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신분변동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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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신분변동에 관한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 2

Ⅱ. 봉건적 토지소유와 그 해체과정
1. 봉건적 토지소유의 성격 ································· 3
2. 봉건적 토지소유의 해체 및 그 전개과정 ·············· 5

Ⅲ. 노비계급의 신분해방 ······························ 6

Ⅳ. 농민의 존재형태와 농민층의 변화 ·············· 8

Ⅴ. 양반사회의 변화와 신분 변동 ··················· 10

Ⅵ. 맺음말 ·············································· 19

참고문헌 ······················································· 21

본문내용

솔자의 직역과 처의 호칭을 통해서 반상의 분별이 가능했으며, 사족의 품관출신은 양반으로, 그 외에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계층으로서의 중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호주의 직역을 통해서 추정된 양반신분은 이 분야의 선학들의 견해와는 다소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와 같은 분석을 근거로 하여 양반신분의 이동을 조사해 본 결과,
첫째로, 양반호의 증가는 전국적인 보편현상으로서 상승이동이 주가 되었고, 반상을 중심으로 하는 신분제가 점차 붕괴되어 상층신분구조에 일대 동요를 초래하였으며, 양반의 계층분화를 초래하였다. 또한 양반호 중에서 유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후대로 올수록 거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 중에 상당수는 중인상민이 유학으로 모록된 양반으로 추정된다. 이들 모록양반은 피역자의 증가로도 이해할 수 있으나, 모록할 수 있었던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보아 상민층의 실력향상을 의미하기도 하여 상승이동이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둘째로, 노비는 양반들의 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존재였으나, 이들의 격멸(激滅)은 타신분으로 상승이동 내지 하층구조의 신분혼효 현상을 초래하는 한편, 양반들의 생활과 지위일대 변화를 초래하여 생업에 종사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으며 유업을 주로 하여 사관코자 하던 양반들의 특성을 잃게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소수의 양반호를 가진 본관이 대거 진출하고 있어 양반신분으로 상승이 폐쇄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다수의 양반호를 가진 명문씨족도 있었으나 직역이 각 신분에 산재하고 있어 본관 자체로써 신분의 존비(尊卑)를 가름하기는 어려웠다.
넷째로, 양반신분의 가계나, 세대와 세대 간의 신분계승관계를 통해서 볼 때, 양반은 신분상의 세습이 유독되어 왔으며, 양첩소생의 다음 세대는 유학으로 상승 이동되고 있었다.
다섯째로, 계층이동의 방법이 학문과 지식에 의존하기 보다는 부력과 결탁된 비리와 같은 물리적 요인에 의거하는 경향이 커지고 비리에 의한 모록의 방법이 사회이동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여섯째로, 양반의 계층분화 현상을 엿볼 수 있었는데, 단성현 장적의 경우, 양반직역의 대부분이 유학으로서 지역사회에서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향반이거나, 별로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몰락양반(천반) 내지 모록양반이었다.
이상과 같이 조선후기 사회의 신분의 이동적인 일면을 보았다. 신분의 이동현상이 상민층의 실력향상과 더불어 상승 이동됨에 따라 양반의 수적 증가는 상층구조의 계층분화와 하층구조의 신분혼효하는 구조적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 중에서도 조세의 주요 부담자이며 전체 계층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농민층은 그 분화과정에서 심각한 모순을 안고 있다. 이는 조선후기 신분제 변화 부분 중 농민층의 분화는 우리에게 중세유럽의 봉건제와는 차별적인 특수성을 지닌다. 서구의 경우 봉건적 토지소유 관계는 영주나 지주의 대토지 소유와 직접생상자인 농노의 분산적 경영이 지배적, 전형적 형태인데 비해, 조선에 있어서는 봉건적 토지소유의 논의에 국가의 위치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왕토사상이라는 대전제 하에서 결국 지주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사실을 막지 못한 채 국가조차도 스스로 지주화되어 간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토지소유의 변화 발전과정에서 조선후기 농민의 존재형태와 농민층의 경영구조에 대한 해명은 양안과 호적등을 통해 살펴보면 양반층의 급격한 증가와 상민, 노비층의 감소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신분상의 와해 현상은 봉건 국가를 해체시키는 요인이 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조선후기 신분이동의 과정에서 농민층은 17~18세기에 소수에 불과한 부농이 전체 농지의 40~50%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빈농이 차지하는 경지 면적은 전체 농지의 불과 20~30%에 그쳤고, 평균 경지 면적도 협소하다. 그래서 이 두시기 농민의 대부분은 불안정 상태의 경영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중세유럽의 혁명기에 나타나는 현상과 유사한데 프랑스혁명의 원인으로 꼽히는 ‘앙시앵레짐(ancien regime)’ 즉, 구제도의 모순으로서 다수의 피지배 계층이 소수의 지배계층이 경제력을 뒷받침해주는 모순을 말한다. 이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보편적 성격이었고 이러한 보편적 성격은 결국 혁명으로 나타나게 되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근대 태동기의 조선후기의 시기는 농민의 난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전체 조세의 부분을 담당하는 농민층이 조선후기 사회변동이 시기에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에 살펴보려고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농민은 자영농과 지주에 예속되는 전호로 나누어지고 이러한 농민은 광작의 경영에 의한 동일 계층 내에서도 중복 예속의 관계를 지니면서 세분화되는 관계로 발전하였다. 이는 국가가 기본적으로 토지의 국유화를 내세우지만 이를 벗어나 농민 스스로 토지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려하는 자생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으며 오히려 긍정적인 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근대적 변화를 가지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니면서 조선후기는 신분의 이동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經國大典
慶尙道丹城縣戶籍大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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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0.11
  • 저작시기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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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56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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