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의 교육사상 및 현대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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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화랑도의 교육사상 및 현대적 의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화랑도의 기원과 동기
2. 화랑도의 조직
3. 화랑도의 성격 및 기능
1) 군사적인 면
2) 교육적인 면
3) 종교적인 면
4. 화랑도 교육의 목적 및 내용
1) 교육목적
2) 교육내용
5. 화랑도 교육의 과정과 방법
1)수련 과정
2)수련 기간
3)수련 장소
6. 화랑도의 교육적 조명
1) 교육의 사회적 측면
2) 유교사상과의 관련성
3) 골품제도와 화랑도
7. 화랑도의 교육사적 의의
8. 화랑도의 현대적 시사점 및 정리
* 세속오계

본문내용

기를 수 있는 무사교육을 실시하였다. 화랑이 청소년을 수련하고 인재를 발굴하려는 신라의 교육제도였으므로 신라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신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화랑정신은 임진왜란과 구한말의 의병정신, 삼일정신에도 이어져 왔다고 본다. 실로 화랑도 교육은 삼국시대 우리 민족고유의 교육방식일 뿐만 아니라 한국교육사 전체의 면에서도 우리 민족의 특유한 교육방식을 준 것이다. 비록 외래사상이 조금 가미되기는 했으나, 화랑도 교육은 외래사상의 수용과 함께 곧 우리의 교육사상이나 교육방식에 맞게끔 습득 동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화랑도교육은 우리 민족교육의 전통과 이념의 발로인 만큼 순수한 우리의 대표적인 교육정신이요 교육사상이라 하겠다.
<참고자료>
● 세 속 오 계
화랑도는 신라의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 근본 정신은 5계(五戒)에 잘 나타나 있다. 5계는 '세속5계' 라고 하요 원광 법사가 매우 강조한 것이다.「삼국사기」를 통해 원광이 화랑 귀산과 그의 친우 추항( 項)에게 화랑정신의 기본인 세속 5계를 전수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귀산은 신라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 아버지는 아간(阿干) 무은(武殷)이다. 귀산은 어렸을 때부터 같은 마을의 추항을 친구로 사귀면서, '우리들이 사군자(士君子)로 교유하려면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잘 닦지 않으면 반드시 치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현자를 찾아가서 올바른 도리를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하고 상의하였다. 이때, 원광법사가 수(隨)나라에서 유학하다가 돌아와 가실사(加悉寺)에 머물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으므로 귀산과 추항은 그를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원광법사를 찾아간 그들은 공손한 태도로, '속세의 우리들은 어리석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니, 바라건데 한 말씀을 가르쳐 주신다면, 죽을 때까지 계명으로 삼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원광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계(佛戒)로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어 그것을 10계로 삼고 있지만 그대들은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서 능히 그것을 감내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지금 세속에 알맞은 5계가 있으니 그대들은 이것을 시행하라.' 하였다.
여기서 원광이 귀산 추항에게 가르쳐 준 세속 5계는, 즉 첫째, 임금을 섬김에 충성으로써 하고[事君以忠], 둘째,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하고[事親以孝], 셋째, 벗을 사귐에 신의로써 하고[交友以信], 넷째, 싸우는 마당에 임하면 물러남이 없게 하고[臨戰無退], 다섯째,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殺生有擇]는 등의 다섯 가지 계명이었다. 원광은 그들에게 이를 실행함에 있어서 소홀히 함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이에 귀산과 추항 등은, '다른 것은 다 명하는 대로 받아 하겠사오나, 이른바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만은 아직 똑똑히 모르겠나이다.' 하니 원광법사는 다시 풀어 말하기를, '6재(六齋) 날과 봄과 여름 달에는 산 것을 죽이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는 때를 가리라는 것이요,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함은 말소닭개를 말하는 것이고, 작은 생물을 죽이지 않는다 함은 물고기가 한 입가도 못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즉 이것은 물건을 가린다는 것이다. 이는 오직 그 소용되는 것에만 한하고 많은 죽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오직 그 소용되는 것에만 한하고 많은 죽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가히 세속의 착한 경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귀산은 다시 말하기를, '지금부터 법사의 계명을 잘 받들어 실수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라고 하였다.
위의 글 중에서 '6재일'이란 음력으로 매달 1일7일14일15일21일29일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 날은 불교의 사천왕(四天王)이 인간 세상을 돌아보며 사람들의 범행을 경계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원광법사에게서 세속 5계를 전수 받은 귀산추항은 계속 그것을 생활 신조로 삼았다. 그 후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9년 (602) 8월에 백제군이 침입해서 아막성(阿莫城; 지금의 雲峰)을 포위한 일이 있었다. 이때 진평왕을 파진간(波珍干) 벼슬의 건품(乾品)무이굴(武梨屈)이이벌(伊梨伐)과 급간(級干) 벼슬의 무은(武殷)비이야(比梨耶) 등에게 군사를 주어 백제군을 반격하게 하였다. 이 싸움에 귀산과 추항에게도 아울러 소감(少監) 벼슬을 내리고 싸우도록 하였다. 신라군은 잘 싸워 백제군을 대파하고 계속 도주하는 백제군을 추격하였으나, 백제군은 패주하면서 비밀히 천산(泉山)의 연못가에 복병을 숨겨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쯤 추격하던 신라군은 힘이 다 빠진 군사를 돌리게 되었을 때, 미리 천산에 숨어 있던 백제군의 복병이 뛰어나와 귀산의 아버지인 무은이 속한 후군을 엄습하였다.
이에 귀산은 큰 소리로, '내 일찍이 원광법사에게서, 용사는 싸움터에 이르러 물러서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거늘, 어찌 감히 달아날까 보냐.' 하고 외치며 백제군 속으로 뛰어들어 적 수십 명을 쳐죽인 다음 자기의 말에 아버지 무은을 태워 보내고는 추항과 더불어 칼을 휘두르면 힘을 다해 싸웠다. 이 광경을 본 신라군은 분격하여 백제군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의 복병은 전멸되어 시체가 들에 가득히 깔리고 한 필의 말, 한 짝의 수레바퀴도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귀산과 추항은 전신에 상처를 입어 돌아오는 중도에서 죽으니 이에 왕은 군신들과 함께 아나(阿那)의 들에까지 마중을 나가서 귀산과 추항의 시체를 보고 통곡하며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그들에게 벼슬을 추증하였는데, 귀산에게는 내마(柰麻)의 벼슬을, 추항에게는 대사(大舍)의 벼슬을 내렸다. 이와 같이 귀산과 추항의 죽음으로써 널리 알려진 세속5계는 이 때부터 화랑도의 실천 강목이 되었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에서 충과 효의 이념이 제시되고 있고, 교우이신(交友以信)에서는 청소년 집단의 전래의 맹우정신(comradeship)이 강조되고 있다. 아울러, 이에 덧붙여 통일 전쟁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국가적 요청에 따라 임전무퇴(臨戰無退)가 제시되었고, 그것을 불교적 정신으로 순화함에서 살생유택(殺生有擇)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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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4.28
  • 저작시기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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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07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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