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중화전국문학예술공작자대표대회
1) 제 1차 中華全國文學藝術工作者代表大會
2) 제 2차 中華全國文學藝術工作者代表大會
2. 우파문학 비판의 전개
⑴ 영화 『무훈전武訓傳』비판
⑵ 『홍루몽연구紅樓夢硏究』비판
⑶ 후펑胡風비판
1) 제 1차 中華全國文學藝術工作者代表大會
2) 제 2차 中華全國文學藝術工作者代表大會
2. 우파문학 비판의 전개
⑴ 영화 『무훈전武訓傳』비판
⑵ 『홍루몽연구紅樓夢硏究』비판
⑶ 후펑胡風비판
본문내용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마르크스주의 문예평론가로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결코 당권파 문인은 아니었으며 공산당의 문예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2) 당권파 문인들과의 갈등
胡風은 공산당원으로 1930년대에는 좌련의 간부로, 신정부에서는 문련과 작협의 이사로 문예계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문예계의 영도기관이라는 선전부와 문화부의 문예정책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불만을 가져왔고 당권파 문인들과의 갈등의 골은 세월이 가면서 더욱 깊어졌다. 그 시작은 1935년에 있었던 魯迅과 당권파 이론가들 간에 있었던 ‘두 개의 구호 논쟁’ 시기부터로 여겨진다. 당시 그는 魯迅편에서 당권파 문인들과 논쟁하였는데, 이 논쟁으로 인하여 그들과의 악연이 일생 동안 이어졌다. 특히 胡風과 당 이론가들과는 문학의 정통성에서부터 견해 차이를 보였다. 胡風은 문학의 ‘주관론’을 주장하면서 당권파 이론가들의 ‘객관론’과 ‘공식주의’에 반대하였다.
이들이 결정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1월 胡風이 주관한 잡지 『희망』창간호에 『주관을 논함[論主觀]』이 발표되면서 부터이다. 이 글은 무려 2만 7천여 자의 장문으로 胡風파의 문예사상을 피력한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주관전투정신론’은 단순한 문자상의 함의가 아니라 철학적 개념으로 ‘우주관’ ‘인생관’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우주의 본성으로부터 인류의 역사를 섭렵하는 광범위한 내용으로 ‘현실주의 객관론’을 주장하는 당권파의 이론과는 완전 배치되는 내용이었다.
3) 비판의 전말
胡風의 문예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1952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문예보사에서는 그 동안 발표되었던 胡風의 문장들을 모아 『후펑문예사상 연구자료』를 독자들에게 배포해 의견을 수집하면서 ‘후펑 문예사상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토론회에서는 “후펑의 문예사상은 자산계급 소자산계급의 개인주의적 사상이다.”라고 단정하고 “후펑의 문예노선은 반당노선이다.”라고 하여 그를 반당분자로 몰아갔다. 胡風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면서 자신의 문예사상은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기본으로 한 무산계급문예사상”으로 자신은 정통적 마르크스주의 문예사상의 계승자라고 항의했다. 1954년 7월 胡風은 「해방 이래의 문예실천 상황에 관한 보고」를 당 중앙에 제출했다. 당권파 문인들은 일제히 그를 반당분자로 공격했다. 이에 胡風은 「자아비판서」를 발표하고 굴복했으나 결국 반당 반혁명 집단의 괴수라는 죄명으로 비판받고 숙청당했다.
2) 당권파 문인들과의 갈등
胡風은 공산당원으로 1930년대에는 좌련의 간부로, 신정부에서는 문련과 작협의 이사로 문예계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문예계의 영도기관이라는 선전부와 문화부의 문예정책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불만을 가져왔고 당권파 문인들과의 갈등의 골은 세월이 가면서 더욱 깊어졌다. 그 시작은 1935년에 있었던 魯迅과 당권파 이론가들 간에 있었던 ‘두 개의 구호 논쟁’ 시기부터로 여겨진다. 당시 그는 魯迅편에서 당권파 문인들과 논쟁하였는데, 이 논쟁으로 인하여 그들과의 악연이 일생 동안 이어졌다. 특히 胡風과 당 이론가들과는 문학의 정통성에서부터 견해 차이를 보였다. 胡風은 문학의 ‘주관론’을 주장하면서 당권파 이론가들의 ‘객관론’과 ‘공식주의’에 반대하였다.
이들이 결정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1월 胡風이 주관한 잡지 『희망』창간호에 『주관을 논함[論主觀]』이 발표되면서 부터이다. 이 글은 무려 2만 7천여 자의 장문으로 胡風파의 문예사상을 피력한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주관전투정신론’은 단순한 문자상의 함의가 아니라 철학적 개념으로 ‘우주관’ ‘인생관’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우주의 본성으로부터 인류의 역사를 섭렵하는 광범위한 내용으로 ‘현실주의 객관론’을 주장하는 당권파의 이론과는 완전 배치되는 내용이었다.
3) 비판의 전말
胡風의 문예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1952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문예보사에서는 그 동안 발표되었던 胡風의 문장들을 모아 『후펑문예사상 연구자료』를 독자들에게 배포해 의견을 수집하면서 ‘후펑 문예사상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토론회에서는 “후펑의 문예사상은 자산계급 소자산계급의 개인주의적 사상이다.”라고 단정하고 “후펑의 문예노선은 반당노선이다.”라고 하여 그를 반당분자로 몰아갔다. 胡風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면서 자신의 문예사상은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기본으로 한 무산계급문예사상”으로 자신은 정통적 마르크스주의 문예사상의 계승자라고 항의했다. 1954년 7월 胡風은 「해방 이래의 문예실천 상황에 관한 보고」를 당 중앙에 제출했다. 당권파 문인들은 일제히 그를 반당분자로 공격했다. 이에 胡風은 「자아비판서」를 발표하고 굴복했으나 결국 반당 반혁명 집단의 괴수라는 죄명으로 비판받고 숙청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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