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베르디의 오페라
- 초기 작품들
- 중기 작품들
2. 베르디의 생애
3.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배경으로 한 베르디의 오페라
(맥베드, 오텔로, 팔스타프를 중심으로)
4. 베르디와 바그너의 비교
-리골레토
-니벨룽의 반지
5. 오페라 '나부코'
6. 레퀴엠
7. 벨칸토
- 4편의 성가
- 초기 작품들
- 중기 작품들
2. 베르디의 생애
3.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배경으로 한 베르디의 오페라
(맥베드, 오텔로, 팔스타프를 중심으로)
4. 베르디와 바그너의 비교
-리골레토
-니벨룽의 반지
5. 오페라 '나부코'
6. 레퀴엠
7. 벨칸토
- 4편의 성가
본문내용
받고, 다음 작품 <왕국의 하루>를 작곡할 무렵 부인과 아들의 연이은 죽음을 겪었다. 낙담한 베르디는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라 스칼라 극장의 주인 메렐리는 재능 있는 작곡가의 좌절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작곡의 의욕이 솟을 만한 대본을 구했다. 메렐리는 <나부코>의 대본을 마련하여 베르디의 책상 위에 슬그머니 두고 왔다.
어느 날 베르디는 낯선 대본을 펼쳐 보다가 눈에 번쩍 띄는 구절을 발견했다.
전체 내용은 구약성경 열왕기 하편에 나오는 것으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잡혀간 유대 인들이 핍박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그 속에서 조국을 그리며 자유를 구가하는 가사에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멜로디를 붙여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포로 유대인들과 자신들을 같은 처지로 여기고 ‘노예들의 합창’을 국가처럼 불렀던 것이다. 그 노래는 절망과 우수에 빠져 있던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희망의 날개를 달아 주었다. 독립과 통일을 바란 국민들은 베르디를 애국적인 우상으로 삼고, 작품이 나올 때마다 열광을 아끼지 않았다
6. <레퀴엠>
1868년 로시니가 세상을 떠나자 베르디는 당시 저명 작곡가 11명과 공동으로 레퀴엠을 작곡하여 그 영전에 바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중 1873년 존경하던 시인 만조니가 죽자 그를 애도하기 위해 미완의 레퀴엠에 붓을 들어 1874년 완성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매우 드라마틱하며 종교적 기품보다 오페라적 화려한 색채감이 진하다.
전6곡 구성이며 제2곡 <진노의 날>은 다시 9곡으로 나뉘어져 있다.
<진노의 날> 중 제1곡 <진노의 날>, 제2곡 <이상한 나팔 소리>, 제4곡 <가엾은 나>, 제9곡 <눈물의 날> 그리고 제5곡 <아뉴스 데이> 및 마지막 제6곡 <영원의 빛>이 특히 유명하다.
그의 생애를 통해 로시니와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의 데뷔곡은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서곡이었다. 게다가 그는 1868년 로시니의 사망을 접한 베르디는 그의 1주기를 기하여서 여러 유명 작곡가가 참여해 만든 레퀴엠을 연주하여 그를 기리자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위원회가 구성되고 곡의 전반에 관해 논의하였으며 각기 악장들을 배분 받아서 곡을 쓴 후에 발표하기로 하여서 이듬해 1주기에는 이미 대부분의 준비가 이루어졌었다. 베르디는 그 중 마지막 곡인 Libera me를 맡아 썼다. 모든 준비가 다 이루어져서 연주만을 남겨놓고 있었지만 예기치 못한 연주자 사정으로 인하여 초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악보만을 봉헌하려한 것조차도 이루어지지 않고 말았다.
1873년 아이다를 다시 상연해 올리기 위해서 연습하고 있을 때 그는 I promessi sposi의 작가인 만포니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레퀴엠을 이미 작곡해 보았던 베르디는 만포니를 위해서도 그의 기념일에 연주할 곡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만포니 는 베르디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 후 리코르디에게 쓴 편지에서 그가 만초니는 베르디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 후 리코르디에게 쓴 편지에서 그가 만초니의 1주기 기념일에 연주할 레퀴엠을 써서 미사를 드리려 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를 위해서 그 시대에 유럽에서 행해지는 레퀴엠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자신이 쓸 형태를 결정하게 되는데 그는 당시 유행하던 형식에서 조금 탈피하여서 독창과 중창의 비중을 한결 높여서 레퀴엠을 완성하였다. 그 중에 어느 악장은 악장 전체가 독창과 중창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그가 로시니 레퀴엠을 기획하고 작곡한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상관 관계는 최근의 로시니 레퀴엠 전곡이 발견됨으로서 증명되었다.
