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성서시대
2. 출애굽과 정착
3. 군주 시대 ( 기원전 1020년)
4. 왕국의 분열
5. 바빌론 유수 ( 기원전 586 ~ 538년)
6.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기원전 538 ~ 142년)
7. 하스모니아 왕조 ( 기원전 142 ~ 63년 )
8. 로마의 지배 ( 기원전 63 ~ 서기 313년)
9. 비잔틴의 지배 ( 313년 ~ 636년 )
10. 아랍의 지배 ( 636년 ~ 1099년)
11. 십자군 시대 ( 1099년 ~ 1291년)
12. 맘루크의 지배 ( 1291년 ~ 1516년 )
13. 오스만 제국의 지배 ( 1517 ~ 1917년)
14. 영국의 지배 ( 1918 ~ 1949년)
15. 아랍의 반대와 영국의 통제
16. 이스라엘탄생
17. 2차대전 전후의 사태
18. 아랍민족의 결속
2. 출애굽과 정착
3. 군주 시대 ( 기원전 1020년)
4. 왕국의 분열
5. 바빌론 유수 ( 기원전 586 ~ 538년)
6.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기원전 538 ~ 142년)
7. 하스모니아 왕조 ( 기원전 142 ~ 63년 )
8. 로마의 지배 ( 기원전 63 ~ 서기 313년)
9. 비잔틴의 지배 ( 313년 ~ 636년 )
10. 아랍의 지배 ( 636년 ~ 1099년)
11. 십자군 시대 ( 1099년 ~ 1291년)
12. 맘루크의 지배 ( 1291년 ~ 1516년 )
13. 오스만 제국의 지배 ( 1517 ~ 1917년)
14. 영국의 지배 ( 1918 ~ 1949년)
15. 아랍의 반대와 영국의 통제
16. 이스라엘탄생
17. 2차대전 전후의 사태
18. 아랍민족의 결속
본문내용
대한 영국의 공포가 런던의 정책을 지배했던 반면, 이제는 석유자원이 풍부한 중동에 대한 소련 침투의 공포가 유럽에서 집을 잃은 나머지 유대인들을 성지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무기를 잡았다. 전과 같이 아랍 습격대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압제자들이라 생각하는 자들을 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목표는 영국군과 그 시설들이었다. 1946년과 1947년에 지하 테러조직의 대원들이 나라 안을 돌아다니며 10만 영국 주둔군을 대상으로 기습 및 폭탄공격이라는 유혈작전으로 쌓여있던 원한을 발산했다. 테러조직인 이르군, 즈바이, 레우미와 슈테른은 아랍인들에 대한 폭력운동을 가중시켰다.
한편 벤구리온과 골다 메이어 (두 사람 모두 뒷날 이스라엘 수상이 되었다) 같은 또 다른 전투적 시온주의자들은 무기를 나라 안으로 밀반입하고, 영국 순찰함을 피해 난민들을 잠입시키며, 영국정책에 반대하는 세계여론을 일으키는 활동에 그들의 정력을 집중했다. 정책을 완화시키지 말라는 아랍인들, 시온의 대문을 활짝 열라는 유대인들, 시온주의자들을 지지하는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 등 - 사방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영국은 1947년에 이 문제를 국제연합에 회부했다.
18. 아랍민족의 결속
1947년 11월 29일 몇 주일에 걸친 열띤 토론 끝에 유엔총회는 33대 13 (기권10) 으로 팔레스타인을 2개의 독립국으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10만 아랍인들의 국가와 와 65만 유대인들의 국가를 따로 만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것은 승리의 순간이었다. 그들에게는 할당된 지역은 유대대행기구 (Jewish Agency) 가 제의한 땅보다는 상당히 작았으나, 최소한 유엔의 결정으로 존립 가능한 국가의 출발만은 약속받았고, 그 나라는 히틀러의 살인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생존자들에게는 안식처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에게는 이 결정이 불법무도한 행위, 오랫동안 그들의 땅으로 생각해 온 지역의 강탈이었으며, 피로 보복해야 할 모욕이었다. 즉각 그들은 반격을 가했다. 예루살렘의 아랍 폭도들이 인근의 유대인들을 공격, 살육했고, 아랍 폭탄 테러단이 시장에서 폭발물을 터뜨렸으며, 팔레스타인과 인근 국가에서 규합된 아랍 게릴라들이 유대인 정착촌을 포위하고 교통통신망을 단절했다. 1947년 12월에 이르자 팔레스타인은 사실상 내전상태에 들어갔고, 서서히 철수하고 있던 영국군은 이에 개입하기를 거부하였다.
