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중종반정과 그 후의 왕권과 신권의 대립
2. 조광조의 중종의 만남
3. 조광조의 개혁
(1) 소격서 폐지
(2) 현량과 실시
(3) 위훈삭제
(4) 중종의 배신, 기묘사화 (1519)
4. 조광조에 대한 평가
2. 조광조의 중종의 만남
3. 조광조의 개혁
(1) 소격서 폐지
(2) 현량과 실시
(3) 위훈삭제
(4) 중종의 배신, 기묘사화 (1519)
4. 조광조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면서도 결코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선조 대에 이르러 정치의 주도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바야흐로 사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때 이르러 조광조는 역사에 새롭게 자리 매김 되었다. 결국 올바른 방향과 목적을 가진 개혁이라면, 한 때 좌절했더라도 실패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조광조의 묘와 사당
조광조의 묘는 1650년(효종1년) 조광조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공론에 의거, 설립하고 위패를 모셨다.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용인에서는 일찍부터 서원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재력이 넉넉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현면의 정몽주를 배향한 충렬서원에 입향 하였다가, 이 서원이 설립되면서 위패를 옮겨 왔으며 양팽손을 추가 배향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심곡서원이다. 심곡서원은 효종 원년(1650)에 세워졌으며 시도유형문화재 제 7호로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 203-2에 소재하고 있으며, 서원의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고 서원 옆에서는 경기도 보호수인 5백년 느티나무와 향나무가 서있다. 이 서원은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세원이다. 이 서원의 ‘심곡‘이라는 현판과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무사했던 전국 47개 서원중의 하나로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교육을 담당하였다. 마을 뒤쪽 야산에 서쪽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 외삼문, 강당인 일소당, 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 안의 여러 행사와 유림이 모여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로서 각 칸마다 널문을 달아 사면을 전부 열 수 있게 하였다.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사당은 앞면에 트인 퇴칸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사당을 둘러싸고 담장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으며, 내삼문은 3칸의 솟을대문 형식이다.
* 중종의 능
중종의 능은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하여 있으며 선정릉이라고 하여 선릉은 9대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의 무덤이고, 정릉은 11대 중종의 무덤이다.
중종은 원래 중종1계비인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리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제도를 본떴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임진왜란 때는 선정릉의 양릉이 훼손되는 변을 겪게 된다. 제사를 지내는 방은 양릉의 사이에 있으며, 여름철의 침수를 피하기 위해 층단에 지었는데 이러한 예는 선릉, 정릉뿐이다.
*목차
1. 중종반정과 그 후의 왕권과 신권의 대립
2. 조광조의 중종의 만남
3. 조광조의 개혁
(1) 소격서 폐지
(2) 현량과 실시
(3) 위훈삭제
(4) 중종의 배신, 기묘사화 (1519)
4. 조광조에 대한 평가
* 조광조의 묘와 사당
조광조의 묘는 1650년(효종1년) 조광조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공론에 의거, 설립하고 위패를 모셨다.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용인에서는 일찍부터 서원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재력이 넉넉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현면의 정몽주를 배향한 충렬서원에 입향 하였다가, 이 서원이 설립되면서 위패를 옮겨 왔으며 양팽손을 추가 배향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심곡서원이다. 심곡서원은 효종 원년(1650)에 세워졌으며 시도유형문화재 제 7호로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 203-2에 소재하고 있으며, 서원의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고 서원 옆에서는 경기도 보호수인 5백년 느티나무와 향나무가 서있다. 이 서원은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세원이다. 이 서원의 ‘심곡‘이라는 현판과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무사했던 전국 47개 서원중의 하나로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교육을 담당하였다. 마을 뒤쪽 야산에 서쪽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 외삼문, 강당인 일소당, 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 안의 여러 행사와 유림이 모여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로서 각 칸마다 널문을 달아 사면을 전부 열 수 있게 하였다.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사당은 앞면에 트인 퇴칸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사당을 둘러싸고 담장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으며, 내삼문은 3칸의 솟을대문 형식이다.
* 중종의 능
중종의 능은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하여 있으며 선정릉이라고 하여 선릉은 9대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의 무덤이고, 정릉은 11대 중종의 무덤이다.
중종은 원래 중종1계비인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리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제도를 본떴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임진왜란 때는 선정릉의 양릉이 훼손되는 변을 겪게 된다. 제사를 지내는 방은 양릉의 사이에 있으며, 여름철의 침수를 피하기 위해 층단에 지었는데 이러한 예는 선릉, 정릉뿐이다.
*목차
1. 중종반정과 그 후의 왕권과 신권의 대립
2. 조광조의 중종의 만남
3. 조광조의 개혁
(1) 소격서 폐지
(2) 현량과 실시
(3) 위훈삭제
(4) 중종의 배신, 기묘사화 (1519)
4. 조광조에 대한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