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집권기 결사운동과 교선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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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무신집권기 결사운동과 교선통합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릿말

Ⅱ. 결사운동의 배경과 창립과정
(1) 결사운동의 배경
(2) 정혜결사의 취지
(3) 정혜결사의 창립과정

Ⅲ. 지눌의 선사상과 교선통합
(1) 지눌의 선사상
(2) 교선통합

Ⅳ. 수선사의 성립과 전개
(1) 수선사의 성립
(2) 진각국사 혜심
(3) 수선사와 최씨무인정권

Ⅴ. 天台宗의 白蓮社 結社
(1) 了世의 백련사 개창
(2) 백련사의 사상적 배경과성격
(3) 백련사와 사회세력

Ⅵ. 맺음말

본문내용

중 3,4명을 모아 결사를 이루고 정혜사라 한다. 이 때 나온 것이 <권수정혜결사문> (명종 20년1190)이다. 제 2차 정혜결사는 지눌이 신종 원년(1198) 지리산 상주무암에 은거한 후부터 희종 6년(1210) 53세로 입적하는 13여 년간이다. 이 시기에 지눌은 결사 이념의 실천에 매진하였다. 제1차 정혜결사 결성 이후 10여년을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장소가 좁아 불편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눌은 적당한 장소로 송광산 길상사를 택하여 명종 27년 이곳에서 정혜사를 중창하였다. 그러나 이웃에 고려 중기에 창건된 정혜사라는 사찰이 이미 있었으므로 왕명을 받아 사명을 수선사라 하였다. 이로부터 5년 후 희종원년에 수선사의 중창고사는 마무리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결사시대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를 제2차 수선결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희종은 산의 이름을 바꾸어 조계산이라 하였으며, 수선사라고 자신이 쓴 편액을 내렸다.
<정혜결사문>은 정혜를 모두 닦을 것을 주지로 하는 결사의 취지문이다. 지눌은 이 결사문에서 서설(차례를 따라 차근차근 설명함)적으로 당시 승려의 타락상과 불교의 부패상을 지적하고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정혜를 고르게 닦을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서 당시 불교계에서 논의되던 여러 가지 문제점, 즉 ①염불수행과 정혜쌍수 ②수선과 신통 ③자성과 정혜쌍수 ④불도와 말세중생 ⑤성적등지와 돈교이문 ⑥정혜와 이타행 ⑦정혜와 정토수행 등을 일일이 해명해 가는 가운데 수선, 정혜쌍수, 성적등지의 필요성을 재삼 반복하여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결사문에서 제기된 문제들 중 당시 불교계의 상황과 관련하여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정토신앙의 문제였고 다른 한 가지는 선교대립의 문제였다. 지눌은 이 두 가지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그 해결방안으로서 역시 정혜쌍수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정혜결사의 취지인 것이다.
정토신앙의 경우 지눌은 그 일면을 인정하였다. 즉 밝고 고요한 본성 가운데에서 정토에 태어나기를 구하는 사람은 선정과 지혜와 공덕이 있기 때문에 부처의 깨달은 경지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다만 저 정토만 바라본다면 곧 상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고 우려하였다. 그는 따라서 유심정토설을 강조하여 타력적 정토신앙을 부정하고 오직 마음을 밝게 하고 그것을 그대로 관찰하면 절로 정토에 반드시 태어난다고 여겼다.
두 번째로 그는 선, 교의 대립을 비판하고 선학자와 교학자의 문제점, 즉 전자가 헛되이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에 빠진 점과 후자가 다만 문자만 찾는 미친 지혜에 떨어진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선교통합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근거와 원리를 역시 정혜쌍수에서 찾고 있다. 지눌에게는 깨달음의 길에 있어서 선종과 교종의 구별은 없다. 문제는 제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고 정혜를 올바로 닦는 데에 있을 뿐이었다. 당나라 圭峰宗密(규봉종밀)의 선교통합원리에 큰 영향을 받는다. 양자의 차이는 종밀의 선교통합이 이념상의 문제였던 것에 반해 지눌의 그것은 실천적 수행상의 문제였다는 점이다.
해결방안으로서의 지눌의 정혜쌍수는 개인적 차원의 수행으로서가 아니라 무지한 중생들과 함께 하려는 간절한 서원을 표명하고 있다. 이는 지눌의 사회의식을 나타내주는 것으로서 고려중기 선사상이 경향이 다분히 귀족적이고 고답적이면서 개인적인 수업 형태를 중시하였던 것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정혜쌍수 후에 적극적인 이타행, 즉 중생구제의 보살도가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점도 역시 사회에 대한 인식과 연관하여 주목할 만하다 할 수 있다.
한편 수선사가 창립될 때 그 후원세력이 지방사회의 호장을 중심으로 한 향리층과 일반민 이었다는 점은 수선사의 사회적 성격과 연관하여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일반민이 수선사 중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그들이 12세기 사회경제의 변화와 지배체제의 동요과정에서 전반기 농민의 유망과 후반기의 농민, 천민의 항쟁을 경험하면서 사회의식이 성장한데다 이러한 변화에 상응하여 수선사가 중앙귀족불교를 배격하고 새로운 선사상에 의한 불교개혁 및 이타행의 강한 실천적 의지를 표방하면서 모든 계층에게 결사참여의 문을 활짝 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앙정치권력이 아닌 지방사회 특히 향리층의 후원으로 수선사가 성립하였기 때문에 우선 그 지원규모가 크지 않아 사원재정이 넉넉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수선사의 세력도 전남의 일부지역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지눌의 입적 후 제자들이 왕실, 최씨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영향을 인근지역에서 개경까지로 확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정치권력과 밀착하지 않으므로 결사정신은 유지되었고 문벌귀족의 정치적 갈등에 편승하여 종교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 일반민과 유리되어 갔던 양상과는 크게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지눌의 정혜결사는 세속과 교단의 부패상을 비판하고 부정하면서 정치권력과 기존의 교단으로부터 독립해서 돈오점수, 정혜쌍수에 근거한 신앙결사를 형성, 수행하고 그 공덕을 일반대중에게 희향함으로써 역사를 정화해 가려고 한 신불교운동이었으나, 이러한 정혜결사는 지눌이후 정치권력과 밀착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으며 전개되었다.
(2) 진각국사 혜심
瞋覺國師 慧諶(1178~1234)은 사마시(신종 4년 1201, 24세)에 합격까지 했으나 모친의 발병으로 낙향하게 되었고 다음해인 25세에 모친의 죽음 등이 동기가 되어 출가하여 불도에 발을 내딛었다. 당시 조계산에서 수선사를 열고 새로운 선풍을 펴던 보조국사 지눌에게 나아가 득도한 그는 곧 지눌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꾸준히 불도를 닦은 그는 지눌이 입적하자 (희종6년,1210) 지눌을 잇는 조계산 제2세주지로 진산 하였으니 33세 때의 일이다. 혜심은 지눌과의 狗子無佛性話(구자무불성화)와 十種(십종병)의 대화를 통해 인가 받는다. 구자무불성화는 당시 간화선의 대표적인 화두였고 십종병은 무자화두를 참구함에 있어 삼가야할 열 가지 병통을 밝힌 것이다.
이때부터 24년간 그는 지눌의 선풍을 이어 진작시키면서 역대 고려왕으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개경으로 그는 맞아 드리려는 집권자의 뜻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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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0.11
  • 저작시기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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