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
2. 고구려의 건국
3. 고구려의 발전양상
(1) 부족연맹체의 형성
(2) 고구려의 저항
(3) 계루부의 대두
(4) 고대국가의 성립과 지배체제의 강화
4. 신라, 백제와의 외교관계
5. 중국, 일본, 변방민족과의 대외관계
6. 소수림왕의 체제정비 및 대외팽창 정책
7. 광개토왕의 정복사업
8. 장수왕의 정복활동
9. 국토 상실과 고구려의 멸망
10. 역사적 의의 고찰
11. 참고자료
2. 고구려의 건국
3. 고구려의 발전양상
(1) 부족연맹체의 형성
(2) 고구려의 저항
(3) 계루부의 대두
(4) 고대국가의 성립과 지배체제의 강화
4. 신라, 백제와의 외교관계
5. 중국, 일본, 변방민족과의 대외관계
6. 소수림왕의 체제정비 및 대외팽창 정책
7. 광개토왕의 정복사업
8. 장수왕의 정복활동
9. 국토 상실과 고구려의 멸망
10. 역사적 의의 고찰
11. 참고자료
본문내용
동성 등 몇 개 성을 점령하고 이어 안시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주 양만춘과 백성의 용감한 저항과 안시성의 지리적 요건 때문에 60여 일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국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중국의 통일제국 수·당의 거듭된 침입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신라와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후(660년) 곧바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서둘렀지만 연개소문은 강력한 저항으로 나당군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외란으로 국력이 약화되고 연개소문의 독재정치에 대한 백성의 불평도 높아졌으며, 밖으로는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과 말갈족이 당에 복속되어 요동방위선이 점차 약화되어가고 있었다. 이때 연개소문이 죽자(666년) 고구려 지배층에서는 내분이 일어나고 나당연합군의 공격은 계속되어 평양성의 고구려군은 분전하였으나 결국 함락되어 멸망하고 말았다(668). 평양성 함락 후, 당나라는 이 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2만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고구려 전국을 9도독부 46주 100현으로 나누고, 그 장(長)에는 고구려인을 뽑아 임명하되 당나라 관리를 보내어 실제 통치에 임하였다. 그리고 669년 고구려인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유력한 민호 2만 8천 2백)호를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 시켰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 말기의 인구 69만 7천호의 약 20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고구려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정책이었다. 당나라의 이러한 지배 정책은 곧바로 고구려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일으켜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이어 안시성 등지에서 봉기가 잇달았다.
한편, 신라는 당나라에 대한 공세를 취하면서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였는데 670년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장군 고연무(高延武)가 이끄는 연합군이 압록강을 넘어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676년 신라에게 패배한 당나라가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긴 뒤,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영역과 주민은 신라에 완전히 귀속하게 되었으며, 요동과 그 밖의 옛 고구려 영역의 유민들이 몽고고원의 돌궐 영내로 이주하였으며, 상당수의 유민은 당나라 내지에 옮겨졌다. 그 결과 요동지역에 거주하는 유민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한편, 당나라의 영주(營州) 부근에 강제로 이주되어 있던 유민 집단은 696년 거란족의 반란에 따른 혼란을 틈타 일부 말갈족 집단과 함께 동으로 탈주하여 동부만주에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에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 유민들은 급속히 그 아래로 규합되었는데 이것이 발해이다. 중국 내지와 돌궐방면의 유민은 점차 그 지역 주민들 사이에 흡수·동화되었다. 요동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은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 일시 소고구려국(小高句麗國)을 세워 자립하였으나, 곧이어 9세기 전반에 발해에 병합되었다. 수 백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걸쳐 강대한 국가와 찬란한 문화를 건설하였던 고구려의 역사는 그 유민들과 함께 신라와 발해로 나뉘어 계승되었다.