현 위치를 지키고,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절대절명의 방침이었다. 대부분 소총만으로 무장한 정착촌들은 각기 물러서지 않고 치열한 아랍인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분할결의안 통과에서 국가 선언에 이르는 6개월간 유대인들은 단 한 치의 땅도 내주지 않았다. 유대인들에게는 아랍인들에게는 없는 승리의 두 가지 열쇠, 즉 단결과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 십 년에 걸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문제는 유대대행기구(Jewish Agency)가 관장하고 있었다.
이 기구는 반공식적으로 선출된 기관이었는데, 영국이 떠남과 동시에 나라의 통치권을 행사할 준비를 갖추었으며 때가 되면 공식 정부로 나서게 되게 되어있었다. 비록 테러집단으로 조직된 유대인 반대세력이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절대다수는 그 기구의 권위를 인정했고, 그 지도자들은 기구의 지시를 준수하려 노력했다.
팔레스타인과 인접해 있던 아랍 각국은 시오니즘을 혐오한다는 데에는 뜻을 같이 했으나, 강력한 한 사람의 지도자가 없었고, 그 결과 그 처럼 작고 어린 국가쯤 쉽게 패배 시킬 수 있다고 그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심각한 과오를 범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단결이 결여된 아랍측에 대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곧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 1948년 봄에 유대국민군(Hahanah)은 유엔이 제안한 유대국가내의 모든 중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들이 점령한 도시들에는 중추적인 항구 하이파, 아랍인 도시 욥바, 시리아 국경 부근의 사파드 그리고 예루살렘 신도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신도시는 인접한 보다 작은 구도시와 함께 유엔이 국제지역으로 지정한 곳이었다.
유대인 들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진격함에 따라, 수십만 아랍인들이 도주했다. 그들의 생명과 재산은 안전하리라는 유대대행기구(Jewish Agency)의 보장을 불신하고, 곧 진격하게 될 아랍군의 뒤를 따라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믿으면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황급히 세간을 챙겨 배로, 버스로, 달구지로 또는 자동차로 국경을 넘어 인접국의 안전지대로 흘러 들어갔다. 거기서 그들의 대다수는 강제로 난민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들의 가련한 피난길은 이르군과 슈테른의 잔악무도한 폭행으로 인해서 궤주로 변했다. 두 폭력집단은 유대대행기구(Jewish Agency)의 지시를 묵살하고 1948년 4월 10일 데이르얏신이라는 마을에서 아랍 민간인 254명을 학살했다. 1949년까지 약 50만 명의 아랍인들 - 원래 살고 있던 주민의 75 % - 이 이웃나라로 피난가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을 탈출했다.
아랍의 폭도들을 저지하는 것과 아랍군대를 패퇴시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기와 그것을 사들일 돈이었다. 그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유대대행기구(Jewish Agency)는 1948년 초 골다 메이어를 미국으로 파견했다. 불과 한 달 동안 회오리 바람처럼 전국을 순회하며 메이어는 유태계 미국인들로부터 5000만 달러를 모금했다. 그리고 유럽 6개국의 잉여 장비 보관 창고에서 무기 - 기관총, 소총, 바주카포, 나르는 공중요새 B-17 폭격기, 그리고 아이러니칼하게도 나치 십자장을 다윗의 별로 다시 그린 몇 대의 독일제 메서슈미트 전투기들 -을 구입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으로 밀반입 할 수 있던 소량을 제외하고는 절박하게 필요했던 이 물자들은 영국의 공식 철수시점이었던 5월 14일 자정까지는 팔레스타인으로 반입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영국 해군함대는 무기반입을 방지하기 위한 팔레스타인 근해 순찰을 중지하게 되어 있었다. 한편 그 순간은 아랍국가들의 군대가 침공을 개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편 벤구리온과 골다 메이어 (두 사람 모두 뒷날 이스라엘 수상이 되었다) 같은 또 다른 전투적 시온주의자들은 무기를 나라 안으로 밀반입하고, 영국 순찰함을 피해 난민들을 잠입시키며, 영국정책에 반대하는 세계여론을 일으키는 활동에 그들의 정력을 집중했다. 정책을 완화시키지 말라는 아랍인들, 시온의 대문을 활짝 열라는 유대인들, 시온주의자들을 지지하는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 등 - 사방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영국은 1947년에 이 문제를 국제연합에 회부했다.
