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으로서의 십자가의 부활에 대한 설교라고 주장했고, 이 두사건은 불가분리의 연합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그는 단순히 나사렛 예수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들\'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우리가 주목해 본 바대로, 불트만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역사는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야성적 사실들과 동일시될 수 없다. 신학자로서의 생애 초기에 그는 이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속죄와 용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모든 이론들을 배척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 즉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의 개개인들에게 주어질 때 그것들이 지속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케리그마\'에 대하여 반응할 때,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경험이 된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될 때, 십자가는(불트만은 이것을 예수의 역사의 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이 인류를 해방하기 위한 인류에 대한 심판이다. 부활은(불트만은 이것을 과거 역사의 한 사건으로서 말하기를 거부했다)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거나 예수가 피안의 생명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십자가의 구원의 효력을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불트만은 주장했다.
기독교 메시지의 선포가 믿음을 낳는다고 불트만은 말했는데 믿음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케리그마\'는 예수 그리스도와 대면하는 장소이며 그것을 듣는 자에게 그것은 \'종말론적 사건\'이 된다. \'케리그마\'를 통하여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 자를 위하여 이 (낡은) 세상의 종말을 가져온다.
비판: 보수주의자들은 이 독일 학자가 성경의 권위를 위태롭게 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가 신화적 범주를 성경에 적용한 것에 대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영(Young)의 요약은 이러한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불트만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계시의 역사가 아니다. 예수는 세계 역사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적 사건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와 청취 속에서 그렇게 화(化)한다. 하나님의 행위의 초월적 특성은 특별한 의미로만 유지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 후에 있었던 역사의 한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의 차원이라는 등등.\" 불트만의 프로그램의 중심에는 주요한 신학적 문제가 놓여 있다. 이 문제는 세 가지 주요한 약점들로 확인된다. 첫 번째는 주해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생활에, 세 번째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일방적인 주해: 첫째 불트만은 실존주의라는 여과망을 신약학에 적용함으로써 지나치게 단순화된 주해를 하는 경향을 낳았고, 그것은 또 한쪽 측면만을 말하는 신학을 낳게 되었다. 신약 성경의 \'케리그마\'는 본질적으로는 실존적 강설이라는 그의 주장이, 한편으로 그 문서가 말하려는 주요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문서에서 제시하려는 바를 거두절미한 왜곡이다. 많은 본문들이 단순히 불트만이 공식처럼 제시한 인간 실존의 이슈를 다루지 않고, 다른 주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가 신앙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예수의 생애에 관한 내용을 별 무관한 것으로 여겼는데, 이는 그가 신앙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했다는 메시지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몰트만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그렇게 보면 \"구체적인 역사성이라는 것은 항상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를 통하여 드러나고, 가능해지고, 일정한 한계가 정해지는 것이지, 그 역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지 못한다.\" 우리 신앙의 표현으로서 예수의 역사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은 그 역사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사유화된 신앙: 둘째로 불트만의 신학적 접근법은 복음 메시지에 대한 너무 좁은 이해와 함께 곧 너무 좁고, 사유화한 신앙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본래적 삶의 문제에서 그것도 매우 개인화된 모습의 인격적 결단이다.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강조는 기독교 신앙의 공동체적이며 사회적인 차원들을 제외시킬 위험이 있다. 그는 믿음이 신자의 삶에 미치는 외적 영향이나 신자들의 공동체적 삶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하지 않는다. 신학적으로 볼 때 불트만의 프로그램은 개인의 칭의(그 개인이 비본래성으로부터 본래성으로 변모하고자 하는 결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화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제적인 삶의 역학, 서로가 연합하는 공동체 속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주님의 제자들로서 영적 성장을 해 가는 것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왜곡된 하나님: 셋째로 불트만은 그의 실존주의적 여과망의 영향 아래 무한한 질적 차이라는 주제를 급진적으로 적용한 결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기에 이르렀다. 신학적 강화를 인간 실존의 차원에만 국한시키다보니 하나님의 영원한 실재라든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행동 등에 대한 주장을 배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불트만은 하나님이 내 안에서 행동하시는 경우에만, 즉 그 분이 본래적 실존을 창조하시는 한에서만 그 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신학을 본래적 실존으로 이끌어 가는 하나님과의 체험적 만남에 대한 성찰로 만들어 버리는 실수를 했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한에서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고 한 불트만의 주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을 인간의 신학적 주장의 한계 밖에 놓이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원한 신적 실재로는 알 수 없게 된다. \"신앙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비는 하나님이 그 자체로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는 인간과 더불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주장이 하나의 중요한 진리에 대하여 지적하고는 있지만, 신약 성경과 신학사 등과 비교할 때 한마디로 신학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을 너무 축소시켰음을 알 수 있다.
