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감동의 시베리아 첫 기행; 하바로브스크, 이르크츠크
2. 항일운동의 성지 : 블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
3. 연해주 지역 항일 전적지를 찾아
4. 모스크바에서 만난 항일운동가의 후손들
5. 연해주 지역의 항일유적의 현 주소
2권
1. 새로운 세기에 다시 찾은 블라디보스톡
2. 아무르주 항일독립운동의 현장 : 블라고베시첸스크와 스보보드니(자유시
3. 러시아에서 찾아본 안중근 의사와 이상설 선생
4. 러시아 지역 항일 언론과 구국의 현장
5. 한인 최초의 공산주의자 김 알렉산드리아의 유적을 찾아
감상후기
2. 항일운동의 성지 : 블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
3. 연해주 지역 항일 전적지를 찾아
4. 모스크바에서 만난 항일운동가의 후손들
5. 연해주 지역의 항일유적의 현 주소
2권
1. 새로운 세기에 다시 찾은 블라디보스톡
2. 아무르주 항일독립운동의 현장 : 블라고베시첸스크와 스보보드니(자유시
3. 러시아에서 찾아본 안중근 의사와 이상설 선생
4. 러시아 지역 항일 언론과 구국의 현장
5. 한인 최초의 공산주의자 김 알렉산드리아의 유적을 찾아
감상후기
본문내용
시베리아에서 활동한 가장 대표적인 여성 혁명가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한국인이 조직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정당인 한인 사회당의 실제적인 설립주체라는 측면에서 더운 주목의 대상이다. 또한 계봉우는 독립신문을 통해 그녀가 혁명사상,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자유정신, 독립투쟁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기술했다.
우수리스크 태생으로 한국이름 애리를 지닌 그녀는 촌장이 된 후 중국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동철공사의 통역으로 일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중국 하얼빈으로 가 견문과 중국어를 익히고 의화단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그 후 부친을 여의고 부친의 친구인 폴란드인에게 맡겨져 그의 아들과 결혼해 아들을 출산하지만 곧 잃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와 러시아여학교에 다니게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폴란드인 남편의 혁명사상과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후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이유로 짜르헌병대에 쫓긴 그녀는 중국으로 피신 뒤 다시 돌아와 학교를 좋업하고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후 1차세계대전 발발로 많은 한인이 우랄지역으로 노역을 가 임금과 언어장애들으로 피해를 보자 조선인민회는 그녀를 파견해 문제를 해결하게 하였고 그녀는 남편과 두아이를 떠나 우랄로 간다. 우랄지역의 문제를 해결한 그녀는 에카제린부르크에서 볼세비키가되고 극동지역의 공산주의화를 위해 파견된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극동지망 대표자회의에 참가하고 소비에트 대회에서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그녀는 이후 극동인민위원회 외교부장까지 진출해 1918년 한인사회당 결성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그녀는 한인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해야만 러시아의 평등한 대우를 받고 조국을 독립시킬 수 있다 인식하였을 것이다. 이후 아무르 강에서 백군에 체포되어 하바로브스크로 이송된 그녀는 깔미코프의 신문을 받고 죽음의 골짜기에서 처형되었다. 러시아 간행물들은 그녀가 우조스에서 죽은 것으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상징적으로 묘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더 많은 연구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녀가 활동하던 시절 공산주의 사상의 수용은 국제적인 측면과 민족적인 측면을 겸비한 선택이며 그녀는 국제주의자로서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직책을 이용해 한인들에 대하여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한인사회당창당을 돕고 이동휘의 석방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그녀는 소비에트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조국 독립을 위한 첩경이라 여긴 것이다. 이처럼 김 알렉산드라는 조선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가졌으며 또한 남녀평등을 강조한 신여성이기도 하는 면은 이인섭이 그녀를 회고한 기록에 상세히 나와 있다. 이처럼 김 알렉산드라는 한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시대적 제약을 뛰어 넘어 민족주의자로서 혁명가로서 자유주의자로서 시대적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감상후기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며 내 머리와 마음은 러시아 연해주부터 시베리아를 계속 오갔다. 지난 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그 넓은 땅에서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동포의 안위를 위해 스스로를 던진 수많은 선열들의 모습들은 그들의 이름조차 낯설어 하는 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난 날 우리들은 국사교육과 보훈교육에 있어서 지나치다 할 만큼 만주 지역 민주계열 열사들만을 집중 조명하여 편협한 역사관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생각과 아쉬움이 지난 세 달간의 수업과 이 책을 통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 누가 김 알렉산드리아를 , 김경천을 , 조명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던가. 그들이 공산주의 자였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들이 생각과 업적을 소개받을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했다. 그것이 올 바른 역사교육이었다면 훗날에는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기록에서 지워져야하는 것일까?