몇 달 후 리코르디에 쓴 편지에서 그가 만초니의 1주기 기념일에 연주할 레퀴엠을 써서 미사를 드리려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베르디의 이 레퀴엠 미사에 대한 계획은 만초니가 죽기 직전부터, 그가 편지로 리코르다에게 알리기 수개월 전에 이미 구상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이 곡은 밀라노의 산 마르고 성당에서 1874년 5월에 초연 되었다.
이 연주에서는 당시 이태리의 대표작인 성악가들과 라 스칼라에서 뽑은 110명의 오케스트라 단원, 120명의 합창단원에 의해 베르디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그 연주는 아주 특이하게 오케스트라의 합창단이 가로로 양편으로 자리 잡고 연주되었다. 그 후에 라 스칼라에서 일반 연주회의 형태로 공연되어졌으며, 그것을 만초니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베르디는 교회에 참석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이 곡은 연주회의 형태를 띠고 많은 연주가 이루어져서 베르디가 자신이 직접 지휘한 자신의 작품 중 가장 빈번한 연주를 한 곡으로 기록되어졌다.
※네 편의 성가
그러나 베르디는 이 레퀴엠을 작곡한 후 한동안 아무 곡도 쓰지를 않았지만 그의 생애 말기에는 성가 곡을 몇 곡 작곡하였다. 베르디가 레퀴엠을 쓴지 20년 후 그는 네 편의 성가 곡을 발표하였는데 이 곡에는 그 동안 그가 작곡한 네 편의 독립된 곡들이 들어있다. 사실 이 곡집은 베르디의 의도가 아니고 출판사인 리코르디의 생각으로 편집되어 졌다. 단지 출판 상의 편의로 이 네 개의 곡들을 한데 묶어서 출판하게 된 것이다. 그 중 성모 찬가가 가장 먼저 1888년 단테의 시에 곡을 붙여 작곡되었는데, 이 곡은 당시 쓰이던 라틴어 가사를 사용하지 않고 단테의 신곡을 사용한 것이었다.
다음 해에는 아베 마리아가 작곡되었는데 이 곡은 수수께끼라는 당시 한 잡지에 게재되어서 세간에 흥미를 돋운 음계를 사용하여서 그 위에 대선율을 붙인 것이다. 이 곡은 전체가 4부로 되어있다. 그리고 1895년-6년에는 테 데움이, 그리고 가장 나중에는 1898년에 스타바트 마테르가 작곡 되어졌다. 이 스타바트 마테르는 베르디의 작품 중 가장 마지막 작품 군에 속하고, 테 데움은 소프라노 독창과 두 개의 합창을 사용한 곡이다. 이 곡들을 편집하면서 순서를 뒤바꾸어 놓았지만 첫 곡인 아베 마리아는 베르디의 의도로 초연에서는 제외시켰었다.
어느 날 베르디는 낯선 대본을 펼쳐 보다가 눈에 번쩍 띄는 구절을 발견했다.
전체 내용은 구약성경 열왕기 하편에 나오는 것으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잡혀간 유대 인들이 핍박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그 속에서 조국을 그리며 자유를 구가하는 가사에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멜로디를 붙여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포로 유대인들과 자신들을 같은 처지로 여기고 ‘노예들의 합창’을 국가처럼 불렀던 것이다. 그 노래는 절망과 우수에 빠져 있던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희망의 날개를 달아 주었다. 독립과 통일을 바란 국민들은 베르디를 애국적인 우상으로 삼고, 작품이 나올 때마다 열광을 아끼지 않았다
6. <레퀴엠>
1868년 로시니가 세상을 떠나자 베르디는 당시 저명 작곡가 11명과 공동으로 레퀴엠을 작곡하여 그 영전에 바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중 1873년 존경하던 시인 만조니가 죽자 그를 애도하기 위해 미완의 레퀴엠에 붓을 들어 1874년 완성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매우 드라마틱하며 종교적 기품보다 오페라적 화려한 색채감이 진하다.
전6곡 구성이며 제2곡 <진노의 날>은 다시 9곡으로 나뉘어져 있다.
<진노의 날> 중 제1곡 <진노의 날>, 제2곡 <이상한 나팔 소리>, 제4곡 <가엾은 나>, 제9곡 <눈물의 날> 그리고 제5곡 <아뉴스 데이> 및 마지막 제6곡 <영원의 빛>이 특히 유명하다.
