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장 신학의 과제
제2장 계시의 의미
제3장 성서의 권위
제 4 장 삼위일체의 하나님
제 5장 선한창조
제 6장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불가해성
제 7 장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
8장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제9장 성령과 기독교인의 삶
제 10장 새로운 공동체
제목: 제 11장 선포, 성례전, 목회
제목: 제 12장 기독교인의 희망
제2장 계시의 의미
제3장 성서의 권위
제 4 장 삼위일체의 하나님
제 5장 선한창조
제 6장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불가해성
제 7 장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
8장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제9장 성령과 기독교인의 삶
제 10장 새로운 공동체
제목: 제 11장 선포, 성례전, 목회
제목: 제 12장 기독교인의 희망
본문내용
회되게 하라!” 라고 하였다.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처럼, 성령의 성전처럼, 하나님의 종의 민족처럼 살고 행동하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사회적인 현실과 실천에 응답하지 않고 온갖 종류의 형이상학적인 칭찬들로 우쭐해 하는 것을 멈추게 하는 명령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 앞에 우리는 교회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정직하게 방안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성서에서의 교회의 이미지들을 살펴보자. 신양성서에서 에클레시아, 즉 교회는 예수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에 응답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신앙인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말한다. 에클레시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중심을 두고, 성령의 능력으로 봉사하도록 능력받은 자유로운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 예수를 위한 종이되는 공동체, 섬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교회론의 입장의 특징을 살펴보자. 교회의 통일성으로써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새로운 교제 속에 뿌리를 둔 독특한 통일성이다. 교회의 통일성은 다른살마과 교제를 맺으며, 교제 속에서 정체성을 찾는 사랑의 통일성이다. 교회의 거룩함으로써는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의 모습이다. 도덕적 의미에서 거룩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통하여 의롭게 된 죄인들의 공동체이다. 교회의 사도성으로써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용한 연약함과 가난 속에서, 교회의 선교를 수행함으로 복음에 충실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응하며, 복음에 충실하며 갇힌자, 가난한자 굶주린 자들을 돌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 사이에 계시며 교회는 가난한 자들과 자유롭게 연대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 하여금 교회되게 하자!
제목: 제 11장 선포, 성례전, 목회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인간의 행위이다. 그것은 선포자의 뛰어남과 웅변 때문이 아니라, 피조물의 봉사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성령이신 하나님의 지고하고 값없이 주시는 은혜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진리를 증언하는 행위이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최고의 주의와 헌신을 요구하는 인간의 행위에서 가장 엄숙한 것 중의 하나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성서 본문에 기초를 둔다.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구절은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1)성육신하거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2) 씌어진 하나님의 말씀 3) 선포된 하나님의 복음 이다.
성례전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용서하고 새롭게 하고 약속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며, 우리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에서 살게 하는 것에 의한 복음의 수행이다.
기독교의 세례는 기독교인의 삶으로 들어가는 입교의 성례이다. 그것은 사람의 일생동안 지속되는 신앙과 제자도의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표시한다. 세례 받을 때에, 사람은 물 속에 잠기거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의 머리 위에 물이 부어지거나 뿌려진다.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자신의 소명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적인 응답을 시작한다. 예수는 이러한 행위에서 잃어버린 인간과 결속하기 시작한다. 그는 희생적인 사랑의 삶과, 결국에는 고난과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섬김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세례는 이 땅의 죄인들과 버려진 자들과의 결속과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것을 의미한다.
목회의 넓은 의미에서, 개혁주의 전통에서 만인사제설이라고 흔히 표현되듯이 모든 기독교인들은 목회에로 부름 받았으며, 이 임무를 위해 성령에 의하여 능력을 받는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는 교회에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 중에는 말씀과 성례전의 사역을 위해 어떤 사람을 부르고, 안수하는 것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는 복음을 정기적이고 책임있게 선포하는 것과, 성례전의 수행과, 교회의 삶과 예배에 있어서 지도력을 제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해주시는 직책인 것이다.
제목: 제 12장 기독교인의 희망
기독교 신앙은 고대하는 신앙이다. 성서와 신조의 언어에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다가올 나라와,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과, 새 하늘과 새 땅과, 죽음과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고 창조를 방해하는 모든 세력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것을 희망하며 기도한다. 신약성서에서 기대의 정신으로 꽉 차 있다. 예수는 말과 행실로 다가올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한다. 예수의 용서와 치유의 목회와, 무엇보다도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에서, 세상의 죄와 죽음의 모든 세력에 대하여 하나님의 승리의 시작이 선언된다. 또한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주님을 따르는 초기의 신장들은 죽음이 더 이상 하나님을 없는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를 열렬히 기다린다.
기독교인들은 창조적이고, 자신을 내어주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궁극적인 승리를 희망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증오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불의에 대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모든 속박에 대해서 하나님의 자유가, 모든 분리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공동체가, 죽음의 힘에 대해서 하나님과 삶이 승리한다고 희망한다.
기독교인들은 공동체 안에서 삶의 변화를 위해 일하고 그것을 희망한다. 우리는 희망의 삼위일체 하나님 속에서 개인들의 구원의 희망이 아닌, 공동체 속에 사람들과 함께 구원의 희망이 되어야만 한다.
