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터키문화][터키의 문화][터키의 역사][터키의 자연환경][터키의 정치][터키의 경제][터키의 고대도시]터키의 역사, 터키의 자연환경과 터키의 정치, 터키의 경제 및 터키의 고대도시 분석(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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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터키문화][터키의 문화][터키의 역사][터키의 자연환경][터키의 정치][터키의 경제][터키의 고대도시]터키의 역사, 터키의 자연환경과 터키의 정치, 터키의 경제 및 터키의 고대도시 분석(터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터키의 역사
1. 흉노 제국
2. 돌궐 제국
3. 위구르 제국
4. 대셀주크 제국
5. 오스만 제국
6. 1차 세계 대전과 터키 공화국의 성립

Ⅱ. 터키의 자연환경

Ⅲ. 터키의 정치

Ⅳ. 터키의 경제

Ⅴ. 터키의 고대 도시
1. 에페소
2. 트로이
3. 사르디스
4. 페르가몬
5. 우르파
6. 디디마
7. 보가즈쾨이
8. 안티오키아

참고문헌

본문내용

요한 마르코와 함께 제1차 전도 여행 때 키프로스(Cyprus)섬 전도를 마치고 지금의 터키 남부 베르게로 건너갔다. 이들이 베르게에 도착하였을 때 요한 마르코는 더 이상의 전도 여행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바울로는 제2차 전도여행 때 그를 동행시키지 않았다. 바울로는 비시디아의 안티오티카, 이고니온, 리스트라, 데르베 전도를 마친 다음 마지막으로 베르게에서 전도하고 서쪽으로 16㎞ 떨어진 안탈리아에서 배를 타고 시리아의 안타키아(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5. 우르파
소아시아반도 남동부, 시리아와의 국경과 근접한 메소포타미아평원 북단부의 삼면이 석회암 구릉으로 둘러싸인 기름진 평원에 자리잡고 있다. 동서를 잇는 육상교통의 요충지로 남쪽의 고개에는 고대부터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도로가 나 있다. 옛 이름은 에데사이며 쿠르드족이 많다. 밀·보리 등 농산물의 집산지이며 가축이 거래되는 시장이고, 주요수출품은 버터와 양모이다. 우르파라는 이름은 우르하이라는 초기의 아람어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우르하이는 BC 3세기에 에데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에데사는 오스로이네공국의 수도로서 시리아 문학의 발생지이며, 로마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지점이었다. BC 4세기경부터 전통이 있는 아주 오래된 도시로 산 위의 요새, 유스티니아누스1세가 세운 방조제, 17세기의 이슬람 신학교·사원 등 고대 유적이 많다. 150년경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 시리아의 포교중심지가 되었으며, 시리아어로 씌어진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이 많이 발견되었다. 여러 차례 사산조 페르시아에 점령당하였으며, 639년에는 아랍에 점령당하였다. 1098년 십자군에게 넘어가 지배를 받다가 1144년 다시 이슬람화하였고 1637년 이후 터키 영토가 되었다. 배후에 있는 언덕에는 십자군의 성터가 있다. 주변지역에서 대규모의 수리관개사업이 이루어졌다.
6. 디디마
신탁(神託)은 그리스 본토의 델포이와 함께 유명하였다. 대략 BC 7세기 말에 건립되어, BC 494년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된 구신전지(舊神殿址)에 BC 300년경 현존하는 새 신전이 착공되었으나, 그 규모가 너무 방대하여 공사가 진척되지 못하다가 로마 제정시대(하드리아누스기로 추정)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118×60m, 21×10주(柱)의 이오니아식 이중 주주식(周柱式) 신전으로, 특징은 내진(內陳)이 주주랑(周柱廊)이나 앞방보다 기단부(基段部)만큼 낮고, 지붕이 없는 중정형식(中庭形式)을 갖추었으며, 중앙부 안쪽으로 프로스틸로스(Prostylos) 형식의 소신전(Naiskos:기단부만 현존)이 세워져 있었다.
