언의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 예언의 성취를 보아 진정한 예언을 알 수 있다.
예언과 정신이상
원인을 결과로 봄으로 예언자를 마치 정신병자로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비록 예언자들의 행위기 노이로제의 증상을 보인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그 증상이 그들의 경험의 원인인지 아니면 결과인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위대한 예언자들의 경험과 태도를, 우리의 경험의 폭 안에서 우리 자신의 태도나 개념 따위에 맞추어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그리고 예언은 현실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자신이 인식한 내용을 그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
예언자의 영감에 대한 해석들
예언자는 그의 경험의 근거를 “확신”의 근거로 삼는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타당성과 특이성은 그의 경험의 순간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 “기원”에 있다. 예언은 인격적 사건이다. 그것은 단순히 말씀을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만남에 참여하는 분의 신성한 인격에 의하여 발생하는 사건이다. 예언자는 단순히 그것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것을 대면한다. 그것이 예언 행위임을 결정지어 주는 표시는 그것의 초월적인 성격에 있다. 예언자가 맑은 의식을 가지고 예언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의식 너머에서 발생하는 행위, 초월적인 행위, 하느님의 무아경 덕분이다.
예언자가 주제로 삼은 것은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결코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 않는다. 말씀만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당신의 정념만을, 당신의 의지만을 알려주신다. 성경이 보여주는 인류의 전역사는 사람을 찾는 하느님의 역사이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발견하였다. 성경은 인간에게 접근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기에 예언자의 향인간성이 표현되는 곳은 역사다. 역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감정은 하느님에 대한 동정, 인간에 대한 동정이며 그 경건한 노정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진행한다.
세계 도처의 예언자들
예언자가 보는 계시는 신의 정념에서 발단되어 나름의 기질(에토스)틀 품고 선과 악의 술어로 판단되는 인간의 행실에 스스로 관계 맺는다. 그러나 점치는 기술은 점쟁이가 신에게 직접 영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지향이 없다. 점쟁이는 인간의 물음에 대한 신의 힘을 얻고자 한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질문에 대한 인간의 답을 찾는다. 마리의 예언자들은 사람들의 전체 실존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 때문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어떤 특수한 명령이 아니라 백성의 전체 삶에 연관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언자는 신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여 말한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독특하다. 그들이 일반 사람과 다른 점은 인간의 상황을 신의 비상 상태로 감지한 것 이었다.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정념에 민감했던 것처럼 오늘날 말씀을 들고 매주 강단에 서는 사역자들도 하느님의 정념에 민감해야 한다.
예언자의 기본 의식에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관심”이 있다. 예언의 궁극적인 목적 역시 그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언의 내용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인간의 관련이다. 이것은 사역자들의 말씀 사역도 하나님의 “간섭, 돌봄, 관심”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성경의 예언자들을 살펴봄으로 오늘날 선지자는 아니지만 선지자적 사명을 갖고 강단에 서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요청한다. 오늘의 상황을 선지자의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성취는 그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예언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그 의미를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작성 선언이 아니며 하나님의 섭리 선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이 예언의 포커스다.
본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돌이키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을 참으시는 하나님은 결국 언약을 성실히 지키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언약의 중보자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죄를 용서하시길 기뻐하신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는가? 이에 선지자적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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