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여는말
1. 서장
2. 문화적 기원
3. 민족의식의 기원
4. 크리올 선구자들
5. 구언어, 신모형
6. 관주도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7. 마지막 물결
8. 애국심과 인종주의
9. 역사의 천사
10. 센서스, 지도, 박물관
11. 기억과 망각
느낀점
1. 서장
2. 문화적 기원
3. 민족의식의 기원
4. 크리올 선구자들
5. 구언어, 신모형
6. 관주도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7. 마지막 물결
8. 애국심과 인종주의
9. 역사의 천사
10. 센서스, 지도, 박물관
11. 기억과 망각
느낀점
본문내용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족주의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 신앙과 관련된 깨달음 인 것 같다. 기독교인으로 세상을 살다 보면 세상과 부딪힐 때가 많지만, 꼭 그래야 하는 경우(진리가 왜곡될 때)가 아니라면 지혜롭게 세상의 힘을 이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이 서평을 쓰면서 “소마트리오”라는 그룹이 연주하는 “Amazing Grace with Bach”라는 곡을 듣고 있는데, 이 곡은 Bach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바탕음으로 해서 “Amazing grace”를 연주하는 곡이다. 그리고 이 곡의 메인은 누가 들어도 “Amazing grace”이다. 나도 이런 지혜를 가지고 싶다. 세상이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뭔가를 자신들을 위해 열심히 해나갈 때(무반주 첼로 조곡), 나는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지혜로 이들의 열심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Amazing grace)에 이용해보고 싶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이 책에서 민족주의의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많이 다루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실 우리가 이 민족주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는 이 민족주의가 우리들에게 주는 영향력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민족주의의 근원에 대한 성찰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거라 생각한다. 나는 먼저 이 민족주의가 어떤 부분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하고 찾아보았다. ‘허구의 공동체’라는 책에서는 이 민족주의가 먼저 민족문학 형성에 이바지 했다고 말한다. 이런 문학은 원래 민족주의의 이념 세계로부터 유래된 것은 아니었지만, 서양의 민족주의가 이런 문예 활동의 발전을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족주의에서 나온 민족문화가 근대 산업사회를 움직이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어니스트 겔너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민족주의가 가지는 두 번째 긍정적인 효과는 근대 민족국가들이 법률을 정할 때 나타났다. 민족국가의 통치자들은 그들이 정한 법률이 민족정신 내지 민족의 법 전통에서 나온 것처럼 주장할 수 있었기에 피지배자들에 대해 더 많은 구속력을 가질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옛날부터 그랬다는 말이 어제부터 그랬다는 말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순기능 이상의 역기능을 가지는 것 같다. 특히 정치적 세계에서는 더 그렇다. 왜냐하면 단일민족이라는 중심 사상이 소수 민족들에 대한 강력한 배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방민족들을 지옥불의 땔감으로 여겼던 이스라엘 민족의 배타성, 후에 이런 유대인들을 몰살하려고 했던 게르만 민족의 인종차별주의 같은 예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착취와 멸시를 보라.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민족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배타성에서도 분명 그 이유를 물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를 한민족이라는 민족국가로 상상하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이들에게, 특히 우리나라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민족주의가 가지는 폐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 정체성을 일부분이었던 ‘한민족’이라는 개념을 앞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해 보았다. 사실 지금까지 내게 민족주의라 하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은 ‘한민족’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역사적으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민족주의가 사실은 근대 사회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접하고 나니 이 한민족이라는 개념이 내게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다. 좋게 말하면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나쁘게 말하면 “집단 허위의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한민족’이라는 의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 같다. 이 민족주의는 해방 후 얼마 되지 않아 미군정기를 경험할 때, 미국인의 편의에 의해 기존의 지배층(주로 친일을 한 사람들)이 그대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민족주의가 가지는 종교인 특성이 가져오는 ‘한민족’에 대한 원초적인 충성심은 종종 민족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희생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6.25 전쟁 이후에 우리나라의 안보와 경제적 성장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당연히 희생되어도 되는 것으로, 오히려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정신이 바로 애국심이라는 논리로 많은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가 희생되었다. 여기에 대해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냐고. 그러나 여러 성공적인 측면들(경제성장, 복지증진 등등)에 민족의식이 일등공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이며, 이런 근거 없는 이야기로 민족의식이 가져오는 해악들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일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글을 마치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왔을 때 여러 가지 ‘도전’들을 받았고 거기에 대한 ‘응전’으로 우리나라 기독교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응전의 하나로서 우리나라 기독교는 술, 담배를 심하게 죄악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왜 술, 담배가 그렇게 죄악시 되는 것인가 물으며 그 근원을 살펴보다가 결국 그 금지가 선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금기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사람은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이것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반대할 것인가, 아니면 한국의 형편에 맞게 설정된 것이긴 하지만 그 유용성을 생각해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고민 말이다. 