10. 역사적 의의 고찰
고국원왕대의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募容氏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고 남쪽으로는 백제와의 대결에서 왕이 전사하는 등의 국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를 겪은 뒤에 즉위한 소수림왕은 전대까지 추진하여 왔던 외적팽창보다는 내적지배질서의 확립을 우선적으로 도모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하여 지배체제를 정비함으로써 고구려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하여 고구려는 광개토왕, 장수왕대에 와서 고국원왕의 죽음으로 일시 중단되었던 대외 팽창활동을 본질적으로 추진하여 마침내 대제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4세기 중엽 첫 무력충돌 이후 고구려와 백제와의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고구려와 신라는 서로의 이해가 합치하여 우호관계가 성립되었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대국인 고구려와 연결을 가짐으로써 내적으로는 왕권강화와 지배질서의 안정을 도모하였고 외적으로는 백제, 왜, 기타 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에의 청병 및 고구려군에 의한 침략세력의 격퇴는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더 밀착시켜 줌과 동시에 신라의 고구려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켜 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리고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신라수호의 명분으로 신라 영토내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나아가 왕위계승과 같은 신라의 주요국사에 깊숙이 간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5세기 중엽의 장수왕에 의한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고조선 이래의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중심지로 수도를 옮긴다는 의미와 함께 해상진출의 의의도 가졌다. 이와 더불어 이 천도에는 왕권에 반발하는 귀족세력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던 것 같다. 평양천도는 이와 같이 복합적인 목적에서 단행된 것이지만 대외관계의 측면에서는 북위와의 관계가 원만하게 타결되고 나면서부터 고구려의 팽창의 관심이 남쪽에 있다고 하는 이른바 남진정책에의 강한 의사표시라고 할 수 있겠다.
6세기 말 고구려는 그 동안에 귀족사이에 빚어진 내분을 수습하게 되었고 또 외적으로는 요동을 침입한 後周軍을 크게 격파하는 등 서북방면의 위기도 극복하여 나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수가 북중국을 통일하고 다시 남조의 陳마저 멸망시켜 통일제국을 수립한 시기였다. 중국에 있어서는 이러한 정세변화는 중국의 남북조와 북방의 변방민족과 더불어 힘의 균형관계를 유지하면서 일정한 세력권을 형성하여 왔던 고구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에 고구려는 황망히 對隋대비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수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수는 멸망하였다. 이후 唐과의 전쟁에서도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다.唐이라고 하는 이민족에 의해 민족과 민족문화 전체가 유린될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그동안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대립해 있던 신라와 고구려가 合力함으로써 당을 물리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가 이민족과 벌린 치열한 대외투쟁은 고구려만의 투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라의 對唐투쟁으로 연결되어지며 이것은 총체적으로 우리 민족의 대외투쟁의 과정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11. 참고자료
광개토왕의 정복활동, 천관우, 한국사 시민강좌
고구려사연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한편 신라와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후(660년) 곧바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서둘렀지만 연개소문은 강력한 저항으로 나당군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외란으로 국력이 약화되고 연개소문의 독재정치에 대한 백성의 불평도 높아졌으며, 밖으로는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과 말갈족이 당에 복속되어 요동방위선이 점차 약화되어가고 있었다. 이때 연개소문이 죽자(666년) 고구려 지배층에서는 내분이 일어나고 나당연합군의 공격은 계속되어 평양성의 고구려군은 분전하였으나 결국 함락되어 멸망하고 말았다(668). 평양성 함락 후, 당나라는 이 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2만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고구려 전국을 9도독부 46주 100현으로 나누고, 그 장(長)에는 고구려인을 뽑아 임명하되 당나라 관리를 보내어 실제 통치에 임하였다. 그리고 669년 고구려인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유력한 민호 2만 8천 2백)호를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 시켰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 말기의 인구 69만 7천호의 약 20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고구려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정책이었다. 당나라의 이러한 지배 정책은 곧바로 고구려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일으켜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이어 안시성 등지에서 봉기가 잇달았다.