18. 아랍민족의 결속
1947년 11월 29일 몇 주일에 걸친 열띤 토론 끝에 유엔총회는 33대 13 (기권10) 으로 팔레스타인을 2개의 독립국으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10만 아랍인들의 국가와 와 65만 유대인들의 국가를 따로 만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것은 승리의 순간이었다. 그들에게는 할당된 지역은 유대대행기구 (Jewish Agency) 가 제의한 땅보다는 상당히 작았으나, 최소한 유엔의 결정으로 존립 가능한 국가의 출발만은 약속받았고, 그 나라는 히틀러의 살인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생존자들에게는 안식처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에게는 이 결정이 불법무도한 행위, 오랫동안 그들의 땅으로 생각해 온 지역의 강탈이었으며, 피로 보복해야 할 모욕이었다. 즉각 그들은 반격을 가했다. 예루살렘의 아랍 폭도들이 인근의 유대인들을 공격, 살육했고, 아랍 폭탄 테러단이 시장에서 폭발물을 터뜨렸으며, 팔레스타인과 인근 국가에서 규합된 아랍 게릴라들이 유대인 정착촌을 포위하고 교통통신망을 단절했다. 1947년 12월에 이르자 팔레스타인은 사실상 내전상태에 들어갔고, 서서히 철수하고 있던 영국군은 이에 개입하기를 거부하였다.
현 위치를 지키고,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절대절명의 방침이었다. 대부분 소총만으로 무장한 정착촌들은 각기 물러서지 않고 치열한 아랍인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분할결의안 통과에서 국가 선언에 이르는 6개월간 유대인들은 단 한 치의 땅도 내주지 않았다. 유대인들에게는 아랍인들에게는 없는 승리의 두 가지 열쇠, 즉 단결과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 십 년에 걸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문제는 유대대행기구(Jewish Agency)가 관장하고 있었다.
이 기구는 반공식적으로 선출된 기관이었는데, 영국이 떠남과 동시에 나라의 통치권을 행사할 준비를 갖추었으며 때가 되면 공식 정부로 나서게 되게 되어있었다. 비록 테러집단으로 조직된 유대인 반대세력이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절대다수는 그 기구의 권위를 인정했고, 그 지도자들은 기구의 지시를 준수하려 노력했다.
팔레스타인과 인접해 있던 아랍 각국은 시오니즘을 혐오한다는 데에는 뜻을 같이 했으나, 강력한 한 사람의 지도자가 없었고, 그 결과 그 처럼 작고 어린 국가쯤 쉽게 패배 시킬 수 있다고 그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심각한 과오를 범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단결이 결여된 아랍측에 대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곧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 1948년 봄에 유대국민군(Hahanah)은 유엔이 제안한 유대국가내의 모든 중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들이 점령한 도시들에는 중추적인 항구 하이파, 아랍인 도시 욥바, 시리아 국경 부근의 사파드 그리고 예루살렘 신도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신도시는 인접한 보다 작은 구도시와 함께 유엔이 국제지역으로 지정한 곳이었다.
유대인 들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진격함에 따라, 수십만 아랍인들이 도주했다. 그들의 생명과 재산은 안전하리라는 유대대행기구(Jewish Agency)의 보장을 불신하고, 곧 진격하게 될 아랍군의 뒤를 따라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믿으면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황급히 세간을 챙겨 배로, 버스로, 달구지로 또는 자동차로 국경을 넘어 인접국의 안전지대로 흘러 들어갔다. 거기서 그들의 대다수는 강제로 난민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들의 가련한 피난길은 이르군과 슈테른의 잔악무도한 폭행으로 인해서 궤주로 변했다. 두 폭력집단은 유대대행기구(Jewish Agency)의 지시를 묵살하고 1948년 4월 10일 데이르얏신이라는 마을에서 아랍 민간인 254명을 학살했다. 1949년까지 약 50만 명의 아랍인들 - 원래 살고 있던 주민의 75 % - 이 이웃나라로 피난가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을 탈출했다.
아랍의 폭도들을 저지하는 것과 아랍군대를 패퇴시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기와 그것을 사들일 돈이었다. 그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유대대행기구(Jewish Agency)는 1948년 초 골다 메이어를 미국으로 파견했다. 불과 한 달 동안 회오리 바람처럼 전국을 순회하며 메이어는 유태계 미국인들로부터 5000만 달러를 모금했다. 그리고 유럽 6개국의 잉여 장비 보관 창고에서 무기 - 기관총, 소총, 바주카포, 나르는 공중요새 B-17 폭격기, 그리고 아이러니칼하게도 나치 십자장을 다윗의 별로 다시 그린 몇 대의 독일제 메서슈미트 전투기들 -을 구입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으로 밀반입 할 수 있던 소량을 제외하고는 절박하게 필요했던 이 물자들은 영국의 공식 철수시점이었던 5월 14일 자정까지는 팔레스타인으로 반입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영국 해군함대는 무기반입을 방지하기 위한 팔레스타인 근해 순찰을 중지하게 되어 있었다. 한편 그 순간은 아랍국가들의 군대가 침공을 개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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