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3국의 무덤 양식
1) 고구려
2) 백제
3) 신라
2. 무덤의 유형
1) 봉분의 형태에 따른 분류
2) 봉분의 재료에 따른 분류
3) 유구의 재료에 따른 분류
3. 3국의 무덤양식의 차이(표)
4. 신라 무덤양식
1) 돌무지 무덤
- 사전적 의미
- 백제 돌무지 무덤
2) 돌무지 덧널 무덤
3) 독무덤
4) 돌방무덤
5. 의의
1) 고구려
2) 백제
3) 신라
2. 무덤의 유형
1) 봉분의 형태에 따른 분류
2) 봉분의 재료에 따른 분류
3) 유구의 재료에 따른 분류
3. 3국의 무덤양식의 차이(표)
4. 신라 무덤양식
1) 돌무지 무덤
- 사전적 의미
- 백제 돌무지 무덤
2) 돌무지 덧널 무덤
3) 독무덤
4) 돌방무덤
5. 의의
본문내용
무덤은 땅을 파고 그 안에 나무관을 넣은 무덤으로 요즈음의 무덤과는 비슷하고 덧널무덤은 외부곽을 설치하고 그 안에 시신과 유물을 함께 안치했지만 돌부지 덧널무덤의 경우에는 그 구조가 일단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덧널을 설치하였고 그 다음 냇돌을 쌓았기 때문에 널무덤이 흙으로 1중 구조라면 덧널 무덤은 외부곽이 있는 2중구조 돌무지 덧널무덤의 경우에는 흘과 덧널 그리고 냇돌(돌무지)까지 해서 3중 구조가 되기 때문에 널무덤이나 덧널 무덤에 비해서 도굴이 어렵다
2) 독무덤
- 독무덤이란 주검을 독이나 항아리에 넣어서 땅을 파고 구덩이를 만들거나 독을 넣을 만큼 적당히 파서 묻는 무덤을 말합니다 독장이나 옹관묘라고도 합니다. 청동기시대 이래로 이른 철기시대를 거쳐, 우리나라의 남부지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오랜 전통의 무덤 양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삼국시대의 것은 봉토가 있지만 그 앞 시기의 것은 땅 위에 무덤의 자취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조사된 경우가 적습니다. 널[관]로 쓰여지는 독이나 항아리가 1개이면서 넓적한 돌 같은 것으로 뚜껑을 덮은 것은 외독, 항아리나 독 2개가 서로 아가리를 맞대고 뉘인 것은 이음독이라 하며, 3개를 이어서 만든 것도 가끔씩 발견되고 있지만 이 가운데 이음독이 가장 널리 퍼져 있습니다. 독무덤이 있는 곳의 지세는 시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청동기시대의 것은 강이나 작은 냇가를 낀 들판과 붙어 있는 구릉지대에서 고인돌·움무덤·돌상자무덤 등과 함께 발견되고 있으며, 이른 철기시대의 것은 구릉지대를 비롯하여 산기슭에서, 김해 회현리와 부산 낙민동유적과 같은 것은 조개더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것은 야트막한 산기슭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청동기시대나 이른 철기시대의 유적은 강서·은율·신천·공주·광산·김해·부산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그다음 시기에는 이러한 무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전국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 그림
3) 돌방무덤
- 널방[玄室]을 만들고 그 위에 흙과 돌무지 ·진흙 ·숯 ·재 등을 깐 뒤 흙으로 봉토를 만든 것이 일반적이며, 그 형태는 다양하다.
한반도에서는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에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있던 중국계 봉토분의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으며, 돌무지무덤[積石塚] 전통의 고구려가 낙랑이 멸망한 뒤부터 봉토(封土)돌방무덤을 짓기 시작하여 평양 천도 이후 이 무덤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고구려 돌방무덤의 돌방은 방의 수에 따라 널방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單室墓]과 앞방[前室] ·뒷방[後室] ·옆방[側室] 등 두 방 이상으로 이루어진 여러방무덤[多室墓]으로 나뉜다. 돌방의 벽은 초기에는 냇돌 ·깬돌을 썼지만, 뒤에는 잘 다듬은 큰 판석을 여러 장 세워 축조하였다. 천장에는 납작천장[平天井] ·활[窮隆式]천장 ·모줄임[抹角藻井式]천장 등이 있는데, 특히 모줄임천장 네 귀에 삼각형으로 받침대돌을 놓아 그 공간을 점차 좁혀 올리고 맨 위에 판석 한 장을 덮는 형식이다.
이러한 무덤 중에는 돌방 벽면과 천장에 그림을 그린 벽화무덤도 있는데, 축조방법과 그림의 주제 및 변화과정으로 보아 3시기로 구분된다.
