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에서의 개인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유교에서의 개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서구의 개인
3. 관계의 도덕성
4. 개인과 국가
5. 유교에서의 개인
6. 가족과 사회
7. 의무의 갈등: 충과 효
8. 결어

본문내용

에서는 우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가족에의 유대가 정치적인 권위, 나아가서는 황제의 권위에 대한 유대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에 반하여, 비슷한 곤경에 빠진 자식은 주군에게 이를 고지할 의무가 일본에는 있었다. 大名(だいみょう), 즉 군주에 대한 충성이 가족에 대한 충성보다 앞섰던 셈이다. 도꾸가와 시대의 주자학의 대가인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齊, 1618-82)의 {大和小學}에서는 아버지가 반역을 했을 경우 주군에게 고발해야 하며 이는 사적인 은혜를 위하여 공적인 의리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라는 식의 논지를 펼치고 있다. 그리고 무사도의 개요서였던 (하가꾸레){葉隱}에서는 "우리의 의무는 주군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ㅗㅗㅗ 나는 설령 죽는다 하더라도 '주군의 가문'을 지키기 위하여 일곱 번도 더 살아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천황의 위치라는 것도 중국의 황제와는 다르다. 국학을 대성한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는 "이 國土를 生成한 神祖命(카무로기노미꼬토)이 몸소 내리신 皇統이며 天地가 시작한 이래 天皇統治의 나라로 정해져 있는 天下로서 天照大御神의 詔에도 惡한 天皇이면 복종하지 말라고는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좋든 나쁘든 옆에서 틈을 보고 있다가 찬탈해서는 안되며, 天地와 함께 日月이 빛을 비추고 있는 한은 몇 萬代를 거쳐도 흔들림이 없는 大君인 것이다"라고 논하고 있다. 요컨대, 천황은 중국의 황제와는 달리 천명사상에도 흔들림이 없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상의 비교를 감안한다면, 중국 유교의 특색은 가족에 대한 의무에 중심적인 역할을 부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통 유교는 황제와 그가 유지하는 관료 엘리뜨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지만, 가족이 국가의 통제로부터 사적인 자율을 상당할 정도로 보호하는 방파제로서 크게 부각되었다. 일본에서는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정치적인 권위가 가족을 통제하며 이론적으로 권위가 강제하는 바로부터 안전한 자율적인 영역은 없었다.
반면에 중국에서는 황제의 권위조차도 절대적이 아니었다. 전술한 것처럼 천명사상은 황제가 부도덕적으로 행동하면 그 자리를 물러나게 된다. 이에 비하여, 일본의 황제를 제어할 수 있는 천명사상이 없었다. 新儒敎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그 교의가 황제와 지배계층의 권위를 손상하지 않고 일본의 무사도(武士道)에 적합하게끔 변모시킨 셈이다. 야마자기 안사이는 중국이 공자를 대장으로 하고 맹자를 부장으로 하여 일본을 공격하면, 공맹을 생포하여 국은(國恩)에 보답하는 것이 공맹의 도라고 가르쳤다. 물론 토쿠가와 시대에 주자학이 일본에 도입될 무렵에 충과 효의 상대적인 서열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충이 결국에는 상좌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충효 사이의 갈등에서 한국인은 어느 편에 섰을까? 효를 중시한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산림(山林)이라는 것이 있어서 벼슬길에 일정한 거리를 두었으며 마지못한 경우에 출사(出仕)하는 예를 들 수 있겠다. 그리고 국난을 당해도 부모의 3년상을 이유로 물러나는 예에서 알 수 있겠다.
그렇다면, 유교의 정통 교의에서는 효와 충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도록 지침을 내렸겠는가? 우선 그러한 갈등이 일어나리라고 상정할 수 없다. 질서가 잘 잡힌 사회에서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어난다면, 정통 유교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전술한 것처럼 효가 우선이라고 여겨졌다고 하겠다.
이러한 충과 효의 차이는 일본인이 회사에 대하여 가지는 태도에도 차이를 읽을 수 있다. 일본의 회사원은 자신과 가족 그리고 회사를 위해서 땀을 흘리기도 하지만, 일본국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일을 한다는 사명감이 구미인에 비하여 강하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오늘날 일본인은 국가정향적이라기보다는 집단정향적인 문화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전후의 일본인들은 국가를 존경하기도 하겠지만, 대일본 제국이 추구한 '공공적인 존재'로서 국가라는 관념은 패전의 허망함과 더불어 그 모습이 없어졌으며 국가는 반(半)허구적인 존재로 보이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일본인은 그들이 몸을 담고 있는 사적인 조직이나 기업 혹은 대학에 감정적으로는 일차적인 애착이 가겠다고 하겠다. 戰前에는 국가가 충성의 일차적인 대상이었겠지만, 패전 이후에는 극우를 제외하고는 국가의 목표에 보다 염두를 두는 예의 민족주의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고 하겠다. 이는 다른 말로 바꾸면, 예전에 존중되었던 충이라는 정신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상숭배는 형식적이 되어버렸고 '부모에게 효도함'(親孝行)도 이미 사어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오늘날의 일본사회를 유교의 관점으로 보기보다는 '상황에 맞춘 공리주의'가 행동의 원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8. 결어
전술한 것처럼 유교에 기반을 두는 사회는 인간관계를 도덕적으로 고양시킨다. 이런 동양 사회가 가진 위계적이고 집단정향적인 가치와 풍습이 서양의 입장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저해할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상하관계에 복종하고 개인에 앞서 집단을 내세운다고 해서 개인의 자유와 그 완성이 부정되거나 억압을 받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집단과 관계를 강조하는 바로 그 구조에서부터 개인의 존엄과 생의 의미가 도출될 수도 있다. 위계적인 관계가 오히려 저해나 장해라기보다는 증진의 기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계 내지는 관계에서 공존하는 의무와 책임을 충심으로 준수하는 데에서 개인의 완성이 나타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 지역에서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주의가 정착하게 되는 조짐을 보이게 되자, 많은 학자들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씨앗을 유교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이 노력은 유교 문화권에서의 개인이 가족, 사회 그리고 국가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나아가서는 그 의미하는 바가 어떻게 변모하였는지를 아울러 고려하여야 하는 것이 옳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유교에서의 개인이라는 문제는 보다 면밀한 연구가 앞으로 필요하다고 하겠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7.10.13
  • 저작시기2007.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689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