그의 생애를 통해 로시니와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의 데뷔곡은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서곡이었다. 게다가 그는 1868년 로시니의 사망을 접한 베르디는 그의 1주기를 기하여서 여러 유명 작곡가가 참여해 만든 레퀴엠을 연주하여 그를 기리자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위원회가 구성되고 곡의 전반에 관해 논의하였으며 각기 악장들을 배분 받아서 곡을 쓴 후에 발표하기로 하여서 이듬해 1주기에는 이미 대부분의 준비가 이루어졌었다. 베르디는 그 중 마지막 곡인 Libera me를 맡아 썼다. 모든 준비가 다 이루어져서 연주만을 남겨놓고 있었지만 예기치 못한 연주자 사정으로 인하여 초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악보만을 봉헌하려한 것조차도 이루어지지 않고 말았다.
1873년 아이다를 다시 상연해 올리기 위해서 연습하고 있을 때 그는 I promessi sposi의 작가인 만포니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레퀴엠을 이미 작곡해 보았던 베르디는 만포니를 위해서도 그의 기념일에 연주할 곡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만포니 는 베르디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 후 리코르디에게 쓴 편지에서 그가 만초니는 베르디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 후 리코르디에게 쓴 편지에서 그가 만초니의 1주기 기념일에 연주할 레퀴엠을 써서 미사를 드리려 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를 위해서 그 시대에 유럽에서 행해지는 레퀴엠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자신이 쓸 형태를 결정하게 되는데 그는 당시 유행하던 형식에서 조금 탈피하여서 독창과 중창의 비중을 한결 높여서 레퀴엠을 완성하였다. 그 중에 어느 악장은 악장 전체가 독창과 중창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그가 로시니 레퀴엠을 기획하고 작곡한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상관 관계는 최근의 로시니 레퀴엠 전곡이 발견됨으로서 증명되었다.
몇 달 후 리코르디에 쓴 편지에서 그가 만초니의 1주기 기념일에 연주할 레퀴엠을 써서 미사를 드리려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베르디의 이 레퀴엠 미사에 대한 계획은 만초니가 죽기 직전부터, 그가 편지로 리코르다에게 알리기 수개월 전에 이미 구상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이 곡은 밀라노의 산 마르고 성당에서 1874년 5월에 초연 되었다.
이 연주에서는 당시 이태리의 대표작인 성악가들과 라 스칼라에서 뽑은 110명의 오케스트라 단원, 120명의 합창단원에 의해 베르디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그 연주는 아주 특이하게 오케스트라의 합창단이 가로로 양편으로 자리 잡고 연주되었다. 그 후에 라 스칼라에서 일반 연주회의 형태로 공연되어졌으며, 그것을 만초니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베르디는 교회에 참석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이 곡은 연주회의 형태를 띠고 많은 연주가 이루어져서 베르디가 자신이 직접 지휘한 자신의 작품 중 가장 빈번한 연주를 한 곡으로 기록되어졌다.
※네 편의 성가
그러나 베르디는 이 레퀴엠을 작곡한 후 한동안 아무 곡도 쓰지를 않았지만 그의 생애 말기에는 성가 곡을 몇 곡 작곡하였다. 베르디가 레퀴엠을 쓴지 20년 후 그는 네 편의 성가 곡을 발표하였는데 이 곡에는 그 동안 그가 작곡한 네 편의 독립된 곡들이 들어있다. 사실 이 곡집은 베르디의 의도가 아니고 출판사인 리코르디의 생각으로 편집되어 졌다. 단지 출판 상의 편의로 이 네 개의 곡들을 한데 묶어서 출판하게 된 것이다. 그 중 성모 찬가가 가장 먼저 1888년 단테의 시에 곡을 붙여 작곡되었는데, 이 곡은 당시 쓰이던 라틴어 가사를 사용하지 않고 단테의 신곡을 사용한 것이었다.
다음 해에는 아베 마리아가 작곡되었는데 이 곡은 수수께끼라는 당시 한 잡지에 게재되어서 세간에 흥미를 돋운 음계를 사용하여서 그 위에 대선율을 붙인 것이다. 이 곡은 전체가 4부로 되어있다. 그리고 1895년-6년에는 테 데움이, 그리고 가장 나중에는 1898년에 스타바트 마테르가 작곡 되어졌다. 이 스타바트 마테르는 베르디의 작품 중 가장 마지막 작품 군에 속하고, 테 데움은 소프라노 독창과 두 개의 합창을 사용한 곡이다. 이 곡들을 편집하면서 순서를 뒤바꾸어 놓았지만 첫 곡인 아베 마리아는 베르디의 의도로 초연에서는 제외시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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