전기(350~450년경)는, 외방무덤 또는 여러방무덤이 있으며 널길이 남벽 동쪽에 있는 양식이다. 그림의 주제는 황해도 안악군 동수묘(冬壽墓)와 덕흥리(德興里)무덤에서 볼 수 있는 부부초상 ·사냥 ·무용 ·행렬(行列)을 비롯한 생전의 생활 모습 등을 담은 인물풍속도 등이다.
중기(450~550년경)는, 돌방의 축조가 고구려식으로 정착되면서 앞방이 작아져 딸린 방처럼 되고 주인공의 초상도 널방으로 옮겨진다. 그림의 주제도 전기의 인물중심에서 사신도(四神圖)와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을 비롯해서 불교적 장식무늬도 나타난다. 각저총(角抵塚) ·무용총(舞踊塚) ·개마총(鎧馬塚) 등이 있다.
후기(550~650년경)는, 구조적으로 단순화되어 외방무덤이 대부분이며, 무덤바닥이 지면 가까이 내려간다. 그림의 주제는 사신도 일색으로 대표적인 무덤으로 지안[集安]의 사신총(四神塚)과 진파리(眞坡里)1 ·2호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외방무덤의 축조방법과 벽화의 주제 등은 백제 ·신라에도 전해졌다.
백제의 경우 서울 가락동과 방이동 등에 이 무덤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구려식의 ‘가’ 또는 ‘모’자형의 널길이 남벽의 동쪽 또는 중앙에 딸린 돌방무덤이다. 웅진 천도 이후에도 널길이 딸린 돌방무덤은 계속 만들어지는데, 처음의 사각형 어울무덤[合葬墓]에서 직사각형 단장묘(單葬墓)로 바뀌어 그것이 부여시대로 넘어간다. 사비 천도 이후에는 능산리고분군에서 보듯이 널길이 더욱 넓어져 돌방[石室]의 너비와 거의 같아진다. 이러한 돌방무덤은 막돌로 쌓은 형식과 함께 전라도 지방으로 퍼져 내려가며, 한편 천장의 모를 죽여 짜만든 꺾임[平斜]천장은 일본 고분과의 연관도 생각하게 한다.
가야지역에서는 가야 말기에 백제 무덤의 영향를 받아서 만들어진 무덤형식으로, 깬돌[割石]로 축조한 돌방무덤이 대부분이며 널방과 널길을 가진 것이 특색이다. 고령 ·산청(山淸) ·진주(晉州) 등에서 발견되나 그 수는 많지 않다.
신라지역에서는 6세기경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으로 굴식돌방무덤이 등장하여 통일신라시대까지 계속되었다. 평면 사각형의 널방을 부정형(不定形)의 깬돌을 쌓아 올리고 4벽을 내경(內傾)시킨 다음 천장석을 올려 놓았으며 널길이 남벽 동쪽에 치우쳐 있다. 양산(梁山) 부부총, 경주 쌍상총(雙床塚) 등이 유명하다.
대표 사진
부부총 (양산 북정고분군 )
쌍상총 (노서동 고분군)
5. 의의
- 유적의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경주에 고분군들이 상당히 독특하고 신라의 고유의 특징이 잘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비단 신라 후기로 가면서 서로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양식에 차이가 없어지고 상호 영향을 주어 하나의 문화와 양식으로 발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주에 상당히 많은 고분과 유물이 있으며 그것들 하나 하나가 가지는 중요성에 다시 한번 무심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이제는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유물이 가지는 의의도 한번 알아보는것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2) 독무덤
- 독무덤이란 주검을 독이나 항아리에 넣어서 땅을 파고 구덩이를 만들거나 독을 넣을 만큼 적당히 파서 묻는 무덤을 말합니다 독장이나 옹관묘라고도 합니다. 청동기시대 이래로 이른 철기시대를 거쳐, 우리나라의 남부지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오랜 전통의 무덤 양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삼국시대의 것은 봉토가 있지만 그 앞 시기의 것은 땅 위에 무덤의 자취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조사된 경우가 적습니다. 널[관]로 쓰여지는 독이나 항아리가 1개이면서 넓적한 돌 같은 것으로 뚜껑을 덮은 것은 외독, 항아리나 독 2개가 서로 아가리를 맞대고 뉘인 것은 이음독이라 하며, 3개를 이어서 만든 것도 가끔씩 발견되고 있지만 이 가운데 이음독이 가장 널리 퍼져 있습니다. 독무덤이 있는 곳의 지세는 시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청동기시대의 것은 강이나 작은 냇가를 낀 들판과 붙어 있는 구릉지대에서 고인돌·움무덤·돌상자무덤 등과 함께 발견되고 있으며, 이른 철기시대의 것은 구릉지대를 비롯하여 산기슭에서, 김해 회현리와 부산 낙민동유적과 같은 것은 조개더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것은 야트막한 산기슭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청동기시대나 이른 철기시대의 유적은 강서·은율·신천·공주·광산·김해·부산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그다음 시기에는 이러한 무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전국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 그림
3) 돌방무덤
- 널방[玄室]을 만들고 그 위에 흙과 돌무지 ·진흙 ·숯 ·재 등을 깐 뒤 흙으로 봉토를 만든 것이 일반적이며, 그 형태는 다양하다.
