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동이전과 후한서 비교- 부여전,고구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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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후한서 (後漢書)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
Ⅰ.『부여 (夫餘) 전』 비교
Ⅱ. 『고구려 (高句麗) 전』 비교

◎魏書東夷傳과 後漢書 後論

본문내용

부에서 나온 국왕에 의하여 국가형태를 이룩하였으나 종래의 부족적 군장국가의 유제는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에서 매년 10월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었는데 이를 동맹(東盟)이라고 한다. 동맹에 관한 기록은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에 따르면 “고구려 나라 읍락(邑落)의 남녀들이 밤에 모여 서로 노래와 놀이를 즐기며 10월에 제천을 하면서 국중대회를 여는데 그 이름을 동맹이라 한다”고 하였고, <후한서(後漢書)> 에도 “10월에 제천의식을 가지는데 밤에 남녀가 모여 창악(唱樂)을 하고 귀신·영성·사직을 제사하기를 즐겼는데, 그 이름을 동맹이라 하더라”고 하였다.
◎魏書東夷傳과 後漢書 後論
·위서동이전은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한 고대 국가 형성기의 상황을 보여 주는 한국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 예, 한, 왜 등의 사회상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중국인들이 이전부터 동이족과의 접촉을 통해서 얻어진 지식을 비로소 집대성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사실은 후대 중국의 여러 사서의 동이 관계 기사가 모두 위서의 것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책에 나타난 여러 나라 사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분분한 형편이나, 그 사회는 철기 문화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전 시대의 전통이 급속하게 변모해 가고 있는 상태의 것이라고 하겠다.
·후한서
論曰: 昔<箕子>違衰<殷>之運, 避地<朝鮮>. 始其國俗未有聞也, 及施八條之約, 使人知禁, 遂乃邑無淫盜, 門不夜 ,{ , 關也.} 回頑薄之俗, 就寬略之法, 行數百千年, 故<東夷>通以柔謹爲風, 異乎三方者也. 苟政之所暢, 則道義存焉. <仲尼>懷憤, 以爲九<夷>可居. 或疑其陋.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亦徒有以焉爾. 其後遂通接商賈, 漸交上國. 而燕人<衛滿>擾雜其風,{擾, 亂也.} 於是從而 異焉. <老子>曰: [法令滋章, 盜賊多有.] 若<箕子>之省簡文條而用信義, 其得聖賢作法之原矣!
논하여 말하기를, 옛날 '기자'가 '은'나라의 운이 쇄하자 피하여 '조선'으로 갔다. 이 나라의 풍속은 시작되니, 듣기로는 과거에는 있지 아니하였다. 팔조의 약속을 베풀어 미치니, 사람들이 금하는 것을 알고 읍에 음란과 도적이 없어저 밤에 문을 닫지 아니하였다.[' '는 '關'이다.] 어리석어 박하던 풍속을 돌리어 관대하게 다스리는 법을 이루니 수백 수 천년을 행했다. 고로 '동이'가 통함으로써 유순하고 삼가게 되니 이는 삼방도 같다. 진실로 정치하는 바를 펼치니 즉 도의가 있다. 중니가 흥분하며 구이에 거하고자 하니, 혹 의심하나 이는 속이 좁은 것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길 군자는 이에 거하니, 어찌 속 좁음이 있으리오! 또한 무리가 있으니 어찌 이와 같으리오.
그 후로 장사로 통함과 접함을 이루니 점점 상국과 교역하니, 연인 '위만'이 그 풍속을 섞어 어지럽히니 이에 경박하고 기이함을 좇게 되었다. 노자가 말하길 법령에 글을 더하면 도적이 많아진다. 하니 고로 기자의 깨달음 같이 법을 간략히 하여 신의만을 쓴것은 성현의 법 만드는 근본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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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3.31
  • 저작시기2003.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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