그 밖에도 나이스코스 주위에는 BC 87세기의 신역유지(神域遺址) 신전의 동쪽 정면에 위치한 원형의 제단과 우물, 그리고 동쪽(현재는 언덕 위)에는 BC 6세기의 주랑유지(柱廊遺址)가 있고, 또 밀레투스로부터의 성도(聖道)를 따라서 많은 조상(彫像)과 분묘가 줄지어 있었다.
7. 보가즈쾨이
1906년부터 독일인 H.빙클러 등이 벌인 조사에 따라,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 하투스의 소재지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남북 2km, 2중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채도시로서, 해발고도 900m의 기복이 많은 고원이 이용되었다. 북쪽의 평지에서는 대신전과 왕궁의 유적, 남쪽의 고지에서는 크고 작은 4개의 신전과 여러 가지 방어시설, 문·탑·지하도 등이 발견되었다.
BC 19세기에는 아시리아 상인의 전진기지였으며, BC 17세기 후반에는 하투실리스가 이곳을 수도로 정하였다. BC 14세기 중엽의 수필룰리우마스 시대에 더욱 견고하게 방비되었다. BC 1190년경에 서쪽에서 침입해 온 이민족에 의해 파괴되었다. 왕궁의 유적에서 발견된 1만 장이나 되는 히타이트어(語) 설형문서(楔形文書:보가즈쾨이 문서)는 중요하며, 이 문서로 히타이트의 역사가 밝혀졌다. 또한 오리엔트사(史)가 크게 개정되었다.
8. 안티오키아
고대에는 안티오크·안티오키아로 알려졌으며, 성서에는 안디옥으로 나온다. 시리아와의 국경 부근에 있는 도시로 오론테스강 좌안을 따라 지중해로부터 약 25km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 위치한다. 이 도시는 BC 300년경 셀레우코스 1세가 건설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안티오키아라고 이름 붙였으며,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로서 번영하였다. 외항(外港) 셀레우키아를 통하여 지중해 각지와 연결되고, 또 동쪽으로 이어지는 대상로(隊商路)가 있어 통상·무역의 요지로서 예로부터 동방의 여왕이라고 하였다.
BC 64년 로마 시대에는 속주(屬州) 시리아의 수도가 되었고 헬레니즘·로마 시대에 번영을 이루었다. 47~55년 사도 바울로의 전도 근거지였으며, 그리스도교의 이방인 전도(傳道) 기지로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리스도교도를 처음으로 크리스천이라고 부른 곳도 이곳이라고 한다. 3세기 중엽 이래 종교회의가 열렸으며 아시아의 총대주교의 소재지가 되었으나, 526년의 대지진과 538년 페르시아군(軍)의 파괴로 황폐화하였다. 그 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재건했으나, 예전과 같은 번영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635년 사라센인(人)에게 점령되어 약 300년 동안 그 지배를 받다가 969년 동(東)로마에 속하게 되었으며, 1084년 셀주크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 십자군에 의해 점령을 당했으며, 16세기 전반에는 오스만투르크가 장악하였다. 19201939년까지는 시리아가 지배했다. 아미크평원 등의 주변지역에서는 밀·목화·올리브·포도·쌀 등이 생산되며, 유적과 유물도 많이 볼 수 있다. 고대에는 이 도시 외에도 안티오크라는 이름의 도시가 여러 곳 있었으나 소아시아의 프리지아에 있었던 피시디아의 안타키아가 가장 유명하다.
참고문헌
김혜영·조은자·한영숙·김지영·표영희 공저(1998) / 효일문화사
미노(2005) / 수상한 매력이 있는 나라, 서울 : 즐거운상상
안종수(1999) / 세계관광, 백산출판사
이장희(1995) / 지중해 : 그리스, 터키, 이집트, 서울, 학생여행 문화센터
이희철(2002) / 터키 :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 서울 : 리수
이븐바투타 / 이븐바투타 여행기, 창착과 비평사
이가은·남경태(1999) / 세계사 X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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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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