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크리스트교와 이스람교
Ⅲ. 십자군 운동의 원인
Ⅳ. 십자군 운동의 전개과정
Ⅴ. 결 론
Ⅱ. 크리스트교와 이스람교
Ⅲ. 십자군 운동의 원인
Ⅳ. 십자군 운동의 전개과정
Ⅴ. 결 론
본문내용
과 실패로 말미암아 교황의 위신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실추되었던 것이다.
Ⅴ.결론
십자군의 이상은 한편으로는 교황 군주 국가의 건설에 기여한 바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파멸에도 기여했다. 그러면 그밖에 십자군의 실질적인 의의는 무엇이었는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제1차 십자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성공은 중세 서유럽인의 자신감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수백 년 동안 서유럽은 이슬람 세력에 미렬 수세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서유럽의 군대가 이슬람 세력의 핵심 지역으로 진군해 들어가 마음대로 약탈유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승리로 말미암아 12세기 유럽인 사이에는 낙관주의가 팽배해졌다.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신이 그들의 편이라 믿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든지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십자군은 또한 서유럽인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성지의 서유럽인들 가운데 아랍어를 배우거나 이슬람 사상, 또는 제도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힘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독교인들과 무슬림 사이의 문화교류가 가장 활발히 이루어졌던 곳은 에스파냐와 시칠리아였다. 그러나 이국을 통과하여 먼 지역을 여행한 십자군들은 어딘가 좀더 세련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자군 운동은 특히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치품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으며, 문학과 우화의 풍부한 소재를 제공했던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1차 십자군의 성공은 서유럽인들에게 동부 지중해를 새로운 무역 활동의 무대로 제공했다. 특히 베네치아 및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도시들이 이 해역의 상권을 제패하기 시작했고, 그로써 서유럽 전체의 번영에도 기여했다. 원격지로 대금을 송금할 필요성으로 인해 초보적인 금융 기법의 발달 또한 자극했다. 정치적으로 서유럽의 군주 국가들은 십자군에 필요한 자금 조달 명목으로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한 선례로 말미암아 직접적인 혜택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한 세금 징수를 다양한 형태로 발달시켰다. 더욱이 자금과 식량조달에 의해 국왕의 십자군을 돕고자 국가를 조직화하다 보니, 신흥 국민 국가들의 효율적 행정 제도 발달에도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에는 부정적 측면 또한 있었다. 유럽 내에서 유대인을, 그리고 유럽 밖에서 무슬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십자군의 만행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십자군은 서유럽과 비잔틴의 관계 단절을 더욱 가속화했고,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잇따른 재난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성지에서의 서유럽인들의 식민주의는 그후 근대에까지 이어지게 된 서유럽 식민주의의 기나긴 역사의 출발에 불과했다.
◈ 참고문헌 ◈
1) 차하순,『서양사총론』 서울 : 탐구사, 1979
2) 김 진웅, 정성화, 손영호 共著, 『서양사의 이해』 서울 : 학지사, 1994.
3) 브라이언 타이어니, 시드니 페인터 共著, 이연규 譯,
『서양 중세사』서울 : 집문당、 1986
4) 시드니 페인터, 고려대학교 대학원 서양중세사 연구실 譯,
『서양 중세 세계사』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 1986
Ⅴ.결론
십자군의 이상은 한편으로는 교황 군주 국가의 건설에 기여한 바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파멸에도 기여했다. 그러면 그밖에 십자군의 실질적인 의의는 무엇이었는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제1차 십자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성공은 중세 서유럽인의 자신감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수백 년 동안 서유럽은 이슬람 세력에 미렬 수세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서유럽의 군대가 이슬람 세력의 핵심 지역으로 진군해 들어가 마음대로 약탈유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승리로 말미암아 12세기 유럽인 사이에는 낙관주의가 팽배해졌다.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신이 그들의 편이라 믿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든지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십자군은 또한 서유럽인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성지의 서유럽인들 가운데 아랍어를 배우거나 이슬람 사상, 또는 제도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힘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독교인들과 무슬림 사이의 문화교류가 가장 활발히 이루어졌던 곳은 에스파냐와 시칠리아였다. 그러나 이국을 통과하여 먼 지역을 여행한 십자군들은 어딘가 좀더 세련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자군 운동은 특히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치품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으며, 문학과 우화의 풍부한 소재를 제공했던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1차 십자군의 성공은 서유럽인들에게 동부 지중해를 새로운 무역 활동의 무대로 제공했다. 특히 베네치아 및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도시들이 이 해역의 상권을 제패하기 시작했고, 그로써 서유럽 전체의 번영에도 기여했다. 원격지로 대금을 송금할 필요성으로 인해 초보적인 금융 기법의 발달 또한 자극했다. 정치적으로 서유럽의 군주 국가들은 십자군에 필요한 자금 조달 명목으로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한 선례로 말미암아 직접적인 혜택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한 세금 징수를 다양한 형태로 발달시켰다. 더욱이 자금과 식량조달에 의해 국왕의 십자군을 돕고자 국가를 조직화하다 보니, 신흥 국민 국가들의 효율적 행정 제도 발달에도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에는 부정적 측면 또한 있었다. 유럽 내에서 유대인을, 그리고 유럽 밖에서 무슬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십자군의 만행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십자군은 서유럽과 비잔틴의 관계 단절을 더욱 가속화했고,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잇따른 재난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성지에서의 서유럽인들의 식민주의는 그후 근대에까지 이어지게 된 서유럽 식민주의의 기나긴 역사의 출발에 불과했다.
◈ 참고문헌 ◈
1) 차하순,『서양사총론』 서울 : 탐구사, 1979
2) 김 진웅, 정성화, 손영호 共著, 『서양사의 이해』 서울 : 학지사, 1994.
3) 브라이언 타이어니, 시드니 페인터 共著, 이연규 譯,
『서양 중세사』서울 : 집문당、 1986
4) 시드니 페인터, 고려대학교 대학원 서양중세사 연구실 譯,
『서양 중세 세계사』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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