분단된 현실에 이념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을 테지만 우리가 지금 이렇게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은 볼세비키가 되어서라도 조국의 독립을 이루고자했던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던 일이었을 것이 틀림없는데 말이다. 하루 빨리 이들의 행적과 운동 내역들이 정리가 되어서 다시 한 번 넓은 시각의 역사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책을 놓는 순간 가장 먼저 들었다.
그리도 또 하나의 상념은 잃어버린 우리의 영토와 정신이다.
연해주는 최근 방송에 고구려가 주목받고 있듯이 우리 민족의 숨결이 오래전부터 담겨져 있는 소중한 우리 조상들의 터전이었던 곳이다. 비록 지금은 러시아와 중국의 영토가 되어있는 곳들이지만 우리 조상들이 흘린 땀과 눈물과 피는 아직도 그 땅 어딘가에 스며들어 우리 후손들이 어루어 만져주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몇 해 전부터 한 시사 잡지에서 간도 되찾기 운동을 할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터무니 없는 소리라며, 독도도 시끄러운데 문제를 왜 또 만드냐며 조용히 살자고 했다. 그렇게 조용히, 조용히 하다가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며 득달같이 달려들자 고구려를 부르짖고 발해를 부르짖는다. 이런 것이 우리의 냄비근성과 집단주의의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족들, 그리고 고려인들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한숨을 지을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땅을 개간하고 스스로가 독립군이 되었던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어떤 모습으로 우릴 지켜보고 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책의 내용 중에 나선화 선생님이 한 말씀을 빌리면 우리는 조선 250년을 통해 대륙적인,유목적인 성향을 많이 잃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추면 비단 조선 250년 뿐 아니라 현재도 계속 우리는 그러한 성향을 잃어가고 있는 중 일지도 모른다.
넓은 시각에 넓은 포용으로 세상을 보기 보다는 편협하고 누군가의 뒤에 서 있을 때 안주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구한말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이번 수업과 레포트를 계기로 나 자신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된 거 같아 스스로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아직 지식으로서 그것들을 습득했다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마음으로 느꼈으니 그러한 생각과 상념들이 언젠가는 머리와 행동에도 전달될 것이라 스스로 다짐하며 연해주와 시베리아에서 조국의 독립과 후대의 안위를 위해 힘쓴 한 분 한 분의 열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우수리스크 태생으로 한국이름 애리를 지닌 그녀는 촌장이 된 후 중국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동철공사의 통역으로 일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중국 하얼빈으로 가 견문과 중국어를 익히고 의화단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그 후 부친을 여의고 부친의 친구인 폴란드인에게 맡겨져 그의 아들과 결혼해 아들을 출산하지만 곧 잃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와 러시아여학교에 다니게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폴란드인 남편의 혁명사상과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후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이유로 짜르헌병대에 쫓긴 그녀는 중국으로 피신 뒤 다시 돌아와 학교를 좋업하고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후 1차세계대전 발발로 많은 한인이 우랄지역으로 노역을 가 임금과 언어장애들으로 피해를 보자 조선인민회는 그녀를 파견해 문제를 해결하게 하였고 그녀는 남편과 두아이를 떠나 우랄로 간다. 우랄지역의 문제를 해결한 그녀는 에카제린부르크에서 볼세비키가되고 극동지역의 공산주의화를 위해 파견된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극동지망 대표자회의에 참가하고 소비에트 대회에서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그녀는 이후 극동인민위원회 외교부장까지 진출해 1918년 한인사회당 결성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그녀는 한인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해야만 러시아의 평등한 대우를 받고 조국을 독립시킬 수 있다 인식하였을 것이다. 이후 아무르 강에서 백군에 체포되어 하바로브스크로 이송된 그녀는 깔미코프의 신문을 받고 죽음의 골짜기에서 처형되었다. 