한반도에서는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에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있던 중국계 봉토분의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으며, 돌무지무덤[積石塚] 전통의 고구려가 낙랑이 멸망한 뒤부터 봉토(封土)돌방무덤을 짓기 시작하여 평양 천도 이후 이 무덤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고구려 돌방무덤의 돌방은 방의 수에 따라 널방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單室墓]과 앞방[前室] ·뒷방[後室] ·옆방[側室] 등 두 방 이상으로 이루어진 여러방무덤[多室墓]으로 나뉜다. 돌방의 벽은 초기에는 냇돌 ·깬돌을 썼지만, 뒤에는 잘 다듬은 큰 판석을 여러 장 세워 축조하였다. 천장에는 납작천장[平天井] ·활[窮隆式]천장 ·모줄임[抹角藻井式]천장 등이 있는데, 특히 모줄임천장 네 귀에 삼각형으로 받침대돌을 놓아 그 공간을 점차 좁혀 올리고 맨 위에 판석 한 장을 덮는 형식이다.
이러한 무덤 중에는 돌방 벽면과 천장에 그림을 그린 벽화무덤도 있는데, 축조방법과 그림의 주제 및 변화과정으로 보아 3시기로 구분된다.
전기(350~450년경)는, 외방무덤 또는 여러방무덤이 있으며 널길이 남벽 동쪽에 있는 양식이다. 그림의 주제는 황해도 안악군 동수묘(冬壽墓)와 덕흥리(德興里)무덤에서 볼 수 있는 부부초상 ·사냥 ·무용 ·행렬(行列)을 비롯한 생전의 생활 모습 등을 담은 인물풍속도 등이다.
중기(450~550년경)는, 돌방의 축조가 고구려식으로 정착되면서 앞방이 작아져 딸린 방처럼 되고 주인공의 초상도 널방으로 옮겨진다. 그림의 주제도 전기의 인물중심에서 사신도(四神圖)와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을 비롯해서 불교적 장식무늬도 나타난다. 각저총(角抵塚) ·무용총(舞踊塚) ·개마총(鎧馬塚) 등이 있다.
후기(550~650년경)는, 구조적으로 단순화되어 외방무덤이 대부분이며, 무덤바닥이 지면 가까이 내려간다. 그림의 주제는 사신도 일색으로 대표적인 무덤으로 지안[集安]의 사신총(四神塚)과 진파리(眞坡里)1 ·2호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외방무덤의 축조방법과 벽화의 주제 등은 백제 ·신라에도 전해졌다.
백제의 경우 서울 가락동과 방이동 등에 이 무덤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구려식의 ‘가’ 또는 ‘모’자형의 널길이 남벽의 동쪽 또는 중앙에 딸린 돌방무덤이다. 웅진 천도 이후에도 널길이 딸린 돌방무덤은 계속 만들어지는데, 처음의 사각형 어울무덤[合葬墓]에서 직사각형 단장묘(單葬墓)로 바뀌어 그것이 부여시대로 넘어간다. 사비 천도 이후에는 능산리고분군에서 보듯이 널길이 더욱 넓어져 돌방[石室]의 너비와 거의 같아진다. 이러한 돌방무덤은 막돌로 쌓은 형식과 함께 전라도 지방으로 퍼져 내려가며, 한편 천장의 모를 죽여 짜만든 꺾임[平斜]천장은 일본 고분과의 연관도 생각하게 한다.
가야지역에서는 가야 말기에 백제 무덤의 영향를 받아서 만들어진 무덤형식으로, 깬돌[割石]로 축조한 돌방무덤이 대부분이며 널방과 널길을 가진 것이 특색이다. 고령 ·산청(山淸) ·진주(晉州) 등에서 발견되나 그 수는 많지 않다.
신라지역에서는 6세기경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으로 굴식돌방무덤이 등장하여 통일신라시대까지 계속되었다. 평면 사각형의 널방을 부정형(不定形)의 깬돌을 쌓아 올리고 4벽을 내경(內傾)시킨 다음 천장석을 올려 놓았으며 널길이 남벽 동쪽에 치우쳐 있다. 양산(梁山) 부부총, 경주 쌍상총(雙床塚) 등이 유명하다.
대표 사진
부부총 (양산 북정고분군 )
쌍상총 (노서동 고분군)
5. 의의
- 유적의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경주에 고분군들이 상당히 독특하고 신라의 고유의 특징이 잘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비단 신라 후기로 가면서 서로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양식에 차이가 없어지고 상호 영향을 주어 하나의 문화와 양식으로 발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주에 상당히 많은 고분과 유물이 있으며 그것들 하나 하나가 가지는 중요성에 다시 한번 무심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이제는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유물이 가지는 의의도 한번 알아보는것도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