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광의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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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사마광의 생애와 사상

2. 당대의 시대적 배경

3. 신법의 등장과 자치통감의 완성

4. 사마광의 실각과 자치통감 저술의 연관성

5. 자치통감 편찬의 진의

6. 자치통감의 서법과 형식

7. 신광왈(臣光曰)

8. 맺음말

9. 참고자료

본문내용

형식을 창조하여 춘추나 좌전을 그 세계 속에 포함시켜버린 것은 그의 새롭고 거대한 정신이 시대와 낡은 형식을 돌파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고금을 포괄하려는 통사를 시도하면서 사마광은 그 시대와 경'을 넘어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2에 대해 살펴보자. 도통이라는 것은 선왕의 도를 단절시켜서는 안되며, 그 도를 계승하여 대대로 전해가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는 지속의식을 말한다. 송학의 선구자라 일컬어지는 한유는 「원도(原道)」가운데에서 선왕의 도의 전통과 그 단절을 말하여 명확한 형태로 도통설을 제기 했는데,이 설은 송대의 주.정에 의해 계승되고 주자에 이르러 확립된 것이다. 도통설은 주자에 이르러 보다 명확하고 보다 국한된 계보가 되었지만, 원래는 널리 성인의 도의 전수라는 지속의식을 말하며, 사마광의 좌전계승은 사학에 있어서의 도통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공자-좌구명 다음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정통적 사학의 전통을 회복시키려 한 것이었다. 도통설은 또한 정통주의와 결합되고 있다.
송학은 또한 이단(이단)적인 도학, 불교 두 교에 대한 유교의 정통성의 선언이었다. 이른바 삼현(노자, 장자, 주이)을 애독한 육조의 귀족에게 있어 유교적인 가치는 반드시 유일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불전을 내전'이라 하고 경서를 외전'이라고 하는 호칭 가운데에서도 유교 권위의 실추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가치의 혼란과 근본정신의 망각은 당대에 들어와서도 변함이 없었으며, 태종의 칙령에 의해 「오경정의」가 편찬은 되었지만, 유생들은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려고는 하지 않고 도리어 유학의 정체를 초래했다. 한편 불교 쪽에서는 정밀한 이론구성이 완성되고 선(禪)도 일어났다. 이러한 유학의 혼미와 가치의 혼란상태에 대해서 중국의 학문으로서의 유교의 정통성을 주장한 사람이 한유이었는데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유교의 장에서 도교, 불교 두 교를 지양하고 통일함으로써 유교 그 자체를 보강하고 그 정통성을 복권시킨 것이 송학이었다.
마찬가지로 통감의 좌전 계승은 기전체에 대한, 가장 정통적이 사체인 편년체의 복권 시도였다. 물론 사마광에게는 유가가 도불을 이단으로서 배척할 만큼의 적대의식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류라 할 수 있는 편년체가 지류인 기전체에 압도되어 쇠미해지고 있다는 의식은 있었을 것이다. 통감은 좌전과 직결함으로써 사기 - 오대사기의 기전체에 대항하고 춘추-좌전-통감이라는 편년체 계열을 확립하여 일거에 그 실지회복을 꾀한 것이다.
7. 신광왈(臣光曰)
통감도 역대의 사서처럼 論贊을 설정해 놓고 있다. 자치통감의 論贊은 개개의 歷史事象을 임으로 취하여 비평을 가하고 있는데 대부분 군신에 관한 사적이다. 또 신광왈에서 내세운 것에서 개성적이거나 참신한 사상은 없다. 그가 지향했던 것은 역사의 흐름속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는 보편성, 범용함이었던 것이다. 그의 신광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易과 禮이다. 요컨대 易은 순환론이다.. 이것은 시간의 추이를 설명하는 것 같지만 실은 세계를 虛에서 시작하여 虛로 돌아가는 완결된 통일체로 보아 극히 정태적으로 파악한 사유였다. 그는 역사를 변하는 모습이 아니라 불변의 모습으로 파악한다. 움직이고 전변(轉變)하는 가운데 불변의 것이 있으니 이것이 도(道)이다. 신광왈을 다른 한편으로 말하면 '禮'의 체계이다. 그에게 있어서 '禮'는 무엇보다도 질서의 원리였다. 君과 臣이 분수를 지킴으로서 세상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제왕의 분은 '德'이고 신하의 분은 '忠'과 '節'이다. 그런데 이러한 엄격한 명분론을 주장한 사마광은 '隱'이라는 창을 마련해 두었다. 은둔은 입을 다물고 세상사를 말하지 않는 자세까지 포함한 것으로 난세에서 자기 목숨을 보전한 '隱'의 실천자를 다수 현장하고 있다. 이런 士人의 태도를 '明哲保身'이라 하였다. 사마광은 난세에 신하의 처세법에 관해 말함으로서 자신의 입장을 나타냈는지도 모르겠다.
8. 맺음말
이상에서 「자치통감」과 사마광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로써 통감이 선택된 사건을 시간에 따라 단순하게 나열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단순하기는 커녕 사마광은 지극히 용의주도하게 사건을 재배열하고 있는 것이다. 사서에서 순수한 객관주의는 원래 존재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통감에서 객관주의라 해도 단지 개개의 사실에 정확을 기울인 말하자면, 조건부의 것인 듯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개개의 사실 그 자체부터가 본래 사마광이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고 ,그러한 무수한 사실의 선택과정에서도 그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통감을 교과서적으로 객관주의라는 시점으로만 파악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마광 자신이 신법당에게 밀려난 당의 영수로서 낙양에 은거한 자신의 정당성과 신법천하를 비판을 은연중에 나타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감의 출현은 편잔진에 의한 부산물이나 범조우의 「당감」등과 함께 중국의 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이제까지의 지나치게 방대하고 산만하여 지식인층에서도 잘 읽지 못했던 역사서를 체계적으로 쉽게 정리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높였고 ,그에 호응하는 역사학 관계의 저작이 활발하게 되었다. 그밖에 역사론에도 영향을 주어 성황을 이루었고 고대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게 하였던 것이 바로 「자치통감」에 의해서이다. 자치통감은 실로 여러 가지 면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 조사를 통하여 통감뿐 아니라 통감을 등장시킨 송대의 문화적 기류를 조금 살펴볼 수 있었다. 정리해보자면 역사의 격동기에서 송 사대부들의 건설의욕과 여기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는 역사적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여 봄으로써 생의 근거를 역사속에서 찾고자하는 갈망 같은 것이 드러났다. 또한, 도교적 기풍과 불교에 잠식당하고 위축되었던 유학을 흥륭시키고 고대에로 복귀하고자 하는 당대 지식인들의 고대부흥 기운이 왕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료를 통하여 이러한 것들을 추측해본다는 것이 지나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랜 세월에 걸친 편찬과 그 사이의 상황들로 보아서 자치통감은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 보며 맺기로 한다.
9. 참고자료
민두기, 중국의 역사인식,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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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1.18
  • 저작시기2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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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47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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