불트만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대부분의 진술들을 신화적이라고 분류하는 한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위하여 단번에\' 행하셨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될 때, 십자가는(불트만은 이것을 예수의 역사의 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이 인류를 해방하기 위한 인류에 대한 심판이다. 부활은(불트만은 이것을 과거 역사의 한 사건으로서 말하기를 거부했다)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거나 예수가 피안의 생명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십자가의 구원의 효력을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불트만은 주장했다.
기독교 메시지의 선포가 믿음을 낳는다고 불트만은 말했는데 믿음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케리그마\'는 예수 그리스도와 대면하는 장소이며 그것을 듣는 자에게 그것은 \'종말론적 사건\'이 된다. \'케리그마\'를 통하여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 자를 위하여 이 (낡은) 세상의 종말을 가져온다.
비판: 보수주의자들은 이 독일 학자가 성경의 권위를 위태롭게 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가 신화적 범주를 성경에 적용한 것에 대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영(Young)의 요약은 이러한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불트만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계시의 역사가 아니다. 예수는 세계 역사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적 사건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와 청취 속에서 그렇게 화(化)한다. 하나님의 행위의 초월적 특성은 특별한 의미로만 유지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 후에 있었던 역사의 한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의 차원이라는 등등.\" 불트만의 프로그램의 중심에는 주요한 신학적 문제가 놓여 있다. 이 문제는 세 가지 주요한 약점들로 확인된다. 첫 번째는 주해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생활에, 세 번째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일방적인 주해: 첫째 불트만은 실존주의라는 여과망을 신약학에 적용함으로써 지나치게 단순화된 주해를 하는 경향을 낳았고, 그것은 또 한쪽 측면만을 말하는 신학을 낳게 되었다. 신약 성경의 \'케리그마\'는 본질적으로는 실존적 강설이라는 그의 주장이, 한편으로 그 문서가 말하려는 주요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문서에서 제시하려는 바를 거두절미한 왜곡이다. 많은 본문들이 단순히 불트만이 공식처럼 제시한 인간 실존의 이슈를 다루지 않고, 다른 주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가 신앙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예수의 생애에 관한 내용을 별 무관한 것으로 여겼는데, 이는 그가 신앙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했다는 메시지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몰트만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그렇게 보면 \"구체적인 역사성이라는 것은 항상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를 통하여 드러나고, 가능해지고, 일정한 한계가 정해지는 것이지, 그 역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지 못한다.\" 우리 신앙의 표현으로서 예수의 역사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은 그 역사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사유화된 신앙: 둘째로 불트만의 신학적 접근법은 복음 메시지에 대한 너무 좁은 이해와 함께 곧 너무 좁고, 사유화한 신앙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본래적 삶의 문제에서 그것도 매우 개인화된 모습의 인격적 결단이다.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강조는 기독교 신앙의 공동체적이며 사회적인 차원들을 제외시킬 위험이 있다. 그는 믿음이 신자의 삶에 미치는 외적 영향이나 신자들의 공동체적 삶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하지 않는다. 신학적으로 볼 때 불트만의 프로그램은 개인의 칭의(그 개인이 비본래성으로부터 본래성으로 변모하고자 하는 결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화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제적인 삶의 역학, 서로가 연합하는 공동체 속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주님의 제자들로서 영적 성장을 해 가는 것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왜곡된 하나님: 셋째로 불트만은 그의 실존주의적 여과망의 영향 아래 무한한 질적 차이라는 주제를 급진적으로 적용한 결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기에 이르렀다. 신학적 강화를 인간 실존의 차원에만 국한시키다보니 하나님의 영원한 실재라든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행동 등에 대한 주장을 배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불트만은 하나님이 내 안에서 행동하시는 경우에만, 즉 그 분이 본래적 실존을 창조하시는 한에서만 그 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신학을 본래적 실존으로 이끌어 가는 하나님과의 체험적 만남에 대한 성찰로 만들어 버리는 실수를 했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한에서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고 한 불트만의 주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을 인간의 신학적 주장의 한계 밖에 놓이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원한 신적 실재로는 알 수 없게 된다. \"신앙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비는 하나님이 그 자체로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는 인간과 더불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주장이 하나의 중요한 진리에 대하여 지적하고는 있지만, 신약 성경과 신학사 등과 비교할 때 한마디로 신학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을 너무 축소시켰음을 알 수 있다.
불트만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대부분의 진술들을 신화적이라고 분류하는 한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위하여 단번에\' 행하셨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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