러시아 간행물들은 그녀가 우조스에서 죽은 것으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상징적으로 묘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더 많은 연구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녀가 활동하던 시절 공산주의 사상의 수용은 국제적인 측면과 민족적인 측면을 겸비한 선택이며 그녀는 국제주의자로서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직책을 이용해 한인들에 대하여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한인사회당창당을 돕고 이동휘의 석방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그녀는 소비에트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조국 독립을 위한 첩경이라 여긴 것이다. 이처럼 김 알렉산드라는 조선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가졌으며 또한 남녀평등을 강조한 신여성이기도 하는 면은 이인섭이 그녀를 회고한 기록에 상세히 나와 있다. 이처럼 김 알렉산드라는 한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시대적 제약을 뛰어 넘어 민족주의자로서 혁명가로서 자유주의자로서 시대적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감상후기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며 내 머리와 마음은 러시아 연해주부터 시베리아를 계속 오갔다. 지난 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그 넓은 땅에서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동포의 안위를 위해 스스로를 던진 수많은 선열들의 모습들은 그들의 이름조차 낯설어 하는 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난 날 우리들은 국사교육과 보훈교육에 있어서 지나치다 할 만큼 만주 지역 민주계열 열사들만을 집중 조명하여 편협한 역사관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생각과 아쉬움이 지난 세 달간의 수업과 이 책을 통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 누가 김 알렉산드리아를 , 김경천을 , 조명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던가. 그들이 공산주의 자였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들이 생각과 업적을 소개받을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했다. 그것이 올 바른 역사교육이었다면 훗날에는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기록에서 지워져야하는 것일까?
분단된 현실에 이념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을 테지만 우리가 지금 이렇게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은 볼세비키가 되어서라도 조국의 독립을 이루고자했던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던 일이었을 것이 틀림없는데 말이다. 하루 빨리 이들의 행적과 운동 내역들이 정리가 되어서 다시 한 번 넓은 시각의 역사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책을 놓는 순간 가장 먼저 들었다.
그리도 또 하나의 상념은 잃어버린 우리의 영토와 정신이다.
연해주는 최근 방송에 고구려가 주목받고 있듯이 우리 민족의 숨결이 오래전부터 담겨져 있는 소중한 우리 조상들의 터전이었던 곳이다. 비록 지금은 러시아와 중국의 영토가 되어있는 곳들이지만 우리 조상들이 흘린 땀과 눈물과 피는 아직도 그 땅 어딘가에 스며들어 우리 후손들이 어루어 만져주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몇 해 전부터 한 시사 잡지에서 간도 되찾기 운동을 할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터무니 없는 소리라며, 독도도 시끄러운데 문제를 왜 또 만드냐며 조용히 살자고 했다. 그렇게 조용히, 조용히 하다가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며 득달같이 달려들자 고구려를 부르짖고 발해를 부르짖는다. 이런 것이 우리의 냄비근성과 집단주의의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족들, 그리고 고려인들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한숨을 지을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땅을 개간하고 스스로가 독립군이 되었던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어떤 모습으로 우릴 지켜보고 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책의 내용 중에 나선화 선생님이 한 말씀을 빌리면 우리는 조선 250년을 통해 대륙적인,유목적인 성향을 많이 잃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추면 비단 조선 250년 뿐 아니라 현재도 계속 우리는 그러한 성향을 잃어가고 있는 중 일지도 모른다.
넓은 시각에 넓은 포용으로 세상을 보기 보다는 편협하고 누군가의 뒤에 서 있을 때 안주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구한말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이번 수업과 레포트를 계기로 나 자신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된 거 같아 스스로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아직 지식으로서 그것들을 습득했다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마음으로 느꼈으니 그러한 생각과 상념들이 언젠가는 머리와 행동에도 전달될 것이라 스스로 다짐하며 연해주와 시베리아에서 조국의 독립과 후대의 안위를 위해 힘쓴 한 분 한 분의 열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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