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진왕 정과 전국시대
1) 진왕 정의 탄생
2) 실패로 돌아간 암살 사건
3) 여섯 나라를 멸하고 전국을 통일하다
2.시황제의 통일 사업
1) 시황제의 얼굴
2) 진제국을 지탱한 사상
3) 통일제국, 제도를 통일하다
4) 황제, 천하를 순행하다
3.다시 시작된 전쟁과 시황제의 죽음
1) 만리장성
2) 시황제의 죽음
1) 진왕 정의 탄생
2) 실패로 돌아간 암살 사건
3) 여섯 나라를 멸하고 전국을 통일하다
2.시황제의 통일 사업
1) 시황제의 얼굴
2) 진제국을 지탱한 사상
3) 통일제국, 제도를 통일하다
4) 황제, 천하를 순행하다
3.다시 시작된 전쟁과 시황제의 죽음
1) 만리장성
2) 시황제의 죽음
본문내용
북부의 초원지대이다. 진나라가 흉노에게서 빼앗은 말을 기를 수 있는 목장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다음 해인 33년, 남방에서도 육량지역 다시 말하자면 백월이 거주하는 산간지대도 빼앗아 계림 상 남해의 세 군을 설치하였다. 오로도스 북쪽의 황하 변경에도 보루를 쌓았다. 전국시대 말기의 전쟁이 여섯 나라와의 내전이었다면 이번에는 대외 전쟁으로 임전 태세를 요구하였다. 시황 34년에는 남으로는 성새, 북으로는 장성을 쌓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렇게 대외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 장성을 축조했지만, 오히려 너무 많은 인구가 동원되고, 그 과정도 혹독해서 백성들의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2) 시황제의 죽음
시황 37년(기원전 210년) 드디어 마지막 제 5차 순행이 시행되었다. 제 4차의 순행으로부터 5년만의 일이다. 흉노 그리고 백월과 치른 남북 대외 전쟁이 일단락되었기 때문에 순행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시황제도 해가 거듭되어 쉰 살이 꽉 찬 나이었다. 그 해의 순행은 대체로 1년에 걸쳐서 전국을 도는 것이었다. 황제가 1년 동안 수도를 비운다는 것은 특별한 사태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황제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죽음을 맞은 것일까? 아니면 순행 도중에 예기치 않게 병사한 것이었을까? ‘사기’에는 시황 37년의 일로서 “서쪽 평원진에 이르러 병이 났다.” 그리고 “7월 병인일 시황제가 사구평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 적고 있다. 산동반도에서 황하로 나간 시황제의 순행 일행이 평원진을 건너 황하를 건넜을 때에 시황제는 병이 났다. 그리고 사구의 평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평원진은 현재의 지명으로 말하면 산동성 평원현의 남쪽, 사구는 하북성 거록현 부근이다. 평원진은 현재 황하가 흐르는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에서 서북으로 70km, 사구는 평원진에서 서쪽으로 12km 지점에 위치한다. 진나라 시대의 황하는 춘추시대 이래 현재보다도 상당히 북쪽으로 흘러 천진부근에서 발해로 흘렀다. 평원진은 바로 당시 황하를 건너는 곳이고, 사구는 춘추 이전 특히 황하의 물길이었던 대륙택이라는 호수 근처에 있었다. 사구의 모래도 미세한 황하의 진흙이 퇴적된 토지인 것을 알 수 있다. 사마천 시대에 평원진은 황하 주변을 건너는 장소였지만, 2백년이 흐른 후한 시대에는 황하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물가도 없었다. 시황제는 순행 도중에 길에서 뜻하지 않게 죽에 된 것이 아니고 황하를 급히 건너 부랴부랴 이궁이 있는 사구까지 옮겨진 것이다.
사구에서 죽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곳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사구궁 지역이고 무령왕이 죽었던 장소이다. 그리고 은의 주왕의 이궁인 사구원대가 설치되었었다. 이곳은 당시 식물이나 동물자원이 풍부한 토지로 금원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이 사구는 은나라 이래의 금원이 전국시대 조나라를 거쳐 진나라로 이어졌던 것이다. 시황제가 휴식하기에는 적합한 장소였다.
황제의 죽음은 모두 극비사항이고 사마천은 시황제의 죽음을 기록하기에는 어떠한 정보도 없고 애매한 상태로 있었다. 그렇지만 시황제의 죽음이 전설로만 흐르고 말았던 것은 아니다.
2) 시황제의 죽음
시황 37년(기원전 210년) 드디어 마지막 제 5차 순행이 시행되었다. 제 4차의 순행으로부터 5년만의 일이다. 흉노 그리고 백월과 치른 남북 대외 전쟁이 일단락되었기 때문에 순행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시황제도 해가 거듭되어 쉰 살이 꽉 찬 나이었다. 그 해의 순행은 대체로 1년에 걸쳐서 전국을 도는 것이었다. 황제가 1년 동안 수도를 비운다는 것은 특별한 사태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황제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죽음을 맞은 것일까? 아니면 순행 도중에 예기치 않게 병사한 것이었을까? ‘사기’에는 시황 37년의 일로서 “서쪽 평원진에 이르러 병이 났다.” 그리고 “7월 병인일 시황제가 사구평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 적고 있다. 산동반도에서 황하로 나간 시황제의 순행 일행이 평원진을 건너 황하를 건넜을 때에 시황제는 병이 났다. 그리고 사구의 평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평원진은 현재의 지명으로 말하면 산동성 평원현의 남쪽, 사구는 하북성 거록현 부근이다. 평원진은 현재 황하가 흐르는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에서 서북으로 70km, 사구는 평원진에서 서쪽으로 12km 지점에 위치한다. 진나라 시대의 황하는 춘추시대 이래 현재보다도 상당히 북쪽으로 흘러 천진부근에서 발해로 흘렀다. 평원진은 바로 당시 황하를 건너는 곳이고, 사구는 춘추 이전 특히 황하의 물길이었던 대륙택이라는 호수 근처에 있었다. 사구의 모래도 미세한 황하의 진흙이 퇴적된 토지인 것을 알 수 있다. 사마천 시대에 평원진은 황하 주변을 건너는 장소였지만, 2백년이 흐른 후한 시대에는 황하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물가도 없었다. 시황제는 순행 도중에 길에서 뜻하지 않게 죽에 된 것이 아니고 황하를 급히 건너 부랴부랴 이궁이 있는 사구까지 옮겨진 것이다.
사구에서 죽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곳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사구궁 지역이고 무령왕이 죽었던 장소이다. 그리고 은의 주왕의 이궁인 사구원대가 설치되었었다. 이곳은 당시 식물이나 동물자원이 풍부한 토지로 금원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이 사구는 은나라 이래의 금원이 전국시대 조나라를 거쳐 진나라로 이어졌던 것이다. 시황제가 휴식하기에는 적합한 장소였다.
황제의 죽음은 모두 극비사항이고 사마천은 시황제의 죽음을 기록하기에는 어떠한 정보도 없고 애매한 상태로 있었다. 그렇지만 시황제의 죽음이 전설로만 흐르고 말았던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