나는 이번에 공부하고 알게 된 이 “상상의 공동체”를 이런 자세로 받아들이고 싶다. 사실 내게 이 민족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다. 그렇지만 이제 누군가가 이 상상의 공동체를 근거로 누군가를 억압하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 큰소리칠 용기가 있으며, 반대로 월드컵 경기장에서 함께 응원하던 누군가가 “역시 우리는 한민족!”이라고 이야기하면 나 또한 웃으며 그렇다고 말할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이 책에서 민족주의의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많이 다루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실 우리가 이 민족주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는 이 민족주의가 우리들에게 주는 영향력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민족주의의 근원에 대한 성찰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거라 생각한다. 나는 먼저 이 민족주의가 어떤 부분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하고 찾아보았다. ‘허구의 공동체’라는 책에서는 이 민족주의가 먼저 민족문학 형성에 이바지 했다고 말한다. 이런 문학은 원래 민족주의의 이념 세계로부터 유래된 것은 아니었지만, 서양의 민족주의가 이런 문예 활동의 발전을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족주의에서 나온 민족문화가 근대 산업사회를 움직이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어니스트 겔너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민족주의가 가지는 두 번째 긍정적인 효과는 근대 민족국가들이 법률을 정할 때 나타났다. 민족국가의 통치자들은 그들이 정한 법률이 민족정신 내지 민족의 법 전통에서 나온 것처럼 주장할 수 있었기에 피지배자들에 대해 더 많은 구속력을 가질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옛날부터 그랬다는 말이 어제부터 그랬다는 말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순기능 이상의 역기능을 가지는 것 같다. 특히 정치적 세계에서는 더 그렇다. 왜냐하면 단일민족이라는 중심 사상이 소수 민족들에 대한 강력한 배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방민족들을 지옥불의 땔감으로 여겼던 이스라엘 민족의 배타성, 후에 이런 유대인들을 몰살하려고 했던 게르만 민족의 인종차별주의 같은 예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착취와 멸시를 보라.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민족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배타성에서도 분명 그 이유를 물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를 한민족이라는 민족국가로 상상하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이들에게, 특히 우리나라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민족주의가 가지는 폐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 정체성을 일부분이었던 ‘한민족’이라는 개념을 앞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해 보았다. 사실 지금까지 내게 민족주의라 하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은 ‘한민족’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역사적으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민족주의가 사실은 근대 사회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접하고 나니 이 한민족이라는 개념이 내게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다. 좋게 말하면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나쁘게 말하면 “집단 허위의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한민족’이라는 의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 같다. 이 민족주의는 해방 후 얼마 되지 않아 미군정기를 경험할 때, 미국인의 편의에 의해 기존의 지배층(주로 친일을 한 사람들)이 그대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민족주의가 가지는 종교인 특성이 가져오는 ‘한민족’에 대한 원초적인 충성심은 종종 민족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희생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6.25 전쟁 이후에 우리나라의 안보와 경제적 성장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당연히 희생되어도 되는 것으로, 오히려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정신이 바로 애국심이라는 논리로 많은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가 희생되었다. 여기에 대해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냐고. 그러나 여러 성공적인 측면들(경제성장, 복지증진 등등)에 민족의식이 일등공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이며, 이런 근거 없는 이야기로 민족의식이 가져오는 해악들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일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글을 마치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왔을 때 여러 가지 ‘도전’들을 받았고 거기에 대한 ‘응전’으로 우리나라 기독교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응전의 하나로서 우리나라 기독교는 술, 담배를 심하게 죄악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왜 술, 담배가 그렇게 죄악시 되는 것인가 물으며 그 근원을 살펴보다가 결국 그 금지가 선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금기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사람은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이것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반대할 것인가, 아니면 한국의 형편에 맞게 설정된 것이긴 하지만 그 유용성을 생각해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고민 말이다. 나는 이번에 공부하고 알게 된 이 “상상의 공동체”를 이런 자세로 받아들이고 싶다. 사실 내게 이 민족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다. 그렇지만 이제 누군가가 이 상상의 공동체를 근거로 누군가를 억압하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 큰소리칠 용기가 있으며, 반대로 월드컵 경기장에서 함께 응원하던 누군가가 “역시 우리는 한민족!”이라고 이야기하면 나 또한 웃으며 그렇다고 말할 여유가 생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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