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실학사상의 발생배경
1). 사회적 원인
2). 학문적 배경
2. 실학사상의 발전
1). 실학사상의 전개와 실학파 계보
2). 실학사상의 특징
3). 실학의 의의 및 한계점
1). 사회적 원인
2). 학문적 배경
2. 실학사상의 발전
1). 실학사상의 전개와 실학파 계보
2). 실학사상의 특징
3). 실학의 의의 및 한계점
본문내용
다.
3. 실학의 의의 및 한계점
1) 실학의 의의
조선후기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한 실학사상은 우리나라가 스스로 근대사회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 중세적 세계관인 화이론을 극복하고, 우리민족의 주체성을 자각하였다는 점이다. 성호 이익은 “중국도 대지 중의 일편토에 지나지 않으며, 적게는 초도 하나의 나라이고 제도 하나의 나라이다”라고 하면서 서양문화 거란문화 몽골문화 우리문화가 각각 독자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홍대용과 박지원 등은 지구의 구형설과 자전설을 주장하면서 어느 특정국가가 중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논증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체성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 언어 등 우리 것을 중심과제로 삼았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유득공의 <발해고>,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유희의 <언문지> 등은 곧 이러한 의식의 산물이었다.
둘째, 실학자들의 토지개혁론, 자주적 통상론 등은 우리나라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주체적으로 준비한 근대변혁사상의 모태였다는 점이다. 중농학파의 토지개혁론은 비록 사적 소유권을 제한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개혁의 초점은 농민적 토지소유권을 옹호하는 데 있었다. 특히 국내의 상공업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대외통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하며, 서구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서사도 초빙해야 한다는 북학파의 주장은 근대 개화사상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셋째, 봉건적 신분관념을 탈피하고 근대적인 직업윤리관에 접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실학자들은 놀고먹는 양반 유생들이 노동을 천시하는 봉건적 직업관을 통렬히 비판하고, 모름지기 사람은 모두 생산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에게는 상업이나 수공업이 더 이상 천한 직업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놀고먹는 양반이야말로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으로 간주되었다.
넷째, 근대학문의 발판을 닦았다는 점이다. 실학자들은 형이하학으로 천시 받았던 모든 분야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근대적인 논증의 방법으로 새로운 학문분야를 개척하였다. 이들은 역사, 철학, 정치 등의 분야뿐만 아니라 천문학, 수학, 지리학, 농학 등 자연과학 분야에 대해서도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특히 추사 김정희는 청의 고증학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수준 높은 금석문 고증에 일가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추사체라는 독특한 필법을 창안하였다.
2) 실학의 한계
실학이 근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실학’이란 학문 또한 기존의 유교적 질서에서 나온 학문이고, 실학자들 또한 기존 질서와 유학의 사상 속에 자라난 사람들이므로 완전한 근대화를 이루는데 있어서는 상당한 한계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실학은 근대화의 교량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실학사상은 모두 다 당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방법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양자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중농적 실학사상이 분배론이라면, 중상적 실학사상은 성장론이라는 것이다. 분배에 힘을 기울이면 빈곤의 평등이 될 수가 있고 성장에 힘을 기울이면 빈부의 격차가 커질 수 있다. 이렇듯 분배와 성장의 문제는 조화시키기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없다.
실학자들은 나름대로의 처지에서 문제해결의 방법을 주장했으나 그들 대부분이 몰락 남인이거나, 권력을 잡고 있었다 하더라도 낮은 지위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 못했다. 따라서 권력자들에 의해 무시되어 이론과 주장에 그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3. 실학의 의의 및 한계점
1) 실학의 의의
조선후기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한 실학사상은 우리나라가 스스로 근대사회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 중세적 세계관인 화이론을 극복하고, 우리민족의 주체성을 자각하였다는 점이다. 성호 이익은 “중국도 대지 중의 일편토에 지나지 않으며, 적게는 초도 하나의 나라이고 제도 하나의 나라이다”라고 하면서 서양문화 거란문화 몽골문화 우리문화가 각각 독자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홍대용과 박지원 등은 지구의 구형설과 자전설을 주장하면서 어느 특정국가가 중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논증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체성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 언어 등 우리 것을 중심과제로 삼았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유득공의 <발해고>,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유희의 <언문지> 등은 곧 이러한 의식의 산물이었다.
둘째, 실학자들의 토지개혁론, 자주적 통상론 등은 우리나라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주체적으로 준비한 근대변혁사상의 모태였다는 점이다. 중농학파의 토지개혁론은 비록 사적 소유권을 제한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개혁의 초점은 농민적 토지소유권을 옹호하는 데 있었다. 특히 국내의 상공업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대외통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하며, 서구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서사도 초빙해야 한다는 북학파의 주장은 근대 개화사상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셋째, 봉건적 신분관념을 탈피하고 근대적인 직업윤리관에 접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실학자들은 놀고먹는 양반 유생들이 노동을 천시하는 봉건적 직업관을 통렬히 비판하고, 모름지기 사람은 모두 생산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에게는 상업이나 수공업이 더 이상 천한 직업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놀고먹는 양반이야말로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으로 간주되었다.
넷째, 근대학문의 발판을 닦았다는 점이다. 실학자들은 형이하학으로 천시 받았던 모든 분야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근대적인 논증의 방법으로 새로운 학문분야를 개척하였다. 이들은 역사, 철학, 정치 등의 분야뿐만 아니라 천문학, 수학, 지리학, 농학 등 자연과학 분야에 대해서도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특히 추사 김정희는 청의 고증학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수준 높은 금석문 고증에 일가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추사체라는 독특한 필법을 창안하였다.
2) 실학의 한계
실학이 근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실학’이란 학문 또한 기존의 유교적 질서에서 나온 학문이고, 실학자들 또한 기존 질서와 유학의 사상 속에 자라난 사람들이므로 완전한 근대화를 이루는데 있어서는 상당한 한계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실학은 근대화의 교량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실학사상은 모두 다 당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방법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양자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중농적 실학사상이 분배론이라면, 중상적 실학사상은 성장론이라는 것이다. 분배에 힘을 기울이면 빈곤의 평등이 될 수가 있고 성장에 힘을 기울이면 빈부의 격차가 커질 수 있다. 이렇듯 분배와 성장의 문제는 조화시키기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없다.
실학자들은 나름대로의 처지에서 문제해결의 방법을 주장했으나 그들 대부분이 몰락 남인이거나, 권력을 잡고 있었다 하더라도 낮은 지위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 못했다. 따라서 권력자들에 의해 무시되어 이론과 주장에 그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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