한편, 신라는 당나라에 대한 공세를 취하면서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였는데 670년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장군 고연무(高延武)가 이끄는 연합군이 압록강을 넘어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676년 신라에게 패배한 당나라가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긴 뒤,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영역과 주민은 신라에 완전히 귀속하게 되었으며, 요동과 그 밖의 옛 고구려 영역의 유민들이 몽고고원의 돌궐 영내로 이주하였으며, 상당수의 유민은 당나라 내지에 옮겨졌다. 그 결과 요동지역에 거주하는 유민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한편, 당나라의 영주(營州) 부근에 강제로 이주되어 있던 유민 집단은 696년 거란족의 반란에 따른 혼란을 틈타 일부 말갈족 집단과 함께 동으로 탈주하여 동부만주에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에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 유민들은 급속히 그 아래로 규합되었는데 이것이 발해이다. 중국 내지와 돌궐방면의 유민은 점차 그 지역 주민들 사이에 흡수·동화되었다. 요동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은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 일시 소고구려국(小高句麗國)을 세워 자립하였으나, 곧이어 9세기 전반에 발해에 병합되었다. 수 백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걸쳐 강대한 국가와 찬란한 문화를 건설하였던 고구려의 역사는 그 유민들과 함께 신라와 발해로 나뉘어 계승되었다.
10. 역사적 의의 고찰
고국원왕대의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募容氏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고 남쪽으로는 백제와의 대결에서 왕이 전사하는 등의 국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를 겪은 뒤에 즉위한 소수림왕은 전대까지 추진하여 왔던 외적팽창보다는 내적지배질서의 확립을 우선적으로 도모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하여 지배체제를 정비함으로써 고구려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하여 고구려는 광개토왕, 장수왕대에 와서 고국원왕의 죽음으로 일시 중단되었던 대외 팽창활동을 본질적으로 추진하여 마침내 대제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4세기 중엽 첫 무력충돌 이후 고구려와 백제와의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고구려와 신라는 서로의 이해가 합치하여 우호관계가 성립되었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대국인 고구려와 연결을 가짐으로써 내적으로는 왕권강화와 지배질서의 안정을 도모하였고 외적으로는 백제, 왜, 기타 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에의 청병 및 고구려군에 의한 침략세력의 격퇴는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더 밀착시켜 줌과 동시에 신라의 고구려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켜 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리고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신라수호의 명분으로 신라 영토내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나아가 왕위계승과 같은 신라의 주요국사에 깊숙이 간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5세기 중엽의 장수왕에 의한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고조선 이래의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중심지로 수도를 옮긴다는 의미와 함께 해상진출의 의의도 가졌다. 이와 더불어 이 천도에는 왕권에 반발하는 귀족세력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던 것 같다. 평양천도는 이와 같이 복합적인 목적에서 단행된 것이지만 대외관계의 측면에서는 북위와의 관계가 원만하게 타결되고 나면서부터 고구려의 팽창의 관심이 남쪽에 있다고 하는 이른바 남진정책에의 강한 의사표시라고 할 수 있겠다.
6세기 말 고구려는 그 동안에 귀족사이에 빚어진 내분을 수습하게 되었고 또 외적으로는 요동을 침입한 後周軍을 크게 격파하는 등 서북방면의 위기도 극복하여 나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수가 북중국을 통일하고 다시 남조의 陳마저 멸망시켜 통일제국을 수립한 시기였다. 중국에 있어서는 이러한 정세변화는 중국의 남북조와 북방의 변방민족과 더불어 힘의 균형관계를 유지하면서 일정한 세력권을 형성하여 왔던 고구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에 고구려는 황망히 對隋대비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수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수는 멸망하였다. 이후 唐과의 전쟁에서도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다.唐이라고 하는 이민족에 의해 민족과 민족문화 전체가 유린될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그동안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대립해 있던 신라와 고구려가 合力함으로써 당을 물리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가 이민족과 벌린 치열한 대외투쟁은 고구려만의 투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라의 對唐투쟁으로 연결되어지며 이것은 총체적으로 우리 민족의 대외투쟁의 과정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11. 참고자료
광개토왕의 정복활동, 천관우, 한국사 시민강좌
고구려사연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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