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김대문
Ⅲ. 화랑세기의 논쟁
Ⅳ. 화랑세기는 위서인가
Ⅴ. 화랑세기를 보는 시각
Ⅵ. 결론
Ⅱ. 김대문
Ⅲ. 화랑세기의 논쟁
Ⅳ. 화랑세기는 위서인가
Ⅴ. 화랑세기를 보는 시각
Ⅵ. 결론
본문내용
있는 향가인 풍랑가는 국문학사에 향가를 한 편 더 보태준 셈이다. 유학자인 김부식이 삼국유사를 쓰면서 신라왕들의 복잡한 통정(通情)관계 등의 내용이 서술된 화랑세기를 일부러 멀리했으리란 추측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도 삼국사기에 ‘김대문이 화랑세기에 썼듯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화랑에서 나왔다(현좌충신 양장용졸)’ 고 기록해 화랑세기를 완전히 묵살하지는 못했다. 화랑세기에서 신라사회는 엄격한 골품제사회였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어떻게든 혈연적으로 얽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누구에게서 태어나느냐가 바로 정치 사회적인 신분과 역할을 결정했기 때문에 근친혼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러한 대목은 삼국사기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 죽죽조에 김춘추의 사위 품석이 부하인 검일의 처를 빼앗은 내용이 나온다. 삼국유사에 들어있는 처용가의 내용도 처용이 그의 아내를 뺏기고 부른 노래이며 서동요는 진평왕의 공주인 선화가 백제인 서동과 사통(私通)하는 장면을 노래한 것이다. 이는 화랑세기에 보이는 사통의 내용과 별 차이가 없다.
이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본이냐 위본이냐 는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골품제를 유지하기 위한 당시 왕들과 귀족들의 고심을 들여다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신라의 궁궐인 월성(月城)에 숨어든 기분이 드는 것을 화랑세기를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지금 학계에는 화랑세기의 위작설이 만만찮게 제기되고 있지만, 20세기에 이뤄진 한국 고대사 연구체계에 물들지 않은 학자들에 의해 사서로서의 당당한 가치가 받아들여질지 여부는 학계의 연구결과를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만약 일본왕실도서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박창화 필사본의 원본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화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재야 역사학자들은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주장하고 있고, 젊은 역사학도들이 학위논문에 화랑세기의 내용을 인용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화랑세기는 한국고대 신라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이자 한국 고대의 역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화랑세기가 앞으로 한국 고대사 연구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일 판도라의 상자’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많이 남아있다.
Ⅵ. 결론
화랑세기는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신라 세계를 보여주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역사서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교 윤리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봤고 그 관점에서 이탈하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먼저 가지곤 했다. 이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같은 한반도 땅 위에 오랜 역사가 이루어져 왔지만 그 시대의 문화와 사람들의 생각과 특징이 항상 내 머릿속에 있는 어떤 모델과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고려 시대의 고려 왕조 자체의 담론 체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굳이 진짜의 이미지로 굳힐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많은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화랑세기를 읽으면서 가장 놀란 것은 복잡하게 얽힌 근친혼 관계나, 미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문란한 성생활이었다. 하지만 신라 시대 토우나 각종 기록들은 신라인들의 성에 대한 의식이 자유로웠음을 보여준다. 또 유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문란하다 할 수 있겠지만 기마유목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이 민족들은 남녀관계 뿐 아니라 형수나 처제가 그 남편을 잃었을 때, 그 형이나 동생이 부인으로 맞는다. 이것은 자신의 종족이 단절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생활 풍습이다.
화랑세기의 필사본이 출현하자 한국고대사학계에서 보인 압도적인 반응은 가짜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연구한 신라 화랑도의 역사상 및 신라 향가와는 너무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네들이 지금껏 구축한 화랑도와 향가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이자 사실이라고 철썩 같이 믿어왔는데 거기에 엇나가는 얘기가 불쑥 튀어나왔으니, 오죽할까.
하지만 정말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수업 시간에도 배우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여러 가지 시각에서 나오는 의견들을 종합하고 또, 여러 가지 증거들을 재가면서 올바른 평가를 내려 역사를 꾸려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랑세기의 진위 여부와 관련한 여러 가지 자료를 조사하고 이렇게 발제지에 그 내용을 담았지만 정확한 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가 얻고자 했던 답을 향한 길은 어느 정도 닦을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발표 시간을 통해 우리만이 아니라 모두가 또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본이냐 위본이냐 는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골품제를 유지하기 위한 당시 왕들과 귀족들의 고심을 들여다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신라의 궁궐인 월성(月城)에 숨어든 기분이 드는 것을 화랑세기를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지금 학계에는 화랑세기의 위작설이 만만찮게 제기되고 있지만, 20세기에 이뤄진 한국 고대사 연구체계에 물들지 않은 학자들에 의해 사서로서의 당당한 가치가 받아들여질지 여부는 학계의 연구결과를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만약 일본왕실도서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박창화 필사본의 원본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화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재야 역사학자들은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주장하고 있고, 젊은 역사학도들이 학위논문에 화랑세기의 내용을 인용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화랑세기는 한국고대 신라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이자 한국 고대의 역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화랑세기가 앞으로 한국 고대사 연구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일 판도라의 상자’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많이 남아있다.
Ⅵ. 결론
화랑세기는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신라 세계를 보여주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역사서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교 윤리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봤고 그 관점에서 이탈하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먼저 가지곤 했다. 이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같은 한반도 땅 위에 오랜 역사가 이루어져 왔지만 그 시대의 문화와 사람들의 생각과 특징이 항상 내 머릿속에 있는 어떤 모델과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고려 시대의 고려 왕조 자체의 담론 체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굳이 진짜의 이미지로 굳힐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많은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화랑세기를 읽으면서 가장 놀란 것은 복잡하게 얽힌 근친혼 관계나, 미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문란한 성생활이었다. 하지만 신라 시대 토우나 각종 기록들은 신라인들의 성에 대한 의식이 자유로웠음을 보여준다. 또 유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문란하다 할 수 있겠지만 기마유목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이 민족들은 남녀관계 뿐 아니라 형수나 처제가 그 남편을 잃었을 때, 그 형이나 동생이 부인으로 맞는다. 이것은 자신의 종족이 단절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생활 풍습이다.
화랑세기의 필사본이 출현하자 한국고대사학계에서 보인 압도적인 반응은 가짜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연구한 신라 화랑도의 역사상 및 신라 향가와는 너무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네들이 지금껏 구축한 화랑도와 향가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이자 사실이라고 철썩 같이 믿어왔는데 거기에 엇나가는 얘기가 불쑥 튀어나왔으니, 오죽할까.
하지만 정말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수업 시간에도 배우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여러 가지 시각에서 나오는 의견들을 종합하고 또, 여러 가지 증거들을 재가면서 올바른 평가를 내려 역사를 꾸려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랑세기의 진위 여부와 관련한 여러 가지 자료를 조사하고 이렇게 발제지에 그 내용을 담았지만 정확한 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가 얻고자 했던 답을 향한 길은 어느 정도 닦을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발표 시간을 통해 우리만이 아니라 모두가 또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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