자신을 내어주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모든 피조물들과 연대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에 의하여 해방되어, 편협한 파벌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가족을, 인간 가족 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존재해 왔었고 현재까지도 존재하는 온 우주 뿐만 아니라 우리가 파괴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해서 존재할 우주를 희망한다.
기독교인들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하나님의 의와 자유와 평화로 가득찬 변화된 하늘과 땅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에 희망을 둔다. 기독교인의 희망은 우리가 받을 만하거나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완성 속에서의 희망,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쁨의 공동체 속에서 삶의 완성에 대한 희망인 것이다.
성서에서의 교회의 이미지들을 살펴보자. 신양성서에서 에클레시아, 즉 교회는 예수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에 응답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신앙인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말한다. 에클레시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중심을 두고, 성령의 능력으로 봉사하도록 능력받은 자유로운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 예수를 위한 종이되는 공동체, 섬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교회론의 입장의 특징을 살펴보자. 교회의 통일성으로써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새로운 교제 속에 뿌리를 둔 독특한 통일성이다. 교회의 통일성은 다른살마과 교제를 맺으며, 교제 속에서 정체성을 찾는 사랑의 통일성이다. 교회의 거룩함으로써는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의 모습이다. 도덕적 의미에서 거룩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통하여 의롭게 된 죄인들의 공동체이다. 교회의 사도성으로써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용한 연약함과 가난 속에서, 교회의 선교를 수행함으로 복음에 충실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응하며, 복음에 충실하며 갇힌자, 가난한자 굶주린 자들을 돌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 사이에 계시며 교회는 가난한 자들과 자유롭게 연대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 하여금 교회되게 하자!
제목: 제 11장 선포, 성례전, 목회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인간의 행위이다. 그것은 선포자의 뛰어남과 웅변 때문이 아니라, 피조물의 봉사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성령이신 하나님의 지고하고 값없이 주시는 은혜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진리를 증언하는 행위이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최고의 주의와 헌신을 요구하는 인간의 행위에서 가장 엄숙한 것 중의 하나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성서 본문에 기초를 둔다.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구절은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1)성육신하거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2) 씌어진 하나님의 말씀 3) 선포된 하나님의 복음 이다.
성례전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용서하고 새롭게 하고 약속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며, 우리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에서 살게 하는 것에 의한 복음의 수행이다.
기독교의 세례는 기독교인의 삶으로 들어가는 입교의 성례이다. 그것은 사람의 일생동안 지속되는 신앙과 제자도의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표시한다. 세례 받을 때에, 사람은 물 속에 잠기거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의 머리 위에 물이 부어지거나 뿌려진다.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자신의 소명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적인 응답을 시작한다. 예수는 이러한 행위에서 잃어버린 인간과 결속하기 시작한다. 그는 희생적인 사랑의 삶과, 결국에는 고난과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섬김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세례는 이 땅의 죄인들과 버려진 자들과의 결속과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것을 의미한다.
목회의 넓은 의미에서, 개혁주의 전통에서 만인사제설이라고 흔히 표현되듯이 모든 기독교인들은 목회에로 부름 받았으며, 이 임무를 위해 성령에 의하여 능력을 받는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는 교회에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 중에는 말씀과 성례전의 사역을 위해 어떤 사람을 부르고, 안수하는 것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는 복음을 정기적이고 책임있게 선포하는 것과, 성례전의 수행과, 교회의 삶과 예배에 있어서 지도력을 제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해주시는 직책인 것이다.
제목: 제 12장 기독교인의 희망
기독교 신앙은 고대하는 신앙이다. 성서와 신조의 언어에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다가올 나라와,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과, 새 하늘과 새 땅과, 죽음과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고 창조를 방해하는 모든 세력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것을 희망하며 기도한다. 신약성서에서 기대의 정신으로 꽉 차 있다. 예수는 말과 행실로 다가올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한다. 예수의 용서와 치유의 목회와, 무엇보다도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에서, 세상의 죄와 죽음의 모든 세력에 대하여 하나님의 승리의 시작이 선언된다. 또한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주님을 따르는 초기의 신장들은 죽음이 더 이상 하나님을 없는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를 열렬히 기다린다.
기독교인들은 창조적이고, 자신을 내어주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궁극적인 승리를 희망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증오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불의에 대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모든 속박에 대해서 하나님의 자유가, 모든 분리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공동체가, 죽음의 힘에 대해서 하나님과 삶이 승리한다고 희망한다.
기독교인들은 공동체 안에서 삶의 변화를 위해 일하고 그것을 희망한다. 우리는 희망의 삼위일체 하나님 속에서 개인들의 구원의 희망이 아닌, 공동체 속에 사람들과 함께 구원의 희망이 되어야만 한다.
자신을 내어주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모든 피조물들과 연대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에 의하여 해방되어, 편협한 파벌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가족을, 인간 가족 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존재해 왔었고 현재까지도 존재하는 온 우주 뿐만 아니라 우리가 파괴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해서 존재할 우주를 희망한다.
기독교인들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하나님의 의와 자유와 평화로 가득찬 변화된 하늘과 땅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에 희망을 둔다. 기독교인의 희망은 우리가 받을 만하거나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완성 속에서의 희망,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쁨의 공동체 속에서 삶의 완성에 대한 희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